겨우 기운을 차려 몸을 일으키니 어스름한 아침이었다. 아직 캄캄하다. 어둠 가운데서 겨우 몸을 일으켜 휘장을 걷고 침대에서 나왔다. 의자에 앉아 몸을 가누었다. 심란하다. 인기척 없이 어두운 그의 방에 홀로 앉아있자니 더하다. 놔두고 온 아버지 생각을 했다.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굳이 사람을 불러 순욱을 찾을 마음은 없었다. 곽가는 그 저택을 나가 한참을 걸어 거리에 닿았다. 품에 있던 잔돈푼으로 얼마 안 팔고 있는 곡식을 좀 사서 성을 나갔다. 어제 못 본 사람 몇이 지키고 서 있다. 들어가는 일은 우여곡절이었다. 나가는 것은 아무도 잡지 않는다. 빈촌으로 향하며 곽가는 다시 한 번 성을 뒤돌아보았다. 문은 굳게 닫혀있다. 마저 발길을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통행금지가 내려진 어쩔 수 없는 기간 동안 곽가는 빈촌에만 있었다. 그 와중 약한 감기도 한번 앓았다. 성 안 시장은 들어갈 수가 없어 바깥에 조촐하게 몇 번 열렸다. 만드는 잡동사니는 고작 몇 개만 물물교환으로 팔 수 있었고, 장작 같은 건 살 수도 없었다. 결국 손수 마른 가지를 파서 단도로 떼어내 한 짐 등에 메고 오기를 하루종일 했다. 오래간만의 노동에 땀이 뒷목에 닿을 정도로 머리가 축축하게 젖었다. 집에 돌아온 딸이 얼굴이 창백하니 아버지는 말린다. 곽가는 개의치 않고 물을 뜨러 갔다가 결국 중간에 주저앉았다. 그 와중에 물통이 크게 흔들려 물을 반 쏟았다. 흘린 물이 둥그렇게 흐른 흙바닥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물을 반 쏟았으니 남은 길은 덜 무겁겠다며, 혼자 실없이 생각하곤 겨우 몸을 일으켰다. 후들거리는 팔다리를 재촉해 집까지 겨우 물통을 지고 가니 여기저기 멍든 곳이 선연했다. 그러나 이깟 일과로 기분은 상하지 않았다. 늘 해온 일이고 평생 이랬다. 그저 근래 모든 것이 이상했을 뿐. 몸이 괴로우니 저녁에도 금방 뻗어 잘 수 있었다. 유순한 얼굴을 한 신분 높은 사람에 대한 사념 같은 것도 없이 푹 잠을 잤다. 곯은 밥을 먹고 낮에는 덥고 저녁엔 추운 축축한 집에서 잠을 잤다. 아버지가 걱정하며 곽가가 떠맡은 일을 대신하려 했지만 그의 갑자기 늙어버린 몸은 뭘 못 해냈다. 노부를 만류하고 곽가는 꾸역꾸역 힘든 일을 했다. 실은 몸을 놀리지 않으면 괴로워서 있을 수가 없었다. 손이 비면 온갖 생각이 다 들어 고통스러웠다. 가끔 잡생각에 몸을 맡기고 걷다 보면 성문 근처로 가 있을 때가 있었다. 들어가는 길은 여전히 닫혀 있고, 그 안에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을 서서 봐도, 이따금 물자를 실은 마차만 들어갔다 나가는 것만 볼 수 있었다. 더벅더벅 걸어 그 자리를 피했다. 돌아갈 곳은 어차피 집이었다. 성 왕래가 다시 허가된 것은 한 달이나 뒤였다.


통행금지가 풀렸다. 어느 아침 곽가는 조심스레 상회에 얼굴을 내밀었다. 켕기는 거야 없지만, 낯설긴 했다. 소매를 만지작거리면서 어색하게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이리저리 눈을 굴려 필사적으로 순욱을 찾았다. 이 층엔 없는 것 같아 위로 올라갔으나 없었다. 일하고 있는 몇 사람이 왔다 갔다 하면서 곽가를 알아본 눈치만 있을 뿐, 인사 같은 게 들려오진 않는다. 머뭇거리다 결국 바깥으로 나가 그를 발견했다. 워낙 바쁜 사람이니 마중 같은 걸 바라지는 않았지만, 순욱은 눈을 마주치고도 바로 다른 사람과 함께 사라졌다. 곽가는 한숨을 쉬면서 상회 안 탁자에 가 앉았다. 턱을 괴고 앉아 한참 동안 나쁜 생각을 했다. 비뚤게 몸을 틀어 고개를 숙였다. 탁상의 까진 부분만 하염없이 보고 있는데, 누가 정수리를 손끝으로 톡톡 친다. 욕을 하려고 고개를 들어보니 순욱이어서 입을 다물었다.

“오랜만이지요? 괜찮다면 일과 끝나고 봅시다.”

역력한 상회 주인님 어투다. 곽가도 얌전히 예,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순순히 상회에서 나가버렸다. 아무리 그간은 축소해서 운영했다지만 장기간 일에 끼지 못했다. 또 쓸모없는 취급을 받으면 기분 나쁘겠거니, 하는 생각을 하며 시장을 느린 걸음으로 돌아다녔다. 닭 우는 소리 나는 더러운 새장을 지나고, 청과 파는 좌판에 눈길만 주었다 그 앞도 지나쳐 버렸다. 구경이 재미가 없다. 순욱의 별채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 길은 오래간만이어도 절대 낯설지 않았다. 늘 보던 하인들과 인사하고 그의 서재에 들어가 자리 잡았다. 책을 몇 권 읽어내자 시간이 꽤 흘렀다. 그가 돌아왔는지 적적한 별채가 갑자기 약간은 부산스러워졌다. 곽가도 몸을 일으켜 그의 방으로 갔다. 그가 있는 것을 보고 대뜸 그의 침대로 가 털푸덕 앉았다. 순욱은 기묘하게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그간 걱정했다.”

곽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말을 잇는다.

“왜 그렇게 표정이 나빠?”

“언니야말로? 내가 반갑지도 않았나 봐요. 보자마자 가 버리라 그러고.”

“사실 조금 화났었다.”

뭐가요? 묻자 옆에 와 앉는다. 빳빳한 외출복을 그대로 입고 있어 바스락 소리가 옷에서 났다.

“너 말이야, 그날 말도 없이 그냥 사라져 버렸지. 여기 더 있지도 않고.”

곽가는 잠시 숨을 돌리고 말을 골랐다.

“인사하려고 얼굴 보면 집에 못 갈 것 같아서.”

“그래.”

“그래도 보고 싶었어요.”

낮은 목소리로나마, 하고 싶던 말을 겨우 흘렸다.

“나도…”

그 말만 하고 순욱은 그저 멍하니 있는다. 그것이 갑갑해 손을 뻗어 먼저 끌어안았다. 한번 품에 들어오니 쉽게 머리를 기대고 조용히 말을 건다. 어떻게 지냈느냐는 말과 함께 팔을 꼭 쥔다. 괜찮았다. 대답하고 순욱의 작은 뺨을 문질렀다. 한동안은 느끼지 못한, 꿈 같은 감촉이었다. 입술을 대고 가만히 있었다. 가까이 붙어 숨을 쉬었다. 조용히 서로가 숨 쉬는 소리를 들었다. 갈수록 맥이 마구 뛰는 걸 느꼈다. 곽가는 천천히 옷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순욱은 우습다는 듯이 한번 흘겨보기만 하고 옷 벗기는 걸 도왔다. 한겹 한겹 떼어낼 때마다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그와 떨어져 있으며 깨달았다. 곽가는 그의 집에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를 만나러 갈 수도 없었다. 오늘 순욱을 만나러 성에 들어오곤 또 깨달았다. 순욱 혼자만 곽가에게 의미가 있다, 중요하다, 믿을 수 있다. 그런 소리를 한다. 하지만 다 쓸모가 없다. 그가 무슨 말을 해주든, 어떤 자리에서 무엇을 하던. 참 모든 게 싫어서 뭐 하나 딱 짚어서 싫지가 않다. 다 서러워서 무엇 하나만 서럽지도 않다. 좋은 것은 순욱 뿐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괴롭다. 맨몸이 달디 달은 그를 만지면서도 곽가는 결국 그런 생각을 했다. 땀이 배긴 동그란 배 위를 손바닥으로 훑곤 손을 내렸다. 잠잠하게 만지작대다 곧 손가락으로 속살을 파듯이 괴롭혔다. 교성을 참는 중인 입은 꾹 다물려 있다. 간만이기도 하니 살살, 천천히 해 주었다. 바르르 몇 번을 떨게 만들곤 다시 껴안았다. 순욱이 정신없는 모양으로 숨을 가쁘게 쉰다. 품 안으로 엉겨 붙으며 말한다.

“손이.. 거칠어졌어.”

그러며 젖은 손을 들어다가 본다. 벌겋게 남아있는 자잘한 흉터를 발견하곤 곽가를 약간 올려다본다. 괜찮게 지냈다고 하지 않았니. 그런 말로 팔뚝까지 쭉 올려다본다. 눈에 띄게 큰 흉을 발견하고 물어온다. 이건 또 왜 생겼어. 곽가는 붙들린 팔을 빼냈다.

“그건 원래 있었어요.”

모르겠다는 듯 뭐? 하는 순욱은 순진해 보일 뿐이다.

“전부터 있었다구요. 예전부터 있었어요.”

곽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옷을 집어 들었다. 다시 입고 나가버릴 듯하자 순욱이 당혹스럽다는 듯 슬쩍 붙잡는다. 곽가는 거칠게 고개를 돌렸다.

“나 보고 싶었어요?”

“말했잖아.”

“언니, 이젠 나를 좋아하나요?”

“그럼.”

너무나 쉽게 말한다. 부정하는 말보다 더 괴롭게 들렸다. 곽가는 매무새도 제대로 안 추린 채 옷을 성급하게 입고 침상에서 나왔다.

“왜 이러는 거야? 뭔가 급하니?”

이런 식으로 그가 서운하게 굴면 참을 수가 없다. 죄다 견딜 수가 없게 된다. 곽가는 힘없이 대답했다. 정원에 가서 바깥 공기를 쐬고 올게요. 순욱은 그래라, 하고 납득없는 말만 해 주었다. 곽가는 물기운이라곤 전혀 없이 꽃만 고르게 피어있는 마른 정원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계속 서 있었다. 며칠 후 곽가는 순욱의 상회에 나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도와줄 일이 있다고 하면 서류를 받아와 별채의 서재에서 했다. 그런 식으로 상회를 피하자, 순욱은 그것을 무척이나 불만스러워했다. 하루는 그가 대놓고 물었다.

“혹시 바라는 직위가 있니? 뭐든 하게 해줄테니..”

“없어요.”

바랄 것이라곤 이제 눈앞의 사람밖에 없었다. 순욱의 장담과는 달리 병든 아버지를 둔 가난한 빈촌 소녀로서는 어차피 어딜 가도 인정받을 수도 없고 쓸모 있을 수도 없었다. 흙집에서 딸을 기다리는 병든 아버지를 신경 쓰지 않는 성안 사람이 되면 모를까 말이다. 그런 건 죽을 만큼 싫었다. 하찮은 계집애로 사는 게 뭐가 잘못됐는지. 왜 다들 그렇게 막 보지 못해 안달인지. 결국 마음 놓을 것은 순욱 뿐이다. 그도 이렇게 자꾸만 곽가에게 신분을 떼어내려고 하지만 말이다. 곽가는 몸을 일으켜 순욱을 푹 껴안았다. 순욱은 아주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불만과는 별개로, 순욱은 아주 바빴다. 이따금은 별채로도 돌아오지 않아 곽가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시킨 일을 받으러 상회에 가도 자리에 없기 일쑤였다. 그의 집무실에 가 잘 싸인 종이뭉치를 품에 안고 별채로 돌아갔다. 일을 잘 마쳐 하인에게 자료들을 배달시켰다. 바깥은 까만데 저택은 조용하기만 하다. 오늘도 안 돌아올 모양이다. 조금 더 기다려본 후, 곽가는 자기 집으로 갔다. 그 후 며칠 만에 만난 순욱은 드물게도 요란한 차림새였다. 곽가는 눈을 살금 깜빡였다.

“왜 그렇게 차려입고 계세요?”

“응, 중매인을 만나고 오느라.”

“중매인?”

“아, 아. 얘기하지 않았구나.”

아차, 하는 얼굴로 깊이 난처해 한다. 순욱이 한숨을 푹 쉰다. 조만간, 하고 운을 어렵사리 뗀다.

“나 결혼한다.”

네? 곽가는 더 질문할 수도 없이 입술을 비틀어 물었다. 순욱은 아주 곤란해 하더니, 잠시 얼굴을 보러 온 것뿐이라며, 본가로 가야 한다고 또 자리를 떴다. 곽가는 얼이 나간 채 그의 방 탁자에 계속 앉아있었다. 어쩐지 요즘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던 별채엔 거칠게 지저귀는 새 소리만 울렸다.


GAM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