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글쓰기 워크숍: 젠더혐오에 맞선 우리의 글쓰기 written by 서한영교

씨닷
Unusual Suspects Festival Seoul
5 min readDec 10, 2019

*글 속 사진들은 씨닷이 글의 몰입도를 위해 ‘저작권이 없는 사진’을 포스팅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어려운 길을 가기 위한 기술

여기는 티베트의 차마고도. 해발 3500m 높이에서 공사 중인 구름다리. 하얀 눈과 초록빛 풀들이 반쯤 뒤 섞인 이 곳에 말과 사람이 가파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들이 살짝 내려다본 길의 한 치 옆은 길고 긴 낭떠러지. 말과 사람이 한 걸음에 한 번씩 눈빛을 마주치며 슬금슬금. 마침내 구름다리 공사 현장으로 들어선 농공은 가장 먼저 말이 지고 있는 짐을 서둘러 푸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온 품으로 말의 등짝을 쓰다듬습니다. 작은 망치로 돌을 깨고, 준비해온 나무목판을 가지런히 자르는 동안 말은 농공의 움직임을 따라 부지런히 눈빛을 옮깁니다. 낭떠러지에 매달려 공사를 하고 있는 농공이 손짓 하면 말은 다가와 자신이 매고 있는 공구가방을 내밀기 위해 절벽, 가장 가까이로 붙어섭니다. 이 어려운 구름다리 공사를 위해 꼭 필요한 기술은 무엇일까요? 농공의 망치질 솜씨와 톱질 솜씨일까요? 허공을 휘젓고 다니는 암벽타기 솜씨일까요?

눈빛을 주고 받는 기술

이 어려운 공사를 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기술은 눈빛을 주고받는 기술, 즉 서로를 돌보는 기술이지 않을까요. 한 순간의 실수로도 끝장 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눈빛을 주고받으며 말과 사람 사이에 “느낌의 공동체”(신형철)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기술. 알 수 없는 언어를 가진 짐승과 작게 주고받는 미묘한 감각을 연결시킬 수 있는 기술.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의 박동과 발끝의 감각을 전달할 수 있는 기술. 이 감각의 기술이 없다면 구름다리 공사현장까지 올라 갈 수도 없었겠지요. 농공과 말 사이에 일어난 희미하지만 분명히 실감할 수 있는 느낌의 대화가 어떻게 존재론적 사건이 되는지, 그것이 어떻게 “느낌의 공동체”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급진적 탈근대의 기술로서의 돌봄

이러한 감각의 기술은 가부장적 근대문명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어본 적 없는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기술입니다. 대상을 합리적으로 관리하고, 효율적인 운용을 위한 근대적 기술이 만들어놓은 풍경 속에서 떨림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각자도생의 세계에서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감각을 나누는 품의 떨림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지요. 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감각의 기술은 여성/성의 영역에서 살아 남아있습니다. 아픈 아이를 돌보는 품의 기술. 일상의 작고 사소한 일들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손끝의 기술. 세계의 질감을 다루는 기술은 생활과 살림 속에 있습니다. 또 ‘여성’의 지대underground로 배정받은 그림자 노동을 수행하며 하찮은 것, 중요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일들을 해내며 작고, 시시한 것들을 돌보는 감각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이 감각의 심연abgrund 속에서 ‘돌보는 기술’이야 말로 남성-자본-기술-근대로 이어지는 견고한 세계를 헤쳐 나갈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탈근대의 기술일 것입니다.

세계를 돌보는 기술로서의 글쓰기

니체는 “언어의 감옥에서 사유하기를 거부하려면 사고를 멈춰야 한다.”고 말합니다. 관습적인 “언어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거느리고 있는 감각을 회복해 나가는 일입니다. 일단, 사고를 멈추고 자신의 신체 안에 일렁이는 느낌의 질서를 활성화 하는 일입니다.

언어가 세계의 그림이라고 이야기했던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경계는 내 세계의 경계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기존에 관습적으로 써오던 언어의 용법을 바꾸면 “내 언어의 경계”가 달라지고 “내 세계의 경계”도 달라집니다.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언어를 돌보는 일은 자기를 돌보는 일이며, 세계를 돌보는 일이기도 할테지요. 다르게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자세(태도)에서 비롯됩니다. 탁구 폼을 갖출 때 까지 수도 없이 라켓연습을 하듯 말하는 것도 계속해서 연습해야하죠. 언어라는 것은 말하는 사람의 자세(폼)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자, 그럼 오늘도 연습 시작!

서한영교: 주로, 읽고 쓴다. 읽은 걸 말하고, 말한 걸 쓴다. 가끔, 글 써서 먹고 살고 싶은데 먹기만 한다. 가끔, 먹어서 뭐하나 싶을 때 정신없이 쓴다. 주로, 같이 먹고 같이 살고 싶어서 가끔, 함께 모여서 읽고 쓴다. 지구와 어울려 사는 ‘시민’으로서의 품위를 생각한다. 세계의 글썽거림을 받아쓰는 ‘시인’으로서의 품위를 생각한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올해에 <두 번째 페미니스트>를 출간했고, 이 책으로 2019올해의 양성평등문화상(개인부문)을 수상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