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개발자들은 온라인 청소년 성매매 해결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회고

씨닷
Unusual Suspects Festival Seoul
9 min readNov 22, 2018

왜 내게 이 만남이 중요했을까

10월 어느 날 테크페미 슬랙을 통해 여성엔지니어와 여성청소년의 만남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을 모집한다는 공지를 보게 되었다. 항상 바빠서 열심히 참여하기 어려울 것 같아 여러 모임이나 행사, 프로젝트들을 넘겨왔는데도 이번에는 왠지 그냥 넘기기가 어려웠다. 그건 ‘여성개발자’와 ‘여성청소년’이라는 말들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생애주기가 중요하지 않고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커리어를 새로 시작해 남들보다 늦었다는 모종의 불안감이 여전히 마음 속에 남아있었다. 그러면서 왜 좀 더 일찍 시작하지 못했을까? 왜 그동안 전혀 이 분야를 알지 못했을까? 같은 질문을 하게 되었다. 화가, 선생님, 외교관, 큐레이터, 디자이너, 기획자 등 세상의 온갖 다양한 일들을 하고 싶었던 의욕넘치는 청소년이었는데도 한번도 컴퓨터라든가 엔지니어링과 관련된 직업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도 모르게 그런 분야들을 한쪽으로 치워놨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여자는 남자보다 수학을 못해. 대신 언어에 뛰어나지.’ 같은 말을 듣고, 어느 새 문/이과를 결정할 시기가 와서 수학점수를 떠올리며(그리고 다시 앞의 말도 떠올려보고..) 생각해 볼 겨를 없이 나눈다거나, ‘공대 아름이(소수자이자 숭배-혐오의 대상)’ 같은 것들을 미디어에서 접하면서(‘으.. 저런 곳에 가긴 싫어..’)이지 않았을까? 다행히 어릴 때도 ‘여자는 결혼해도 일할 수 있는 직업을 가져야지.’ 같은 말은 딱히 귓등으로도 안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여성엔지니어[1]를 직접 보거나 접해본 경험이 매우 부족했다는 것이다. 내가 실질적으로 여성엔지니어로서의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던 건 ‘코드: 디버깅 더 젠더 갭’을 보고 나서부터였다. 그게 고작 3년이 채 안된다. 그러면서 나는 어렸을 때 여성엔지니어들을 조금 더 자주 접하고 실제로 만날 수도 있었다면 좀 더 빨리 이 분야에서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코드: 디버깅 더 젠더 갭’ 포스터

그래서 ‘여성엔지니어’와 ‘여성청소년’, 그리고 ‘만남’이라는 키워드를 듣자마자 아무리 바빠도 한번쯤 가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여성엔지니어들이 스스로 정말 중요한 분들임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10월 17일 저녁, 퇴근 후 당산에 있는 십대여성인권센터로 가서 센터장님과 센터에서 일하시는 분들, 그리고 항상 메신저나 온라인으로만 이야기 나눴던 갱님을 처음 뵙게 되었다. 회의에서는 이 만남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는데, 특히 온라인 채팅 사이트 -> 채팅어플 -> 스트리밍 서비스 어플로 어떻게 온라인 성매매 플랫폼/방법이 변화해 왔는 지가 기억에 남는다.

남성엔지니어들을 만나서 이런 어플에서 일어나는 범죄를 예방하거나 조치를 취하기 위해 기술적 자문을 구해보아도 성매매하는 여성청소년들의 자유 의지가 아니냐며 제대로 듣지 않는 경우들이 많다고 하셨다. 센터장님은 오랜 기간 그러한 경험들을 통해 기술이 무성적이고 중립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다른 것보다 여성엔지니어들을 꼭 만나보고 싶었다고 하셨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거나 생산하는 기술을 경유하여 일어나는 여성청소년 대상의 범죄들을 들으면 정말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운데, 그걸 오랫동안 직접 해결하고 모니터링 해오며 가장 마음이 급할 센터에서는 그래서 당장 뭘 만들자!는 자리를 만들려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대신 “여성엔지니어들이 스스로 정말 중요한 분들임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온라인과 앱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아만 줬으면 했다. 큰 걸 바라는 건 아니다. 그냥 함께 모여만 달라.”는 이야기를 아주 여러 번 하셨다. 언제나 스스로 늦었고 부족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와중에 그 말이 마음에 크게 남았다.

‘맨 처음 여성엔지니어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한 건 그들이 멋지고 중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지’, ‘웹개발을 잘 알아서 나도 나중에 뭔가 도움이 되는 것들을 만들고 싶었지’ 같은 생각들이 스쳤고 다른 여성 개발자들도 얼른 만나고 싶어졌다. 만나고나면 다음에 되고 싶은 것들, 하고 싶은 것들이 생각날 것 같았다.

드디어 만남!

이렇게 나눈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갱님과 함께 여성엔지니어들이 모이는 자리를 꾸리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디자인씽킹 방법론으로 특정 문제를 예시로 삼아 각 프로세스에 맞는 솔루션을 내보는 과정을 생각했으나, 워낙에 쉽게 풀기만은 어려운 문제일테니 센터에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문제 해결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일단 여성엔지니어 몇명이 함께 모이는 자리를 만드는 데에 의의를 두기로 의견을 모았다.

처음에는 ‘5명만 모여도 성공!’이라고 서로 웃으며 이야기 했는데, 몇몇 커뮤니티에만 홍보했는데도 생각보다 정말 많은 분들이 관심을 보이셨고 참여해 주셔서 내심 놀랐다. 나와 같은 관심사를 가진 여성엔지니어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든든하고 기대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예기치 않은 집단 간의 만남을 위한 언유주얼서스펙트서울2018의 한 꼭지로, 지난 11월 2일 금요일 스포카spoqa[2] 신사옥에서 십대여성인권센터와 여성엔지니어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가 열렸다.

개발직군에서 당장 일하고 계신 분들 뿐만 아니라 학부에 재학 중인 분들, 대학원에서 연구하시는 분들, 다른 직군에서 커리어를 변경하시려는 분, 커리어를 변경한 분들 등등.. 정말 다양한 분들이 자리에 와주셨다.

십대여성인권센터의 발표와 함께 온라인 여성청소년 성매매에 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두 팀으로 나뉘어 워크숍을 진행했다. ‘여성엔지니어와 IT 분야/기술’이라는 좀 더 포괄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팀, 온라인 여성청소년 성매매 이슈를 좀 더 깊게 이해하고 ‘여성엔지니어와 여성청소년이 어떻게 서로 연결될 수 있을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팀으로 나뉘었고, 나는 전자를 퍼실리테이팅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서로 어떤 경로로 엔지니어링 직군에 오게 되었는지를 공유했다. ‘컴퓨터공학과를 전공하고 병특을 마친 뒤 취직해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전형적인 경로(내가 너무 비약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가 아닌 분들이 정말 많았다.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스스로 배워서 커리어를 바꾸신 분부터 특수교육 분야에서 일을 하면서 아이들이 유튜브에 정말 많은 관심을 가진다는 걸 알게되어 IT 기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경우,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인턴 생활을 하며 트위터가 어떻게 미국 대선에 영향을 미치는 지 보면서 저런 걸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셨다는 분의 이야기 등 여러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IT 분야로 진입하는 경로 속에서 혹은 진입 후 학교나 직장에서 경험했던 성차별이나 개선되어야 할 점들을 이야기 했다. 성평등한 IT 분야나 서비스를 위해서 무언가 할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을 해야할까?와 같은 질문들도 함께 나누어봤다. 실은 나의 궁금증이었던 부분이었는데 역시 쉬운 결론이 나지는 않았다. 기자들처럼 제품을 만들었을 때 해당 제품에 성차별적인 요소가 있는지 체크리스트를 만든다거나, 규제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예기치 않은 만남을 통해 얻은 것

저런 질문들을 던지고, 이야기 하는 과정에서 실은 어떤 명확한 답이 나오는 것보다도 더 좋았던 건 어떤 고립감이나 불안감이 조금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감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다양한 경로를 통해, 다양한 분야에서 각자 시작하여 우연히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게 신기했다. 항상 느껴 온 어떤 고립감이 크게 줄어든 기분이 들었다. 남초 직군에 있으면서 종종 느끼게 되는 고립감이나 혼자서만 ‘내가 예민한가?’라고 되묻게 되는 문제들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부터 같은 분야에 있거나, 있게 될 것이거나, 그렇지 않대도 엔지니어링과 여성문제를 함께 이야기 할 수 있는 30명의 여성들이 함께 모여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뭔가 누리고 있다는 기분이었다.

특정한 아젠다를 가지고 만나, 함께 문제를 공유하고 인식하며 활동하는 커뮤니티를 만드는 작업은 언제나 놀라운 일인 것 같다. 혼자 고민하던 문제가 그렇지 않은 문제가 되는 경험은 언제나 삶을 조금은 덜 불안하게, 안심할 수 있게 한다. 그동안 ‘문화인류학’이라는 완전히 다른 곳에서 온, 여자 개발자, 라는 것부터 ‘여성 이슈를 가지고 기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이야기 할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고 느껴왔다. 그런데 별안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둘러앉아 후속 모임을 이야기 하고 있는 자리는 정말 놀라웠고, 어떤 안심하는 마음을 들게 했다.

내가 처음으로 본 여성 엔지니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갖추고 있으며,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그렇기 때문에 당당하게 불의에 맞서고 문제를 제기할 용기를 내고 있었다. 개인적인 경험을 자기 안에서 끝내는 게 아니라, 다음 세대에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가는 사람들이었다.그래서 나도 저런 사람들이 되고 싶고 또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지난 여름에 저런 글을 쓴 적이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되고 싶었던 그 ‘여성엔지니어들’의 모습을, 다큐멘터리 속에서가 아닌 내 또래의 다른 멋진 여성엔지니어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내게 큰 의미로 남았다.

  • [1] 본문에서는 개발자 Developer라는 말 대신 엔지니어 Engineer로 통합해서 썼습니다. 보통 엔지니어링 직군만을 개발자로 통칭하여 부르나 제품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에 참여하는 기획자, 디자이너를 비롯한 다른 직군 역시 제품 개발에 기여하는 개발자이기 때문에 좀 더 명확하게 특정하기 위함입니다.
  • [2] 장소 지원은 테크페미를 통해 스포카spoqa의 신사옥 사내카페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이사 후 첫번째 외부공간지원이라 정신없으셨을텐데도 많은 도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본 글은 “여성개발자들은 온라인 청소년 성매매 해결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세션에 콜라보레이터로 참여하신 주연님이 작성해주셨습니다

*원문은 https://jennybeblog.github.io/2018-11-19/women-engineers-event/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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