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이면 끝날 줄 알았던 프로젝트
광고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던 상태로 팀민트에 합류하며 “마케터의 생산성을 증대시킬 수 있는 리포트 자동화 서비스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일당백 개발자라 할 수 있는 좌 이준명, 우 김형준님을 갖춘 저로서는 무서울 게 없었습니다. 이들과 함께라면 6개월 안에 모든게 끝날거라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의 늪은 깊고도 깊었습니다.
“나 스스로 만족할만한 서비스인가? 나라면 비용을 지불하고 이 서비스를 쓸까? ”
정작 개발을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난 시점에 저는 이 질문에 Yes라고 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지쳐가는 팀원들
저도 지쳐갔지만 함께 하는 팀원들도 많이 힘들어 하는게 보였습니다. 마케팅이라는 업계에 대한 이해, B2B 서비스 특성상 요구되는 높은 개발 이해도의 문턱은 디자이너 영은님에게 잦은 좌절을 안겼고, 빠른 서비스 상용화를 통해 애자일한 프로세스와 수익 성과를 원했던 형준님은 언제까지 지난한 개발을 이어나가야 하는지 답답해하는 눈빛을 보냈습니다.
ReFit과 유사한 서비스 사례를 보면 빅매체당 한명의 백엔드 개발자가 붙는다는데 홀로 모든 매체/트래커 API 문서에 파묻혀 씨름을 해야만 했던 준명님은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고무줄 같았습니다. 마케팅에 대한 이해도가 저보다 높았던 한결님은 세일즈/온보딩/개발/CS 어디 하나 발 안디딘 곳이 없을만큼의 드넓은 업무 커버리지를 담당해야 했습니다.
저희보다 조금 늦게 합류한 혜진님은 제가 MIX 프로젝트를 손 놓은 만큼, 홀로 고스란히 무게와 책임을 짊어지며 팀원 중 유일하게 두 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개발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제일 늦게 합류한 동석님 또한 프로젝트가 바쁘다는 이유로 팀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스스로의 힘 만으로 업무를 찾고 익혀나가야 했습니다.
2015년의 기억으로 동력을 찾다
2023년 10월,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할지, 난이도가 측정되지 않는 “피팅룸"이라는 기능을 개발 할 것인가 말것인가 기로에 섰습니다.
이 기능이 필요하다는 팀원도 있었고, 왜 이걸 만들어야 하는지 고객의 니즈나 근거가 없이 시작하기 힘들다는 팀원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불현듯 2015년 제가 처음 증권사로 입성할 당시, 면접에서 본인을 소개한 부서장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우리는 Number를 다루는 사람이거든”
그땐 사실 엄청 웃기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냥 숫자라고 이야기 하면 되는데 넘버라고 영어로 말하는것도 웃겼고 “숫자를 다루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는것도 보통의 직업 정의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이상한 문장 같아 보였으니까요.
하지만 증권사, 그것도 프론트 오피스 쪽의 모든 것들은 정말 숫자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8대가 넘는 모니터를 통해 수 많은 숫자와 그래프를 봤고 오후 4시가 넘어가면 각 부서, 각 팀, 더 좁게는 한명 한명의 수익이 숫자로 나왔습니다.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세상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2017년이 된 해, 옆 부서였던 ELS팀에서 엑셀 작업과 분산처리 시스템을 모두 자동화 해서 포지션을 한번에 뽑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열심히 만들고 반응을 관찰했는데 클릭만 하면 결과가 나오는 편리한 결과값을 두고 대부분의 트레이더들은 엑셀을 항상 옆에 켜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 왜 자동으로 숫자 뽑아줘도 엑셀을 항상 써요?
트레이더: 내가 뭐 계산하거나 실시간 숫자들 뽑고 싶을 때, 결과만 주는 화면은 대응이 안돼. 그리고 숫자 틀린 걸 알아차릴 수가 없잖아.
실무를 하는 트레이더는 단 한명도 빼놓지 않고 엑셀을 병행해왔고 나중에 제가 만든 프로그램은 본부장/부서장 보고용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마케터도 Number를 다루는 사람 아닌가?
크게 보면 마케터도 트레이더처럼 Number를 다루는 사람입니다. 트레이더가 자산을 살지 말지 숫자를 보고 판단한다면 마케터는 광고 운영을 어떻게 할지를 숫자 보고 판단하는 것이니까요.
지난 제 경험을 비추어볼 때 숫자를 다루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1) 내 마음대로 숫자를 변환할 수 있는 자유도가 보장되어야 하고, 2) 그 숫자가 맞는지 검증할 수 있는 근거 혹은 장치를 함께 제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숫자를 다루는 사람들은 엑셀로 회귀하고 말 것이란 거죠.
피팅룸을 완성하다
의지를 가다듬은 저는 다시 팀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눈 딱 감고 2024년 2월까지 3–4개월만 더 만들어보자구요. 한 조각의 제 과거 경험으로 팀원들을 완벽히 설득할 수 없었기에 여원님께도 도움을 요청하며 개발 의지를 피력했습니다. 그렇게 저희는 멈출뻔 했던 바퀴를 다시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논문까지 뒤져가며 연구를 몰두한 형준님은 일정이 촉박하나 피팅룸 기능 개발이 이론적으로 가능할 것 같다는 의견을 내주었습니다. 한결님은 피팅룸에서 데이터를 보다 쉽게 변환할 수 있도록 우리가 SD(Seed Data)라고 일컫는 형태로 원본 데이터를 1차 가공하는데 매진하였습니다. 영은님은 제대로 된 기획도 받지 못한 채 기간을 맞추기 위해 디자인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준명님은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의 오류들을 잡아내고 방향성을 잡아주며 데이터 수집에서 피팅룸, 그 뒤 데이터 활용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을 완성해냈습니다.
목표한 완성 시점보다 한달이라는 시간을 더 쓴 우리는 마침내 2024년 4월 8일, 피팅룸을 장착한 ReFit을 세상에 내어놓습니다.
가장 만들기 어려웠던 서비스 ReFit
ReFit은 단연코 제가 해본 모든 프로젝트를 통틀어 가장 만들기 어려웠던 서비스입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거에요. 매체 데이터 API로 좀 붙이고 적당히 화면 만들면 완성될거라 생각할테니까요. 하지만 우리와 유사한 서비스 만든다는 소식은 과거도 현재도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지금껏 실체를 갖춘 서비스가 얼마나 있었나요?
지금의 ReFit을 만들어 냈다는 것에 저는 대단한 자긍심을 느낍니다. 서비스는 완성도가 아니라 고객의 피드백 결과로 평가되어야 하기에 우리 스스로가 잘했다고 평가하는 것이 우스울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감히 주장하건데 어디 애드테크/마테크 스타트업에서도 7명 만으로 1.5년 안에 이만큼의 기능과 퀄리티 완성도는 만들지 못할 겁니다.
남은 것은 우당탕탕 서비스 운영
하지만 자화자찬의 시간도 잠깐일 뿐이죠. 아직도 부족한 기능들이 너무나 많기에 수 많은 에러와 불만들을 맞서야만 할 겁니다. 개발도 벅찬 이 인원으로 서비스 운영까지 소화해야 한다는 것은 또 다른 난해한 상황으로 우리를 이끌어 갈 겁니다. 고객이 착실히 쌓이고 좋은 평판이 생기는 그런 예쁜 미래는 글쎄요… 출근하는 아침마다 우당탕탕 난리통 시장통의 모습이 훨씬 현실적일 겁니다.
“Number를 다루는 마케터”라면 ReFit은 필수
언제 모든 마케터가 ReFit을 사용할 날이 올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숫자를 진정으로 다루는 마케터라면 저는 ReFit의 진가를 한번에 알아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렇게 한명 한명 찾아나서며 우리의 서비스를 알리고, 또 마케터라면 이렇게 데이터를 다뤄야 한다고 우리의 방식을 설파한다면 언젠가 우리가 만드는 데이터가 마케팅 시장의 표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마케터가 있다면, 그리고 숫자에 진심인 마케터라면 꼭 한번 ReFit을 써보세요. 당신의 시간이 더욱 의미있는 곳에 쓰일 수 있도록 실망 시켜드리지 않을 자신 있습니다.
이상으로 서비스 런칭을 3일 앞두고 작은 소회를 담아 출사표를 써봤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