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보내는 내년 달력 <수요 그림 편지>
2023년 [보낸사람:] 인터뷰 시리즈를 열어주실 엄주 님, 소개 부탁드려요.
말로 하면 되는 걸 글로 쓰고, 그림과 관련된 거라면 뭐든 열심히 하는 엄주입니다. 2023년 기준으로 외주로 돈을 받고 그림 작업을 한 지 10년 차가 되었어요.
<수요 그림 편지>는 어떤 뉴스레터인가요?
2023년 달력 <TAKE ME ALONE>에 실릴 그림을 미리 한 편씩 그려 보냈던 뉴스레터입니다. 달력 작업은 2년 연속 아침달 출판사와 함께 하고 있고, 매 해 연말부터 판매를 개시합니다.
2022년 여름, 첫 호를 보내기 전부터 이 뉴스레터의 종착지가 내년도 달력이라고 선언하고 시작하셨죠?
스티비에서 처음 뉴스레터 발행 제안을 주셨을 때는 제가 못할 줄 알았어요. 처음 미팅을 한 게 6월이었는데, 달력이 나올 크리스마스를 여름부터 떠올려본다는 게 저로서는 좀 막연했거든요. 속으로는 이게 될까 싶었는데 ‘이게 되네’를 확인할 수 있어서 결과적으로는 자신감이 붙었어요. 6개월짜리를 해봤으니, 앞으로 어떤 일이든 8개월, 12개월이 걸려도 충분히 할 수 있겠다는 감각이요.
그런데 뉴스레터 구독자 전원에게 달력을 선물로 보내주셨잖아요. 이런 결단은 어떻게 가능했는지 궁금해요.
일단 제가 퍼주는 걸 좋아하고요. 이미 구독자는 제게 정기적으로 비용을 지불해 주었는데, 여기서 달력 정가에 따른 차액을 굳이 계산하려니 머리가 아프더라고요. 무탈히 달력이 나오고 보니, 첫 번째로 감사한 분들이 <수요 그림 편지> 구독자였어요.
선물로 받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구독자분들이 무척 반가워하셨을 것 같아요.
마지막 호를 보내고 나서 달력을 받아보실 주소지를 알려달라고 메일을 보냈을 때, 구독 후기들을 여럿 보내주셨어요. ‘우리 식당 영업 종료합니다’ 안내문을 붙인 마음이었달까요. 사실 평소에 뉴스레터에 대한 피드백을 자주 받았던 건 아니어서, 아쉽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해 주시는 걸 보니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그런 점에서 <수요 그림 편지>가 크라우드 펀딩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구독자 모집 페이지가 상시 열려있다는 점, 달력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언제든 응원하는 마음을 구독료를 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요.
맞는 말 같아요. 처음에는 앞으로 펼쳐진 긴 레이스를 가야 하는데, 나 혼자 가는 게 아닌 데다가 지지받는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어요. 실제로 저는 ‘돈값은 해야지’라는 생각을 가장 자주 했어요.
돈을 받으면 책임감이 생겨버리기 때문이었을까요? 원래 격주 수요일 발행을 예고하시고는 매주 수요일마다 뉴스레터를 보내셨잖아요.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11월인데 ‘왜 그림 재고가 벌써 12개가 넘었지?’ 하고 그제야 알게 됐어요. 제 머릿속에 뉴스레터 발행 빈도는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수요일에 마감을 해야 한다”라는 생각뿐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매주 그림을 그려서 보냈나 봐요.
구독자 중 아무도 엄주 님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어요. 내가 실은 매주 이 레터를 받고 있다고! (웃음)
달력을 펴낼 아침달의 서윤후 편집자님도 글을 손보아주시느라고 덩달아 매주 고생하셨을 텐데, 별말씀이 없으시더라고요. 테스트 메일을 보내면 편집자님이 그림에 이어지는 글을 한 번 확인해 주시는 식이었어요.
그림은 혼자 그리지만, 뉴스레터 본문 작업은 편집자님과 함께하신 거군요. 달력 소개 글을 보면 ‘홀로 떠난 여행의 장면들’을 담고 있다고 되어 있는데, 출판사와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나요?
출판사에서 그간의 그림을 쭉 검토해 보고는 뉴스레터에 연재한 그림의 주요 테마였던 ‘휴식’과 그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테마인 ‘여행’을 엮어보자는 의견을 주셨어요. 저는 쉼에 초점을 맞춘 그림을 그리긴 했지만, 달력용 일러스트에 대해 아주 정확한 상이 있던 건 아니었거든요. 제가 최선의 작업물을 모아서 전달해 드리면, 출판사에서 최대한 결이 맞는 그림들을 골라주셨어요.
‘결이 맞는 그림’이라는 건 정확히 무엇인가요?
제가 보기에는 미묘하게 결이 다르더라도, 제삼자의 시선으로 보기에 하나로 엮일 수 있는 그림들을 뜻해요.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시기별로 작업 스타일을 조금씩 달리 해왔거든요. 2022년 달력 <EAT, PLAY, READ, WALK, REST, MAKE>는 그간의 제 작업 스타일을 총망라했다고 할 수 있어요. 최근 반년 간은 라인 드로잉 위주의 스타일에서 유화 스타일의 디지털 드로잉에 집중했는데, 그러한 변천사가 2023 달력 <TAKE ME ALONE>에 담겨 있고요.
그림 작업자의 휴식과 초심
휴식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고 싶어요. 구독자에게 요청받은 키워드라고 하셨죠.
제 그림을 봐주신 분들이 매력을 느끼는 포인트는 무엇인지 늘 궁금해서 사전에 설문조사를 진행했어요. 답변을 보니 ‘휴식’에 관한 그림을 보고 싶다는 의견이 가장 많더라고요. 그림이 하는 역할, 특히 누군가의 공간에 놓인 그림이 하는 역할은 그걸 보는 동안 눈이든 마음이든 쉬게 해주는 데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작업 방향을 잡아나갔습니다.
휴식을 테마로 둔 그림과 글을 작업한 지난 6개월이 엄주 님의 휴식에 실제로 도움이 되었나요?
원래 쉼과 일의 경계가 별로 없는 편이라, 이 작업을 하는 동안 휴식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특별히 애쓰지는 않았어요.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외주 일을 의뢰한) 일러스트레이터가 잠수를 탔어요”라는 요지의 SNS 글을 보게 될 때가 있잖아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선 이상으로 일을 받게 되면 번아웃이 오고 그 결과 연락이 단절되는 듯해요. 제가 어떤 상황에서도 잠수를 타지 않는 건, 평소에 할 수 있는 만큼만 일을 수락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에요.
다행이에요. 소진되지 않으셨다니.
물론 할 수 있는 만큼 하면서도 쉬고 싶다는 마음이 생길 수 있는데요. 저는 가지고 싶은 걸 그리면 그 대상에 대한 욕구가 조금 줄어들더라고요. 그래서 휴식에 대한 갈망을 그림으로 그리면 답답한 마음이 풀리는 기분이에요.
엄주 님이 오래전부터 그렸던 그림을 모아둔 상자를 열어보는 유튜브 에피소드에서 “돌아오지 않을 초심을 간만 본다”라는 표현을 해주셨더라고요. 10년 차에게 있어 초심은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일단 정확히 뉴스레터를 보내는 시간 동안 유튜브를 쉬었다는 점부터 말씀드리고 싶어요. ‘내가 왜 유튜브를 놓았지?’ 하고 생각해 보니 그 시간에 뉴스레터를 보내고 있었던 거예요. (웃음) 처음으로 돌아가는 건 채찍질이 필요하기 때문인데요. 대단히 효용성이 높은 채찍은 아니지만요.
저도 그래요. 분명 채찍을 손에 넣었지만, 그걸로 스스로를 너무 아프게 때리지는 않는 요령이 생겼달까요?
그래도 만년필로 선을 하나하나 따고 수채화 그림을 그렸던 저의 작업물을 보고 있으면, 지금은 엄두도 낼 수 없지만 분명 제 안에 있던 열정이 떠올라요. 더 어렸을 때의 나는 얼마나 그림을 잘 그리고 싶었는지, 내가 갖추길 원했던 그림 스킬은 무엇이었는지, 그 모든 걸 갖췄다고 생각하게 됐을 때는 어떤 선택을 했는지 같은 것들도 다시 기억해 보게 되고요.
10월에 보낸 <수요 그림 레터>에서 “존재하는 인간을 편협하지 않게 표현하기”에 대해 이야기하신 적이 있어요. 어떤 고민을 나누고 싶으셨나요?
일단 저부터 피로해져서 했던 말이에요. 소위 ‘미인형’과 ‘미남형’만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가 있다고 한다면 왜 그럴까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창작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환상과 열망을 담아낼 인물을 그리게 되는 건 당연해 보이지만, 한순간에 그게 좀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작업물들을 올려놓은 제 SNS를 보니 저라고 별반 다른 게 없는 거예요. 온라인에서는 소비를 부추기는 포스팅을 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편협한 인물 이미지를 생산 해내는 일러스트레이터 역시 문제의 일부가 될 수 있어요. 다른 존재를 표현할 의지를 다져야겠더라고요.
디지털로 그림을 보는 감상자들이 천편일률적인 이미지만 소비하는 점에 대한 일갈인 줄 알고 읽기 시작했는데, 계속 함께 고민해야 할 화두를 던져주셨어요.
세 번을 그리면 그중 한 번은 머리에 힘을 좀 주고서 다른 그림을 그려보자는 다짐이었어요. 이를테면, 마르지 않은 몸을 가진 사람을 그려보자 같은 건데요. 나름대로 머리에 힘주고 작업을 한 이후로, 민우회,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같은 비영리 단체들과도 협업하고 있어요.
다른 존재를 표현한다는 게 단순히 몸을 그리는 일에만 그치지는 않을 텐데, 또 어떤 경우가 있을까요?
오랜 시간 상업적인 그림을 그려왔으니 제가 연상하는 이미지조차도 선입견에 갇힐 때가 많아요. 이를테면, 휠체어는 비주얼적으로 강력한 이미지예요. 휠체어를 탄 인물이 등장하는 그림을 보고 나면 뇌리에 박히잖아요. 저의 과제는 감상자들이 단지 ‘휠체어’에만 집중하지 않고, 그 인물을 더 궁금하게 만들 수 있는 그림을 그려보는 데에 있어요. ‘저 사람은 누구일까’, ‘저 사람은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을까’ 하고요. 모든 작업이 당사자성을 가질 때 제일 좋겠지만, 제가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고민이 있는 것 같아요.
요즘 돈을 받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인가요?
사회적으로 옳은 이미지를 만들고 싶다. 나에게 돈을 주는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놓고 고민해요. 작업물에 제가 감지하는 사회의 분위기와 여론 또는 제 가치관이 반영될 수 있도록 클라이언트와 대화를 나눌 수 있지만, 무작정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 밀어붙일 수는 없으니까요.
프리랜서의 단짠 이야기 <프리 레터>
1월부터는 <프리 레터>를 보내신다고요. 이 뉴스레터는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용인대학교 회화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프리랜서의 절망과 희망’이라는 주제의 특강을 한 적이 있어요. 하고 싶은 말이 많더라고요. 제게 특강 의뢰를 주신 교수님도 “강의 자료로만 두기에는 좀 아까운데요.”라고 하셨고요. 그래서 뉴스레터를 보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프리 레터>에는 제가 어떻게 그림을 그리게 됐는가 같은 신변잡기부터 계약서와 저작권을 포함해 프리랜서가 법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내용까지 다룰 예정이에요.
강의 준비 자료가 새로운 뉴스레터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네요.
강의 전에 교수님과 나눈 이야기가 도움이 됐어요. 서울 소재의 회화과 학생들과 서울 바깥에 있는 회화과 학생들이 조금 다른 자극을 받는다는 거예요. 교수님이 보기에는, 그중에서도 사회에 나가기 직전인 제자들이 조금 더 막연해 보인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어떤 막연함일까요?
그림을 놓지 않고 싶고, 돈은 벌어야 하고, 그 사이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할 때 생겨나는 감정일 텐데요. 여기서 ‘프리랜서’가 아주 유망한 선택지가 되고 있다는 거예요. 그 선택지에 대해 관심 있는 친구들이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프리랜서도 만만치 않게 힘든 길이니까 잘 생각해 보고 시작해요”라고 말해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림 작업을 하는 학생과 사회초년생, 여러 분야의 프리랜서 외에 <프리 레터>의 구독자로 염두에 두신 분들이 있나요?
출판사 담당자분들이 부지런히 구독해 주시더라고요. 지금의 저는 뉴스레터를 통해 꾸준히 쓴 글들이 책으로 출간되는 걸 목표로 삼고 있어요.
<수요 그림 편지>는 달력으로 이어졌는데 <프리 레터>는 책으로 확장될 여지를 생각하고 있으시네요.
‘책을 쓰고 싶다’는 마음은 막연하지만 ‘책이 되기 위한 원고를 가지고 있다’는 구체적이니까요. 꼭 물성이 있는 결과물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프리랜서 작가들과 모임을 할 때 뉴스레터에서 던진 질문들에서 출발해 함께 나눌 수 있는 내밀한 이야기들이 있을 거예요.
평소에 프리랜서 작가들과 나누는 이야기가 뉴스레터에 담길 테고, 또 그 내용이 대화의 소재가 되면서 순환이 이루어지겠어요.
궁극적으로는 그림을 안 그리고 싶어요. 언젠가,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에이전시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요. 작가로서 저에게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를 판별하는 감각이 생겼다면, 그 감각을 토대로 미래의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이 있을지 가끔 떠올려본 결과예요. 그중에 하나는 다른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자신의 활동을 문제없이 계속해나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고요.
<수요 그림 편지>에서 알게 된 점들이 <프리 레터>를 시작하는 데에는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되었나요?
6개월을 보내본 경험이 1년 동안 보내는 일을 위한 용기로 이어졌고요. 동시에 일정 관리도 용이해졌습니다.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실수하지 않고, ‘한 달에 세 번만 하면 되는 일이다!’ 하고요. (웃음) 그리고 <수요 그림 편지>를 기획할 당시, 이메일 뉴스레터 서비스에서 사용하는 용어 자체가 제게 생소하게 느껴져서 스티비 팀에 몇 번이나 문의를 드렸거든요. 그런 초반의 시행착오를 다시 겪어도 되지 않으니까 새로운 시작이 더 수월하게 느껴져요. 앞으로도 어떤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워밍업 단계로 뉴스레터를 활용하게 될 것 같아요.
도움닫기 같은 거네요. 두 가지의 뉴스레터를 보내시면서 그림 작업자와 프리랜서 외에 엄주 님께 생긴 새로운 정체성이 있을까요?
이제는 스스로를 ‘뉴스레터 예약 발행 버튼을 누르는 루틴이 생긴 사람’ 정도로 인지하고 있어요. 아마 다른 분들은 ‘저 사람은 정기적으로 뭔가를 해내는 사람이구나’ 하고 저를 바라봐주시지 않을까 싶고요. 내 콘텐츠가 재화가 되는 경험이 돈과 무관한 개인 프로젝트를 좀 더 성실하게 임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되어주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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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마치며
‘3월 달력을 3월 8일이 되어서야 넘기고 있다니.’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살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이번 달의 달력을 마땅한 타이밍에 넘기지 못한 걸 발견할 때 하게 됩니다. 그럴 때면 언젠가 마음에 드는 달력을 고르기 위해 고심했던 순간이 무색하게 느껴지기도 하죠. 2023년 달력의 예고편과도 같았던 엄주 작가의 <수요 그림 편지>, 그 본편 격인 달력은 지금 제 방 한편에 걸려 있습니다. 과연 올 해는 매 달 1일마다 잊지 않고 다음 장으로 건너갈 수 있을까요?
<프리 레터>를 보내기 시작한 엄주 작가의 이야기는 우리가 각자의 일을 시작하던 한 시절,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책임감이 하루하루 쌓아 올릴 미래를 떠올려보게 합니다. 묵묵히 또 살아보아야겠습니다. 매 번 저를 반겨줄 남은 열한 달의 일러스트 속 주인공들에게 미리 고마움을 전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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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포토그래퍼 전예슬
인터뷰 | 에디터 서해인, 스티비 마케팅 팀(룰, 세솔)
편집 | 스티비 마케팅 매니저 룰
메인 이미지 | 스티비 디자이너 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