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잡이별 x 이우학교] 안내자 제제의 기록: 동지를 만드는 일

길잡이별을 찾는 여행
Wayfinder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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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min readMay 26, 2021

Written by 제제

동지라는 말을 좋아한다. 팥죽 먹는 24절기 중 하나인 동지 말고 동지. 도옹지- 발음할 때 입이 동그랗게 되는 것마저 귀여운 동지. 동지는 같을 동(同)에 뜻 지(志) 자를 사용한다. 뜻이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나에게는 동지들이 있다. 위기의 순간이나 환호의 순간이나 작당을 모의하는 순간마다 그들이 함께했다. 북치고 노래하고 춤추며 평화를 이야기하는 ‘레츠피스’ 동지들, 여행지에서 새벽까지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준비하던 ‘로드스꼴라’ 동지들, 책 읽고 공부하는 시간만큼 같이 밥 차려 먹고 치우는 것에 공을 들였던 ‘책 읽는 대학’ 동지들….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을 때 좋은 동지를 많이 만들라던 스승의 말을 120% 동의한다.

그중에 눈만 맞아도 당이 필요하구나 판단하고 비타민을 까주는 ‘길잡이별을 찾는 여행 동지들’이 있다. 이들은 길잡이별을 찾는 여행(프로젝트명)을 하는 길잡이별을 찾는 여행(팀명)이다. 오픈마스터즈(www.openmasters.org) 도구를 사용하여 자체 기획한 워크숍을 열거나 의뢰받은 학교에 가서 워크숍을 진행한다. 사업자등록을 하지도 않았고 사무실도 없으며 정기적인 회의 날짜도 없다. 말 그대로 일이 있으면 모였다가 끝나면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프로젝트 그룹이다.

길잡이별을 찾는 여행(이하 길잡이별)은 지난 3월, 프로젝트를 의뢰받았다. 주최는 경기도 성남에 있는 도시형 대안학교 이우학교였다. 고등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3주간 “새로운 배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3주 차에 길잡이별 워크숍을 해보자고 했다. 길잡이별은 3월 초에 이미 춘천 전인고등학교에서 워크숍이 잡혀 있었다. 동지들은 고민에 빠졌다. 다들 생업이 있어서 연차나 다른 사람과 근무 일정을 조정하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길잡이별은 3일짜리 워크숍을 맡으면 한 달 전부터 2–3일에 한 번씩 만나며 집중 기획기간을 가지고, 워크숍 자체 3일을 포함하여 앞 뒤로 3일, 총 6일 동안 함께 지내며 점검 회의와 평가 회의를 한다. 이 빡센 일정을 한 달에 두 개씩이나 소화 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나는 반드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한다고 동지들을 설득했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고, 잘하면 다른 대안학교에 소문이 퍼져 더 많은 의뢰가 올 것이라고, 내가 알바를 대신해 주겠다고. 동지들은 고맙게도 내 설득에 넘어가 주었고, 우리는 결국 3월 셋째 주에 이우학교로 향했다.

이우학교는 많은 대안학교처럼 언덕 위에 있었다(대안학교들은 언덕 위에 있는 부지를 참 잘 고른다). 뒤에는 산이 있고 앞으로는 고가도로가 보였다. 프로그램을 진행할 강당은 지하에 있었다. 어둡고 서늘했다. 동지들은 챙겨온 형형색색의 천을 벽에 걸고 곳곳에 초를 켜고 향을 피웠다. 참가자들이 둘러앉게 될 공간 중앙에 나뭇가지와 솔방울, 싱잉볼로 센터피스를 장식했다. 공간을 ‘길잡이별화’한 것이다. 참가자들을 맞이할 준비를 끝내자 동지들은 가운데 앉아 손을 모았다. 서로의 에너지를 교환했다. 안내자로 거듭나는 과정이었다. 몸에 온기가 돌았다.

강당 가득 사람들이 들어왔다. 둘러앉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씩 살펴보았다. 의자에 앉은 뒷줄부터 바닥에 앉은 앞줄까지 전체 얼굴과 마주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참가자 80명, 안내자 6명, 총 86명이 같은 공간에 있다. 이렇게 많은 참가자 앞에서 진행하는 건 처음이었다. 잘 할 수 있을까, 과연 나의 말이 그들에게 들릴까, 걱정되는 마음이 들었다.

길잡이별은 써클(둥근 원)로 앉는 것을 좋아한다.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고 무대에서 진행하는 사람과 뒤에 앉아 듣는 사람의 구분이 없어, 누구나 말을 하고 누구나 듣는 사람이 된다. 길잡이별 워크숍에서는 참가자와 안내자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학생과 교사, 관중과 진행자가 되면 말의 비중이 한쪽으로 치우치고 다른 한쪽은 수동적인 자세가 된다. 길잡이별에서는 모두가 참여자고 방법을 알려주는 안내자가 있다. 하고 싶은 말은 언제든지 할 수 있고 모든 구성원이 이해될 때까지 의견을 묻고 논의하는 과정을 갖는다.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안전한 공간 만드는 연습을 한다. 마지막 날 한 참가자는 말했다.

“중학교 때 써클로 앉아서 하는 활동이 많았어요. 고등학교에 와서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걱정했는데 이번에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동그랗게 앉는 써클이 그리웠어요.”

길잡이별은 아침을 노래로 연다. 콩고 사람들이 바나나를 생각하며 만든 ‘바나하’, 뉴질랜드에서 아름다운 어머니를 생각하며 만든 ‘벨레마마’, 같이 산다는 건 무엇인지 알려주는 솔가와 이란의 ‘같이 산다는 건’, 사랑하는 동무에게 부르는 ‘우리들의 날은 아름다워’ 등. 첫날에는 안내자 목소리가 제일 크다. 참가자들은 몸을 배배 꼬고 짝다리를 짚고 팔짱을 끼고 ‘어디 한 번 불러봐라, 내가 따라부르나’라는 몸짓으로 안내자를 쳐다본다. 안내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아침마다 노래를 부른다. 신기하게도 셋째 날이 되면 다들 가사를 외우고 노래를 부른다.

나를 새롭게 보는 것, 워크숍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일이다. 새로움을 받아들이려면 마음이 열려있어야 한다.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어서 몸이 굳어있으면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매일 아침마다 세계 각국의 노래로 몸을 푸는 이유다. 복도에서 길잡이별에서 배운 노래를 흥얼거리는 참가자를 볼 때마다 기분이 참 좋다.

“처음엔 노래를 부르고 안내자의 행동을 따라 하는 게 수치스럽고 집에 가고 싶었어요. 근데 계속하다 보니 재밌더라고요. 내일은 뭘 할까 궁금하기도 했어요”

워크숍은 질문의 연속이었다. 이 질문 하고 저 질문 하고 잠깐 쉬었다가 저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나에게 아홉 가지 목숨이 생겼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9개의 삶), 나의 인생을 강으로 표현한다면? (인생의 강), 나에게 성공이란 뭐지? (성공재정의), 지금 나의 삶은 어떤 지혜와 감정과 사람과 기술로 연결되어 있나? (길잡이별 만달라), 남들에게는 말 못 했지만 요즘 나를 사로잡는 질문은 뭘까? (여정 질문 찾기), 나의 길잡이별은 무엇이지? (길잡이별 찾기) 참가자들은 심해를 탐험하듯 천천히 자신을 돌아봤다. 그래, 내가 그것도 좋아했지, 그럴 땐 눈물이 나더라, 그땐 진짜 행복했어. 얕은 물의 파도 소리부터 깊은 물의 고요함까지 귀 기울여 들었다.

그 중에서도 참가자들이 가장 어려워했던 건 ‘길잡이별 찾기’였다. 길잡이별이란 북극성처럼 길을 잃었을 때 방향을 알려주는 별이다. 언제든 내가 가야 할 방향을 비춰주는 별. 그것은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일 수도 있고, 바라는 세상일 수도 있다. 성공을 위한 목표 혹은 장래희망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쯤 설명해도 여전히 많은 참가자들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러면 안내자들이 각자의 길잡이별을 소개할 차례다.

나는 고등학생 때 여행학교에 다녔다. 길 위에서 배우고 놀고 연대하는 비인가 대안학교였다. 여행을 하다 보면 불시에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다. 유적지를 방문하려고 했으나 폭우가 쏟아진다거나 기차가 지연돼서 이동할 수 없다거나 거리에서 만난 친구가 자신의 집으로 초대를 한다거나. 그럴 때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변화된 환경에 대해 화를 내 거나, 변화를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계획을 수정하는 것. 여행은 30%의 계획과 70%의 즉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스승은 말했다. 주어진 환경에 따라 몸을 바꿔 가는 게 여행자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여행지에서만 벌어지는 건 아니었다. 삶에서도 무수한 날들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여행자의 마음자리를 가슴에 품었다. 20살 성년식 때 성년의 다짐으로 ‘몸과 마음이 말랑말랑한 사람이 되겠다’고 말했다. 여행자처럼 유연하게 삶을 살아내고 싶었다.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둘 다 수련하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화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도 물렁물렁하게 넘어가는 나를 보았다. 아, 삶에서 때로는 단단함이 있어야 하는구나 싶었다. 그 뒤로부터 나의 길잡이별은 몸과 마음이 말랑말랑하고 단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참가자 모두 강당에 둥글게 섰다. 옆 사람과 어깨가 스칠 정도로 가까웠다. 길잡이별을 선언하는 시간이었다.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며 흥을 올렸다. 자신의 차례가 되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누군가는 큰소리로 외쳤고 누군가는 읊조리듯이 말했다. 떨리는 목소리 사이로 단단함이 느껴졌다. 주변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할 수 있다”, “잘할 거야”, “멋있다”라고 소리쳤다. 조용히 눈을 바라봐주는 참가자도 있었다. 각자의 방식대로 응원의 에너지를 보냈다. 태풍처럼 소용돌이 치는 삶을 사는 참가자는 태풍의 눈을 찾아 고요함을 되찾는 게 길잡이별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기준대로 살다보니 매번 실망감을 느꼈던 참가자는 남 시선보다는 진정으로 내가 즐기는 삶이 길잡이별이었다. 직관적인 끌림에 의한 도전, 말을 잘하는 법을 찾는 것, 자기중심이 선 단단한 사람 되기, 나를 찾고 받아들이는 것…. 여든여섯 가지의 반짝이는 길잡이별이 강당을 가득 채웠다. 등줄기에 땀이 주룩 났다. 숨이 찼다.

“길잡이별이라는 말이 되게 좋았어요. 길을 잃었을 때 그 길을 찾아갈 수 있는 별을 나 혼자 만들고 모두와 나누는 게 되게 따뜻하게 느껴졌어요.”

“80개의 다른 세계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3일 동안 나를 찾았는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를 찾는 방법은 배운 것 같아요.”

지금쯤 길잡이별을 까먹었을지도 모른다. 힘차게 선언했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도 있다. 뜨거움은 금방 식는다. 하지만 길잡이별이 사라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힘을 써야 할 때 나도 모르게 아랫배에 힘을 꽉 준다. 살면서 모은 힘의 원천이 아랫배에 차곡차곡 쌓여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길잡이별은 거기에 있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지만 힘이 필요할 때, 중요한 선택을 할 때 단전 깊숙한 곳에서 에너지를 줄 것이다. 강당의 공기를 뜨겁게 만들었던 그 힘은 배꼽 아래 남아 있다.

워크숍이 끝나고 집에 와서 뻗었다. 5일 동안 집에만 있었다. 사람들과 대화할 힘이 없었다. 다른 안내자들은 자도 자도 계속 졸린다고 했다. 공식적인 첫 번째 일정은 앞마당 상자 텃밭에 씨 뿌리는 것이었다. 더 쉬고 싶었지만 자연에는 시기라는 게 있었다. 상추와 깻잎, 바질 씨를 뿌리고 흙을 덮었다. 물도 듬뿍 줬다. 조그만 씨앗에서 새싹이 움터서 상추가 된다는 게 참으로 이상했다. 물론 햇빛과 바람과 물과 공기와 흙과 미생물들이 함께 하는 것이지만, 매번 놀라웠다. 이우학교 참가자들도 마음속에 한 가지 씨앗을 품고 갔다면 좋겠다. 각자 씨앗을 틔워서 만나면 울창한 숲이 되겠지. 그때는 참가자와 안내자 말고 동지로 만나자.

*2021년 3월 15일 — 17일 이우학교에서 진행된 <길잡이별을 찾는 여행 : Way Finder 워크숍> 스케치 영상

https://youtu.be/4dgmffdcWX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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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잡이별을 찾는 여행은 세계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 청년들을 위한 진로 탐색 프로그램입니다. 난쟁이와 요정들이 살고있는 스웨덴 숲속에서, 자연과 사람이 어울려사는 덴마크의 마을에서, 사람이 가장 먼저 존중받는 평화로운 사회 북유럽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