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에서 생각난 “문장 줄이기” 의 추억

뒤늦게 재미를 들여서 단번에 읽어내린 웹툰 미생. 대기업 상사뿐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의 일반적인 분위기의 회사에 다닌 경험이 있는 평범한 직장인 모두에게 꽤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내용이라 인기가 상당한 듯 하다. 나 또한 S사를 잠깐이나마 다닌 경험이 만화 내용에 일정 부분 공감하게 하기에 가장 인상적인 부분들을 정리하고 싶었다.

미생 57화

미생 57, 58, 59화 를 보면 사수 김동식 대리가 시킨 문장 줄이기 숙제를 힘들게 해 나가는 장그래의 얘기가 나온다. 이 전후로 나오는 보고서 및 PT 자료 작성 관련 내용과 함께 가장 공감이 많이 갔던 스토리인데, 실제로 S사에서 보고서 작성일을 주업무로 하면서 처음에 어색했던 부분이 바로 이 문장 줄이기였다.

나의 주업무는 수십 ~ 수백억 규모의 공장 설비투자에 대한 사업 타당성 검토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조 단위를 넘나드는 회사의 총 설비투자 규모에 비해서는 개별 건들은 작은 비중이기도 하고, 연간 계획이나 수정 계획 등의 시점에 사전 검토를 거쳐 컨센서스가 만들어 진 투자의 경우는 이 보고서가 1 ~ 2 페이지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해도 보고서 안의 모든 숫자에 대한 근거 자료는 수백, 수천 셀(Cell)의 엑셀 파일과 시장 동향 등 자료들로 빼곡히 준비해 놓는 것은 기본. 이렇다 보니 이 짧은 페이지의 보고서 안에는

  • 왜 (지금) 필요한가? - 보통 시장 현황, 사업 계획에 따른 수요 예측, 현재 생산 현황 및 문제점 등이 담긴다.
  • 왜 이 부품들을 이만큼 사는가? - 투자 설비 종류, 규모, 가격 타당성, 입고 및 생산 투입 일정 적합성 등이 담긴다.
  • 이렇게 사면 중단기로 돈 더 버나? - 결국 투자 대비 더 많은 돈을 단기, 중기, 장기 로 벌 수 있어야 한다.

의 완전한 흐름을 다 담아야 하고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사실들과 숫자들 또한 전부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심지어 보고서의 format이 정해져 있는 터라 결재칸, 제목, 소제목, 페이지 테두리 및 여백 등을 빼면 전체 길이는 더 줄어들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쉽게 저지르는 실수가 글자들의 폰트를 줄이고 페이지 여백이나 줄간격을 줄여서 최대한 많은 글자를 한 페이지 안에 우겨 넣는 것인데, 이는 보고서의 가장 큰 목적을 훼손하는 범죄와 같다. 보통 작성된 보고서는 임원들이 보게 되고 어느 회사나 임원들은 보통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1. 매우 바쁘다. 보고서 한 쪽 읽는데 수십 분을 쓸 만큼 시간이 많지 않다. 특히 상위 임원일 수록 그렇게 소비되는 시간의 가치는 엄청나다.
  2. 연령대가 높다. 작은 글씨를 읽기 힘들다.

이 두 특성에 모두 맞춘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자연스레 갖게 된다.

  1. 글자 수가 적다.
  2. 글씨 크기가 크고 줄간격이 넓다. 심지어 사장이나 부회장, 회장 레벨로 올라가는 보고서는 점점 글씨 크기가 커졌었다. 그러면서 bullet이나 table 등의 열과 오가 잘 맞아 떨어진다.

언제나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은 법.

보고서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읽는이의 의사결정을 돕거나 유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독자의 취향에 맞추는 것이 필요하고 이런 상황에서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담아내는 것이 보고서 작성하는 사람이 풀어야 하는 가장 큰 숙제이다.

미생 59화

보통의 발표자료와는 다르게 보고서는 작성한 사람이 읽는 사람 앞에서 구두로 부연 설명을 하거나 Q&A를 할 가능성이 낮다. 따라서 보고서 안에 들어있는 내용 만으로 모든 것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어찌 보면 발표자료를 만드는 것 보다 어려울 수도 있다.

이런 숙제를 풀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미생에서 나오는 문장 줄이기가 중요해 진다. 나는 보통 이를 위해

  1. bullet이나 table을 사용해서 부가적인 조사, 동사, 접속어 등의 사용을 줄이고
  2. →, ↑, ↓ 등의 직관적인 기호 사용으로 설명 문구를 없애고: 선후/인과관계, 수치의 상승, 하락 등의 표시에 유용하다.
  3. 업계나 사내에서 통용되는 약어를 사용하며
  4. 한자를 적재적소에 활용

하는 방법을 썼다. 물론, 사내 메뉴얼에 이렇게 나오는게 아니라 내가 부장님께 혹은 차장님께 혼나면서 배운 경험적인 것들이다. 특히나 4번의 한자 사용은 긴 한글이나 영어 표현을 극단적으로는 한두 글자까지 줄여주는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좀 있어 보이는 효과까지 있기 때문에 몇몇 높은 직급 분들의 보고서를 보면 한글 조사나 불가피한 영어 단어 빼고는 전부 한자인 경우도 있다 :-( 그리고 3번의 약어들 중에 업계에서는 안쓰지만 전통적으로 회사 내에서는 통용되는 표현들이 있는데 이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으니 다른 분들이 쓴 보고서를 많이 보는 수밖에 없겠고. 물론 회사 외부로 나가는 보고서라면 이런걸 쓰면 안되겠지만...

또한 영어든 한글이든 한자든 간에 동의어나 동의 표현을 많이 알아둔다면 적재 적소에 더 짧으나 뜻은 같은 표현을 쓸 수 있어서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문장 줄이기는 하나의 테크닉에 지나지 않는다. 완전히 풀어서든 이렇게 짧게 줄여서든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완전히 숙지하고 있지 않다면 어설프게 줄이다가는 아무도 못알아 먹는 문장이 나오기 쉽다.

내 주변에는 아마 이런 식으로 일을 해야 하는 분들이 매우 적을 거라 큰 도움은 안될 지도 모르지만, 기회가 된다면 문장 줄이기는 연습을 해 보시면 좋을듯 하다. 가장 쉽게 연습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력서 아닐까. 경력 10년 정도 되고 회사 서너 군데 정도 다닌 분들이라면 A4 한 페이지에 이력서 내용을 다 넣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아실 듯 하고, 덤으로 요즘 세상에서는 트위터에 한 글자라도 더 올리는 데라도 써먹을 수 있고. =)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 번 줄여놓은 문장 및 보고서는 덮어두었다가 시간이 좀 흐르고 머릿속이 다른 내용들로 채워진 후에 다시 처음부터 읽어보는 것이다. 완벽하게 줄이거나 수정했다고 생각되던 문장이나 표현들 상당수가 참 어색해 보이고 못마땅해 보일 것이 분명하다.

자, 그러면 이제 다시 문장들을 수정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