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또 왜 정치 스타트업을 하는가

김정현 Joseph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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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min readMay 1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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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천영환 님의 글 ‘나는 왜 정치 스타트업을 하는가’에 이어 쓰는 글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조직 가운데 하필 스타트업인지, 또 왜 ‘정치' 스타트업인지 제가 겪은 일들을 중심으로 의미를 되짚어봤습니다.

나는 꽤 어렸을 때부터 프로가 되고 싶은 아마추어 글쟁이였다.
그러나 나는 정치 스타트업을 한다. 심지어 내가 선택한 일이다.

도대체, 왜, 어쩌다가?

작년 여름, 7월 즈음이다. 취업과 진학 준비를 하는둥마는둥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지금은 와글 대표로 우리를 이끌고 있는 진순님한테서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그 연락이 말도 안 되는 우연은 아니었다. 나는 2012년 총선에서 청년당이라는 정당을 만들고 선거운동을 한 경험이 있고, 그 전후로 많은 글을 여러 매체에 기고해 왔다. 세상에 없는 일을 하기 위해 준비중이던 대표님은 젊고 가능성 있는 (실은 또라이 기질이 농후한) 사람들을 찾고 있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함께 일을 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기에 놀랐고, 격주간으로 기고해온 대표님의 인터뷰 글을 통해서 흠모해왔기 더 놀랐다. 더 놀라운 건 내가 흔쾌히 좋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렇게 와글의 공동창업자(Co-founder)가 되었다.

공동창업자라, 이름만 거창했다. 나는 신입사원이었다. 업무용 이메일 쓰는 방법도 몰랐고(쉬워보이는데 꽤 복잡하다), 벤처투자나 스타트업 영역의 생소한 용어들을 들을 때에는 정말 외국에 온 것 같았다. 뭣보다도 처음 카우앤독에 자리를 얻고 앉아 있을 때 누군가 먼저 말을 걸어주길 바라며 낯선 서류들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에는 죽을 것 같았다.

뭐든지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다른 선택지가 많을 때, 그 처음을 버티기는 더 어렵다. 나는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취업 준비나 대학원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아니면 소박한 글재주로 굶지 않을 정도로 일하며 살 수도 있었다.

실제로 나는 출근하는 것도 아니고 출근하지 않는 것도 아닌 그 시간 사이에 마음 속으로는 몇 번이고 ‘이 뭔지도 모를 것, 그만두고 만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뭔지 모르기 때문에 쉽게 그만둘 수가 없었다. 나는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용케 회사는 만들어졌다. ‘와글'이라는 이름도 가지게 되었으며, 사람들도 모여들었다. 방향이 잡혀 갔고, 할만 하겠다는 생각이 샘솟았다. 이 모든 과정은 대표님이 쏟아부은 노력의 결실이었기에, 나는 운이 좋게 차를 얻어탄 —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 히치하이커 같았다.

나의 신입 시절은 계속된다

와글은 지난 해 8월 설립 직후 크게 두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첫 번째는 다음 스토리펀딩 플랫폼을 통해 ‘듣도 보도 못한 정치’라는 제목으로 해외 풀뿌리 정치혁신사례를 국내에 소개하는 일이었다.

한 회 마감이 끝나고 이튿날이 되면 이렇게 환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지만 다시 마감이 다가오면…

이 ‘듣보정’ 프로젝트는 4개월 동안 15–20개에 달하는 해외 풀뿌리 정치혁신 사례를 조사하면서 동시에 10개 꼭지로 연재를 하는 미친 기획이었다. (현재는 이 내용을 바탕으로 책을 준비중이다) 대표님을 포함해서 와글 팀원 6명이 필진이자 리서처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한주한주 힘든 마감을 넘겨가며 6회째, 드디어 내가 글을 쓸 차례가 되었다. 그때 쓸 내용은 온라인 플랫폼에 관한 것이었는데, 나는 조사해둔 게 있으니 별로 어려울 것 없다는 생각으로 단박에 글을 썼다.

이틀 뒤 미팅에서 나는 대표님에게 몇 가지 피드백을 받았고, 그 내용을 반영해서 다시 글을 썼다. 그리고 그 이틀 뒤 미팅에서 조금만 더 손보면 되겠다고 요청받은 내용을 보강해서 다시 글을 썼다. 그리고 그 다음 번 세 번째 미팅에서 나는 내가 내용을 이해하고 있지 못할 뿐더러 이대로는 원고를 써 내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때 나는 “전 못 써요”라고 외쳤고 마침 한가위 연휴가 끼었으니 한 주 연재를 쉬자고 결정했다.

(이 전후로 똑같은 과정을 모든 팀원들이 한 번씩 겪었다. 다행히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 덕분에 펑크는 이후 딱 한 번만 더 있었다)

이해한 내용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에는 일정한 시간이 걸린다.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실제로 뇌가 작동하는 방식도 그렇다고 배웠을 뿐 아니라 남들에게도 그런 말을 하고 다녔으면서, 나는 너무 조급하게 굴었다. 내가 일을 배우는 과정은 계속 그런 식이었다.

지난해 두 번째 프로젝트인 국제 행사 ‘캠프 바이 더 크라우드(Camp By the Crowd)’에 관련된 사건. 이 행사는 ‘듣보정’을 진행하면서 알게 된 해외 인사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국내 시민사회 영역의 인사들과 터놓고 이야기를 하는 자리였다.

캠프 마지막 날 저녁. 사진 속 나는 “하하 그래 영어는 못해도 노래는 할 수 있지” 뭐 대충 이런 표정이다

나는 이 행사의 매니저였다. 해외 참가자들의 항공권을 예매하는 일도 내 몫이었다. 그런데 한 해외 인사의 입국 하루 전날 항공권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다음 날 아침까지 기다렸다간 항공권은 휴지가 되고 참가자는 비행기에 오르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 있는 상황에서, 여행사 담당자는 지금은 변경이 안 되니 아침까지 기다려 달라는 말만 남기고 퇴근. 나는 멘붕.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결국 항공사 홈페이지에 직접 들어가서 내 돈으로 항공권을 하나 더 산 다음 그 사람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뒤늦게 변경한 기존 티켓은 중복 발권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됐는데, 환불은 못 받았다. 나는 그 뒤로 문제를 일으킨 그 국내 여행사는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성장, 스타트업의 시작과 끝

이제 본론이다. 좌충우돌하면서도 정치스타트업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타트업의 핵심 개념인 성장을 통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스타트업이란 뭘까?

여러가지 기준들이 많지만, 다들 입장이 달라서 똑떨어지게 ‘스타트업이란 이런 것!’ 하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폭발적 성장가능성’은 바로 스타트업 조직을 설명하는 특성 가운데 가장 주목하는 것이다.

스타트업은 빠른 성장을 위해 고안된 회사다. 새로 만든 회사라고 다 스타트업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술에 관련된 일을 하거나, 벤처 투자를 받았거나, ‘엑시트(Exit;매각, 합병 등을 통한 스타트업의 본격 기업화 단계) 전략' 같은 걸 갖고 있다고 스타트업이 되는 것도 아니다. 단 하나의 필수적인 요소는 성장이다. 스타트업에 갖다 붙이는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성장’에서 온다.

폴 그레이엄Paul Graham, “스타트업=성장

이 성장가능성에 주목하면서, 정치스타트업 와글을 살펴 보자. 와글의 비전을 나타내는 모토는 “와글와글한 군중의 힘으로 만드는 더 나은 민주주의”다. ‘와글와글’은 알겠는데 ‘군중’은 뭔가? 왜 ‘정치’가 아닌 ‘민주주의’인가? 두 가지는 또 어떻게 다른가?

‘와글와글한 군중’은 정치적 에너지를 갖고 있는 보통의 시민들을 말한다. 흔히 정치와 관련해서 쓰이는 ‘유권자’를 넘어서는, 우리가 발딛고 선 정치공동체의 주인인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 사람들의 ‘말’이 지금의 정치를 바꾸는 강력한 힘이다.

와글은 이러한 힘으로 정치를 넘어서, 민주주의 자체를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려고 한다. 선거할 때 하루만 주인이 되는 게 아니라, 일상적으로 국가와 공동체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결정할 수 있는 진짜 민주주의가 구현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방법을 찾고 실천하는 것이 와글의 미션이다.

성장가능성이야말로 스타트업의 핵심 요소라면, 스타트업이 그리는 비전의 크기는 그 성장을 가늠케할 바로미터라고 볼 수 있다.

그 점에서 와글의 비전은 정치적으로 가장 원대한 곳에 닿아 있다. 모든 사람들이 공동체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진짜 민주주의의 구현이라는 맹랑한, 그러나 모든 위대한 사상가와 정치가들의 목표를 사명으로 한다. 스타트업이기 때문에, 스타트업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목표를 와글은 꿈꾼다.

솔직히 좀 멋지지 않은가?

그리고 조직 안에서의 ‘나’에 관하여

한편으로, ‘잠재적인 폭발적 성장가능성’ 조직 자체가 아닌 조직 구성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또한 스타트업의 매력이다. 삶을 되돌아보는 일을 즐기는 내가 스타트업이라는 매력적인 조직으로부터 기대하는 것은, 백만장자가 되거나 빚더미에 앉거나 하는 식의 극단적 경제적 성패가 아니다.

회의 중 풍경. 가끔은 일을 하는 건지 노는 건지 구분이 안 될 때도 있다.

코파운더이면서 신입사원으로 황당한 실수를 일으키기도 하고, 프로젝트의 기획자이면서 보조 리서처가 되기도 하고, 남의 일에 오지랖을 떨다가도 내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도권이 넘어가는 것을 목격하기도 하면서, 스스로 느끼기에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어제와는 다른 내가 되어가는 경험, 그것이야말로 스타트업에서 한 사람으로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성취다.

무엇보다도 스타트업에서는(혹은 와글에서는) 그러한 성장을 동료들과 함께 도모할 수 있다. 내가 특별히 언급하지 않은 한 가지 중요하고도 변치 않는 전제는 이 모든 일들을 나 혼자가 아니라 언제나 함께 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균형을 잃지 말기를

스타트업과 관련된 온갖 이야기들을 잘 살펴보면, 스타트업이라는 영역은 변형된 ‘시크릿’ 식의 자기계발이 횡행하는 곳이거나 일 중독으로 이끄는(심지어 돈도 못 버는) 또 다른 천국행 티켓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할 수 있는만큼 일하고 삶의 균형을 찾겠다며 이른 퇴근을 하는 날도 있고, 어떤 때엔 피로에 지쳐 두 눈이 벌개지도록 일하고 난 뒤에 ‘이건 내가 원했던 게 아냐’라고 중얼거리면서도 연일 야근에 매달린다. 무한한 자율과 무한한 책임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기란 어렵다. 대개 이 사이 어디쯤 경계에서 일을 하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스스로 성장해나가는 경험을 놓치지 않는 것이 내겐 무엇보다 소중하다. 이 과정 속에는 일과 삶의 균형, 외적 성공과 자아의 발견 사이에서의 끊임없는 선택이 항상 포함된다.

그 균형을 맞추어나가는 가운데 와글에서 나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인생 그 어느 때보다도 말이다.

2016. 4. 와글 멤버들.

이 글을 쓴 저는 정치 스타트업 와글의 공동창립자이자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말과 글로나마 사람들과 소통하고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구상과 고민, 실천으로 소중한 삶을 채워나가고 있습니다. 페이스북 계정은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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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 Joseph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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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a writer and also a social innovator based in Seoul. I do believe in the power of moderate and incessant change for good in our daily li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