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이라는 허상

Park Shinwoo
The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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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min readJan 23, 2021
<Impression of Vertical Village in Seochon, Seoul> ©Doojin Hwang Architects

지난 세기의 건축은 기능주의라는 말로 요약될 정도로, 기능은 건축의 많은 것을 결정짓는 기초개념이었습니다. 이른바 ‘Form follows Function’은 건축을 넘어 현대인의 사고방식을 잘 보여주는 캐치프레이즈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기능에 대한 이해 또한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 모더니즘 초기에는 기능간의 명확한 구별과 분리를 이야기했지만, 이제는 그런 구분이 무의미해진 것 같습니다. 과연 기능(또는 프로그램)이라는 개념이 오늘날의 건축에서도 유효할까요? 이와 관련하여 얼마전 재밌게 읽은 황두진 선생님의 <무지개떡 건축>의 본문 일부를 그대로 공유하고자 합니다. 다른 얘기지만 저는 제목과 겉표지만 보고 일반인에게 읽히는 건축 입문서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오산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황두진씨는 기성세대 중 가장 ‘서울적’인 어프로치를 보여주는 건축가가 아닌가 생각하고, 그런 내용들이 책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기능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현상의) 첫 번째는, 기능 집합체들 간에 세부기능이나 단위행위를 교환하는 현상이다. 재택근무란 표현은 이제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에 업무는 주거의 일부 단위행위를 가져가고 있다. 회사 안에 취사, 수유공간이 제공되는 등이 그 예시이다. 일단 이런 현상을 의식하고 보면 사실 이미 이러한 기능의 상호교환과 침투행위는 매우 보편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Shop in Shop’이라 하여 한 기능집합체 안에 소규모의 다른 기능집합체가 침투해 들어오는 것도 그런 예의 하나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은행 한구석에 카페가 들어오는 것 같은 현상이 여기에 해당된다. 아주 고전적으로는 식당 주인아주머니가 부동산 소개소도 겸하는 그런 상황도 여기에 속한다. (발터 벤야민이 이런 것들을 보았으면 그의 다공성 이론을 훨씬 더 확대시켰을 것이다.) 카페에서 사람들이 일하는 풍경은 이제 식상할 정도다. 마치 카페란 원래 일하는 곳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 아닌가.

어떻게 이런 현상이 가능할까? 간단히 답하면 모더니즘 초기보다 기술이 훨씬 발달했기 때문이다. 코르뷔제의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에 등장하는 기계들을 보라. 증기선, 사일로, 복엽기 등은 오늘과 비교해 한창 원시적인 것들이다. 당시에는 인터넷도 우주선도 없었다. 기능주의는 상대적으로 기술 발달정도가 낮고 원시적이었던 시절에 만들어진 이론이다.

도서관을 예로 들어보자. 고전적인 도서관에서는 서가가 있어야 했다. 다행히 대부분의 책은 분류에 어려움이 없었다. 각 분야간 세분화가 덜 된 탓이었다. 그런데 문명이 발달하면서 각 분야는 갈수록 세분화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다른 분야들 사이의 합종연횡도 흔해졌다. 전통적인 분류가 잘 들어맞지 않는 책들이 수없이 생겨난 것이다. 기능주의의 한계는 바로 이런 것이다. 기능을 담는 그릇이므로 기능에 따라 그 그릇의 형태가 결정된다고 보았는데, 기능 자체가 변하면서 그릇의 형태도 일정한 틀에서 벗어나게 되면 어찌 형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 역시 해답은 기술의 진보에서 나온다.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거추장스러운 카드 열람실은 자취를 감췄다. 심지어 책이 도서관에 어디에, 어떤 분류로 놓여있든 원칙적으로 무의미하다. 어딘가에 있기만 하면, 그 내용과 위치가 검색을 통해 연계만 되면 그뿐이다. 디지털 검색이라는, 보이지도 아ㄶ고 형태도 없으며 장소도 차지하지 않는 첨단기술이 카드열람실이라는 그릇과 그 형태논리를 아예 지워버렸다. 구글 시작페이지의 저 싸늘한 침묵을 보라. 거기에는 형태도 없고 형태논리도 없다. 하지만 그 뒤에 지구 최강의 검색기술이 감춰져 있음을 우리는 안다.

…같은 장소가 시간대별로 다른 기능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발달된 가구와 집기, 그리고 장비에 의해 한 장소의 성격이 시시각각 변한다. 역설적으로 건축의 역할은 이전보다 훨씬 더 섬세해진다. 최대한의 유연성과 잘 고안된 시스템과의 결합은 필수적이다. 근대 이후 수많은 건축가가 꿈꿔온 유니버설 스페이스는 이제부터 본격적인 서막이 오르는 셈이다.

…이렇게 시간대별로 한 장소의 성격이 변하는 좀 엉뚱한 예는 우리에게도 있다. 대한민국은 디자인적으로 보면 아쉬운 점이 많지만, 생태계적 관점으로는 아마 세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나라일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이질적인 것들이 기괴하게 결합한다는 의미에서 놀랄 정도로 키치적이고, 자연발생적이며, 길거리 미학적인 방식으로 첨단현상을 통쾌하게 예견하는 사건들이 종종 일어난다. 그런 예 중의 하나가 한때 강남 일대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자동차 정비센터와 개방형 포장마차의 결합이다. 간단히 말해 낮에는 자동차를 정비하고, 밤에는 자동차가 빠져나간 주차장에 드럼통을 개조한 곱창 테이블과 의자를 갖다놓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완전히 종류가 다른 영업을 한다. 강남의 살인적인 지가와 밤낮없이 거리를 메우는 엄청난 유동인구, 거기에 상상력 풍부한 비즈니스맨들의 아이디어를 결합한 일종의 부동산 파생상품 같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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