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적인 삶을 위해 Part 4. 퍼스널 칸반의 깊은 이야기 그리고 회고

이문기
10 min readDec 12,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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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Dakota Corbin on Unsplash

들어가며

퍼스널 칸반과 관련해 마지막으로 글을 쓴지 벌써 1년 3개월이 지났습니다.

직전 글: 계획적인 삶을 위해 Part 3. 퍼스널 칸반 중간 보고

지금까지 퍼스널 칸반 사용을 포기한 적은 없었습니다. 회사에서 동료들과 Jira를 체계적으로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퍼스널 칸반을 잘 쓰기 위한 노력도 꾸준히 해왔습니다. 퍼스널 칸반을 계속해서 사용하는 이유는 지금도 동일합니다. 스프린트에 할당된 작업 뿐만 아니라 다른 작업, 그리고 제가 일상적으로 해야하는 일까지 모두 관리하려면 나만의 칸반 보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칸반 보드를 사용하다보니 할 일 앱은 이제 더이상 선택지가 아닙니다. 현재는 칸반 보드보다 더 단순해지기는 어려울거란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이 글에선 지난 1년 3개월 동안 퍼스널 칸반을 쓰면서 어떤 점이 개선됐는지 그리고 퍼스널 칸반을 회고와 연결지어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공유합니다. 칸반의 단순한 사용 방법은 다른 아티클이나 책, 투박하지만 제 다른 글을 보는 것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 글에선 칸반의 단순한 사용이 아닌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글은 아래와 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1. 퍼스널 칸반 그리고 작업의 종류
2. 당김, 잔여 작업 그리고 WIP
3. 대기 그리고 기간
4. 오늘 목표
5. 우선순위
6. 내용: 설명과 댓글
7. 파기
8. 완료와 회고
9. 테스트: 중기 목표를 위한 보드

이 글에선 특정 도구를 어필하지 않고 칸반의 일반적인 이야기를 다룹니다.

퍼스널 칸반 그리고 작업의 종류

퍼스널 칸반을 사용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사람마다 작업을 진행하는 흐름이 다르듯 저 역시 작업을 진행하는 흐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해야 할 일을 시작하고 완료하는 건 모든 사람에게 같아보이지만 사실 이 조차도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작업은 완료하지 않고 포기하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 대신 해주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결과를 ‘완료’라고 하기엔 찝찝한 구석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팀에서 사용하는 스프린트 보드 그리고 칸반 보드도 그렇습니다. 팀에서 사용하는 보드는 구성원들의 합의의 결과입니다. 나만의 작업 흐름이 아닙니다.

그럼 팀에 구성되어 있고 팀에서 발생한 모든 작업을 팀에서 관리하는데 나만의 작업 흐름을 관리하기 위해 별도의 칸반 보드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냐하면 팀에서 발생한 작업만 처리하진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팀 외부에서 발생한 작업을 관리하는 보드는 보통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퍼스널 칸반, 즉 나만의 작업 흐름을 관리할 보드가 필요합니다. 이 보드에는 내가 담당한 모든 작업을 관리합니다.

제 보드에 있는 작업의 종류는 정말 다양합니다. 팀에서 다루는 작업 뿐만 아니라 팀 외에서 다루는 작업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A라는 기능을 만들기 위한 작업이 있는 반면, 내가 속한 직무 집단을 위한 작업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사팀에서 요청한 작업, 각종 티타임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아내에게 선물을 준비해야 한다거나, 방 청소, 이렇게 글을 쓰는 것, 강의를 듣는 것 등 내가 해야 하는 모든 작업을 관리합니다.

이렇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작업의 종류와 상태를 기억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어느 순간 부터 ‘아, 까먹어서 못했다.’라는 문장이 주변 뿐만아니라 나 스스로와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선 기억에 의존해서 약속을 지키면 안 됩니다. 어딘가에 관리해야 하고 그 방법에 의존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상태에 있고 왜 못했는지 솔직해져야 합니다.

당김, 잔여 작업 그리고 WIP

칸반에서 당김은 다음 작업을 처리할 수 있을 때 이전 상태에 있는 작업 중 하나를 당겨와 진행하는 걸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다음 작업을 처리할 수 있을 때’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걸 파악하기 위해 WIP(Work In Progress), 즉 현재 진행중인 작업이 얼마나 있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WIP가 2라는 건 진행중인 작업을 최대 두 개로 유지하는 걸 의미합니다. 이미 두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면 다른 작업을 추가로 진행할 순 없습니다.

사실 WIP를 1로 유지하는 게 맞습니다. 저도 1로 유지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동시에 하나의 일만 처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행하고 있는 일보다 더 우선순위가 높은 작업을 해야 할 수도 있고, 진행하고 있는 작업이 미뤄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전 ‘일시정지’ 상태를 별도로 관리합니다.

이걸 연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연습의 결과는 만족스럽습니다. WIP를 1로 관리하는 건 다른 작업을 진행하기 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없는지 확인하는 습관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존에 하던 작업을 잠시 멈추는 건 이 작업과 관련된 사람에게 공유해야 한다는 신호입니다.

대기 그리고 기간

아직 진행중인 작업이 아니라면 백로그 또는 대기 상태를 갖습니다. 이 전엔 이 둘에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단순히 느낌으로 ‘무기한 연기’는 ‘백로그’, ‘하기로 맘 먹었음’이면 ‘대기’로 관리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작업은 백로그에서 바로 진행중으로 넘어가기도하고 백로그에 있는 작업과 대기에 있는 작업이 구분되지 않아 작업을 당겨올 때 어디를 봐야할지 결정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 대기 상태는 왜 필요하지?’라는 고민을 어느 순간 하게 됐고, 대기 상태에 있는 작업엔 작업 기간을 적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즉, ‘대기’ 상태라는 건 ‘작업이 언제 시작되어야 하는지, 작업이 언제 마무리 되어야 하는지 또는 둘 모두를 포함하는 기간 관련 정보가 있어야 한다.’라는 기준이 생겼습니다. 이 기간은 언제든 바뀔 수 있습니다. 계속 미뤄지면 백로그로 바꾸면 됩니다. 기간을 설정한다는 건 ‘곧 이 작업을 처리할 예정이다.’라는 걸 의미합니다.

오늘 목표

퇴근하고 내일 해야 할 일을 미리 정하거나, 출근하고 오늘 할 일을 정할 때 ‘오늘 목표’를 사용합니다. 이 과정은 각 상태에 있는 작업들을 조정하고 하루를 시작하기 전 오늘 진행해야 할 작업들을 상기하도록 도와줍니다. 이 상태를 사용하면 칸반을 멀뚱멀뚱 쳐다보면서 ‘음… 오늘도 잘 해보자.’ 같은 막연한 다짐이나 칸반이 아닌 다른 메모장에 끄적거리며 ‘오늘 할 일’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우선순위

우선순위는 정말 너무 중요합니다. 우선순위는 모든 작업 흐름에 앞섭니다. 만약 우선순위가 가장 높은 일이 생겼다는 건 지금 ‘진행중’인 작업도 ‘일시정지’하고 바로 처리해야 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우선순위가 가장 높은 작업은 백로그 상태를 가질 수 없습니다.

우선순위가 있다면 백로그에서 작업을 가져올 때 힘들이지 않고 해야 할 작업을 선택하도록 도와줍니다. 우선순위가 있다면 적당한 우선순위를 가진 작업이 계속해서 미뤄질 때 낮은 우선순위로 변경해서 미래의 내가 작업의 중요도를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팀 단위로 스프린트를 진행할 때마다 가장 만족도가 높고 모든 구성원이 가장 잘 활용하는 게 바로 ‘우선순위’ 설정입니다.

내용: 설명과 댓글

제목만으로 설명되는 작업은 내용을 적지 않습니다. 제목만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작업, 구체적인 이해가 있어야 작업을 이해할 수 있다면 설명을 적습니다. 모호한 기준이긴하지만 시간이 지나다보면 이해하게 됩니다. 완료한 작업의 제목을 봤는데 도저히 제목만으로 누군가에게 설명하거나 회고를 쓸 수 없을 때가 계속 발생하다보면 점점 직관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아, 제목 가지곤 안 되겠다. 나중에 스프린트 회고나 개인 회고할 때 이런 저런 정보도 있으면 공유하기에 좋겠다.’

댓글은 작업과 관련해 필요한 히스토리를 기록하거나 관련 작업자와 커뮤니케이션을 진행합니다. 메신저로 또는 지나가다 작업 관련 커뮤니케이션 및 결정을 하고 나중에 책임 공방을 경험해보셨다면, 그 역할을 댓글이 대신하도록 해야 합니다. 작업과 관련 된 모든 결정은 설명이든 댓글이든 기록해야 합니다. 다만 경험상 댓글이 더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커뮤니케이션의 흐름, 시간 등도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퍼스널 칸반에서 전 댓글에 이렇게 남깁니다.

‘아내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음’

파기

파기 상태는 선과 악처럼 완료의 대척점 같은 느낌을 줍니다. 왜냐하면 자의든 타의든 완료하지 않기로 결정한 작업들이기 때문입니다. 상태가 완료만 있다면 버려진 작업들은 갈 곳을 읽고 쌓여만 갑니다. 그러면 해야 할 작업과 구분이 안 되기 시작하면서 날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백로그에 너무 오래 있었다면 그 작업을 파기합니다. 내가 하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이 해줬다면 파기합니다. 하려고 했는데 안 해도 된다고 하면 파기합니다.

완료와 회고

전 매주 회고를 합니다. 이 번 한 주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고 지나친 보람 있는 일은 없었는지, 속상한 일은 없었는지, 더 잘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는지 등등 기록을 남깁니다. 그러면 뒤돌아봤을 때 기억에 거의 남지 않은 한 주가 다시 살아나고 보람과 뿌듯함이 생깁니다. 전 이게 바로 스스로에게 주는 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상은 아무리 작은 작업이라도 ‘완료’, 즉 해냈을 때 생깁니다. ‘해냈다.’라는 감정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보다 진행중이던 작업을 완료로 옮겼을 때, 즉 시각적으로 해냈다는 걸 봤을 때 더욱 확실하게 느껴집니다.

지난 한 주 무얼 했는지, 그냥 시간이 지나간 것 같을 때, 완료에 쌓여있는 작업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회고를 통해 돌아볼 때 보상을 얻습니다. (그래서 제목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작업은 설명을 적어줘야 합니다.)

회고를 마무리하고 완료에 있던 작업을 아카이빙 하면 다음 한 주를 또 잘 해낼 거라는 힘이 생깁니다.

테스트: 중기 목표를 위한 보드

퍼스널 칸반은 작은 작업들을 다룰 때도 좋지만 중기 이상의 기간을 갖는 작업을 관리할 때에도 좋습니다. 올해 이루고 싶은 목표, 언젠가 해내고 싶은 목표를 아주 단순한 보드의 작업으로 관리합니다. 그리고 이 보드의 작업들엔 우선순위가 아닌 ‘보람 점수’, ‘아이디어 점수’ 등 어떤 목표를 이루고 싶을 때, 목표 중 하나를 고를 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적어 넣습니다. 전 제 삶에 어느정도로 영향을 주는 목표인지 ‘영향력 점수’를 적어놨습니다.

하지만 삶이 바빠서 그런지 잘 활용하진 못하고 있습니다. 가끔 보며 여러 감정을 느끼기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테스트’입니다.

마무리

퍼스널 칸반을 쓰고 익숙해지는 데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사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건 계획이 필요한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막무가내로, 되는대로 살아와서 그런거라 생각합니다.

퍼스널 칸반을 처음 접했을 때 가장 인상깊었던 단어는 ‘당김’과 ‘보상’입니다. 추가 작업을 할 수 있을 때 하도록 관리합니다. 그 누가 칭찬하지 않아도 시각적으로 완료로 바뀌는 작업을 보며 스스로에게 보상합니다. 이 방법들은 어떤 일에 몰입하다가도 한 발짝 물러서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관찰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알려줍니다.

글을 쓰다보니 퍼스널 칸반을 하고 회고를 하면서 스스로 돌아보고 알아가는 시간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왜인지 위로도 되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어주신 분들도 퍼스널 칸반의 매력을 알아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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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기

사용자를 생각하고 개발자를 생각하는 프런트엔드를 만드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표준, 접근성, 아키텍처, 테스트 등을 꾸준히 훈련하고 적용하려고 노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