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요마
11 min readSep 29, 2015

내가 사는 피부-그가 사는 감옥

절대로 해소되지 않는 바람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미 죽은 사람에게 답을 바라는 일이다. 죽은 사람은 거절도 승낙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어떤 질문과 요청에도 그 답변을 영원히 유보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로베르토’는 이미 죽은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의 아내 ‘갈’과 그녀와의 딸 ‘노마’.

갈은 로베르토를 버리고 그의 이성동복동생인 극악한 범죄자 ‘제카’와 바람이 난다. 그리고 둘이 도피한다. 로베르토가 다시 갈을 찾아냈을 때에는 불에 타서 간신히 목숨만을 부지한 상태였고, 제카에겐 버려진 채였다. 로베르토는 그녀를 여전히 사랑했다.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바꾸었다. 갈이 화상 입은 자신의 모습과 마주할까봐 집안의 모든 거울을 없앴다. 의사로서 환자를 진료하기 보다는 새로운 피부 만들고 그것을 이식하는 연구에 매진한다. 하지만 갈은 결국 우연히 자신이 유리에 비친 모습을 확인한다. 그대로 로베르토의 집에서 몸을 던진다. 그녀는 정원에서 놀고 있던 그녀의 딸 노마의 옆에 떨어져 죽는다.

노마는 이 사건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얻는다. 아마 갈의 자살을 목격한 그 때의 지능으로 멈춘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녀는 또래가 말하는 ‘약’을 자신이 처방받은 정신과약으로 착각한다거나, 또래 남성이 신체적으로 유혹하는 그 뜻을 이해하지도 못한다. 이런 노마는 사생아인 로베르토에게 유일한 가족이자 애착의 대상이다.

‘빈센테’는 이런 노마를 파티장에서 데리고 나와 강간한다. 이 둘의 만남이 문제였던 것은 노마는 남자의 신체적 접근이 무엇인지 그 뜻을 알지 못할 정도로 미성숙하고 정신적으론 불안했다. 빈센테는 자신의 성적 뉘앙스를 노마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러한 오해 속에서 사건은 벌어진다. 서로에 대한 몰이해 속에서 강간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빈센테는 강간범이지만 극악무도한 악인으로 영화에 묘사되진 않는다. 로베르토가 복수를 시작할만한 죄는 성립되지만, 나중에 관객이 빈센테에게 감정을 이입할 여지는 조금은 남겨둔다. 왜냐하면 이 서사를 관객과 함께 끝낼 사람은 바로 빈센테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빈센테를 제카처럼 극악무도한 악인과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다.

노마는 이 일로 인해서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의 상태가 악화된다. 더욱 더 비극적인 것은 딸은 자신을 구조해준 아버지 로베르토를 강간범으로 오해한다는 것이다. 정신과의 독방에 틀어박힌 노마는 로베르토에게 공포를 느끼며 거부한다. 로베르토는 그 오해를 풀 수 없다. 딸의 상태는 이미 해명을 이해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로베르토는 복수해야한다. 복수의 목적은 무엇인가? 일반적인 복수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죄지은 자의 고통이다. 복수를 결심하게 만드는 것은 분노지만, 복수를 완수하게 하는 것은 감정이 아닌 이성의 몫이다. 복수의 과정에서 분노를 절제하지 않는다면 그 대상은 너무 쉽게 죽어버릴 것이다. 죽음은 그 자체가 복수가 될 수 없다. 죽음은 고통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대상이 충분히 고통을 느낄 때까지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 이것이 모든 영리한 복수의 공통적인 룰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수는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계획하는 것이다.

로베르토는 계획하에 빈센테를 납치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마는 자살한다.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범했다는 그 기억이 수정되지 못한채로 말이다. 로베르토는 이제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억누른 채 지독하게 참신한 복수방법을 실행한다. 빈센테를 강제로 성전환 시켜버리는 것. 노마를 강간했던 그의 쾌락의 도구를 압수하고 그가 성적쾌락의 ‘대상’으로만 봐오던 여성의 성질을 부여하는 것. 모든 강간의 집행자들이 원하는 것이 이것이다. ‘어디, 너도 한번 똑같이 당해봐라!’. 빈센테가 여성이 되는 것은 로베르토가 생각하는 가장 합당한 복수의 필수 조건이다.

로베르토는 여전히 무엇을 원하는가? 죽어버린 딸의 앙갚음을 원하는가? 그것 뿐만 아니라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 있다. 자신의 사랑에 대한 아내의 응답. 그리고 아내의 외형을 복원하는 것. 이것은 로베르토가 성형외과의로서도 지속적으로 아내의 복제품을 만들며 채워나가던 욕망이었다. 대상을 잃고 연기된 욕망이 자신의 손에 약자를 쥐게 되면서 다시 고개를 든다. 로베르토는 여성화된 빈센테를 가지고 갈을 빚어내는 작업을 이어나간다. 원하는 대상을 가질 수 없다면 가진 대상을 원하던 대상으로 바꾸면 된다. 빈센테는 강제적으로 외형적으로 완전히 아름다운 연인, 그리고 로베르토에게는 완벽한 연인이 된다. 로베르토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의 그에게 여성의 이름을 새로 지어준다. 그녀 이름은 ‘베라’. 그는 아내를 돌려내지 못한 채 잃었지만 아내를 외형적으로 복제하는 데에는 성공한다.

이제 로베르토에게 베라/빈센트는 복잡한 인간이다. 그녀-베라는 외형적으로 갈의 복제이다. 베라에게는 이제 빈센테의 모습은 단 하나도(목소리조차) 남지 않았다. 하지만 베라의 내면 빈센테는 자신의 딸을 강간한 남자이다. 그리고 그 죗값은 아직 모두 치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로베르토는 베라를 원하지만 빈센테를 거부한다. 때문에 그의 욕망은 베라의 내면 빈센테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베라의 껍데기에만 머물러있다. 그런 로베르토의 욕망은 관음적 시선으로 베라를 바라보기만 하는 것으로 그 만족을 갈음한다. 로베르토는 포르노를 감상하듯 아무도 없는 혼자인 방에서 숨죽인 채 베라의 외모를 감상한다.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원하지만 베라와의 의사소통은 계속되는 마찰뿐이다. 로베르토와 베라의 만남을 이어주는 유일한 매개체는 ‘아편’뿐이며 그 마저도 둘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그러던 중 로베르토의 저택에 제카가 수배 중 몸을 숨긴다. 영화에 등장 전부터 퇴장에까지 본능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인물인 그는 모니터를 통해 베라를 발견한다. 제카는 베라를 자신과 로베르토를 따돌리고 외도했던 갈로 착각한다. 제카는 베라를 찾아내고 그녀를 거칠게 강간한다. 베라는 제카를 통해서 이 집을 탈출하려고 하지만 이내 실패하고 그 사이 로베르토는 집에 들어온다. 로베르토는 베라/빈센테가 제카에게 육체적으로 범해지는 현장을 목격한다.

로베르토가 목격한 이 상황은 로베르토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로베르토는 이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다른 태도로 베라/빈센테를 대하게 되기 때문에 이 질문은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여기서 강간당한 것은 두 명이다. 갈의 외형적 복제품인 베라. 그리고 자신의 딸을 강간했던 빈센트.

베라는 단순히 시각적으로 보이는 외형만 갈의 복제품이었다. 때문에 로베르토는 모니터를 통해 보이는 그녀만을 원했다. 사랑의 대상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겉모습이 아닌 과거와 현재를 엮어내는 ‘서사’이다. 대상의 이야기를 알지 못한 채 좋아할 순 있지만 사랑할 순 없다. 베라는 갈의 모습을 한 채, 갈의 외도의 대상이었던 제카에게 강간당한다. 이 서사는 로베르토가 사랑했던 갈의 서사이다. 이 육체적 관계를 통해서 베라는 복제품의 지위를 넘어 오리지널리티를 획득한다. 이렇게 베라는 갈과 외형뿐만 아니라 서사적인 동일성을 얻게 된다.

빈센테는 로베르토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남성의 성적대상이 된다. 하지만 이로서 복수가 완결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카에 의해서 빈센테는 여성의 위치에서 강제로 범해진다. 바로 노마가 유린당한 그 아래 위치에서 말이다. 이제 로베르토의 입장에서 빈센테는 당할 만큼 당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피해자와 같은 입장에서 같은 피해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이 되는 그 강제적 과정을 버텨낸 ‘타고난 생존자’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사건을 통해서 로베르토는 빈센테를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로베르토는 자신의 욕구를 채운 채 잠들어버린 짐승을 죽이고 거기서 베라/빈센테를 구출해낸다.(적을 죽이고 여자와 포옹을 나누는 것은 전형적인 구출 시퀀스의 결말이다)

이 사건 이후 이제 베라는 로베르토에게 갈의 복제품이 아니라 대체품이다. 베라는 이제 현전하는 갈이다. 또한 자신의 딸을 강간한 빈센테는 만족할만한 죗값을 치렀다. 이제 로베르토는 베라를 사랑하기 시작하고, 빈센테에게는 자유를 준다. 여기서 로베르토와 베라는 동침하게 된다. 로베르토는 육체적 접촉을 시도하지만 베라는 부드럽게 내일로 미루며 거부한다. 그리고 둘은 각자의 잠을 자게 된다.

빈센테를 향한 로베르토의 복수는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다. 영화는 여기서부터 빈센테가 어떻게 베라가 되었는지 그 과정을 빈센테의 시점에서 알려준다. 과거 회상에서 빈센테의 억울한 처지에 동정하게 된다. 강제적으로 남성적을 거세당하고 여성을을 부여받은 빈센테. 우리가 보는 그의 박탈감, 로베르토가 보여주는 비인간적인 변태적 욕망. 이제 영화는 관객을 로베르토에게서 떼어두며 빈센테의 처지에 감정을 이입하도록 돕는다.

베라/빈센테에서 베라는 누구인가? 작가가 베라가 겪은 특수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하려 했던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왜 이런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베라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는가? 베라가 표상하는 것은 외모가 나타내는 성별과 성적 지향성, 성적 정체성간의 불일치이다. 빈센테는 자신의 과오 때문에 그에 대한 벌로서 강제로 여성의 몸을 부여받았다. 이는 사실 시점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가 겪는 성결정과정과 동일하다. 생물학적으로 성별이 결정되고 그에 따라 신체가 발달하는 것은 나의 결정이 아니다. 어찌보면 내가 없는 사이 내가 고르지 않은 성별을 강제적으로 부여받는 것이다. 그리고 둘의 차이점이 있다면 오직 시점이 탄생 이전이냐 이후냐하는 사소한 것이다.

빈센테는 그 과정에 대한 어떠한 반항도 할 수 없었으며 오직 맨 정신으로 그 과정을 모두 버텨야 했다. 그의 자살시도마저 외과의인 복수집행자 로베르토에게는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요가를 통해 자신의 내면에 머무는 일 뿐이었다. 이런 그에게도 기회가 온다. 로베르토가 그녀를 사랑하고 신뢰하게되었기 때문이다. 베라/빈센테는 그의 창조주를 죽이고 그곳을 탈출하는 데에 성공한다. 빈센테는 6년 만에 감옥과 같은 로베르토의 저택을 떠나 자신의 엄마가 운영하는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엄마와 옛 동료 크리스티나 앞에 선다.

이 삼자대면에서 우리는 수많은 질문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가 바로 이 시점 관객의 성찰을 위해 계획된 것처럼 말이다. 베라는 누구이며 빈센트는 어디에 있는가? 빈센트는 베라인가? 내가 사는 피부라는 제목처럼, 베라는 빈센트라는 영혼이 살고 있는 물리적 위치에 불과한 것인가? ‘테세우스의 배’처럼 빈센트를 이루던 모든 외형은 남김없이 교체되었다. 베라가 빈센트와 동일하다는 것을 무엇을 증거로 증명해야하는가? 몇 년간 찾아다녔던 아들은 딸이 되어 돌아왔다. 아들의 빈자리는 딸로서 채워지게 될까 아니면 영영 채워지지 못한 채로 남게 될까? 빈센트의 동료 크리스티나는 레즈비언이었다. 추근덕거리는 빈센테를 꾸준히 거부해왔다. 그리고 그런 빈센테를 놀랍도록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마주하게 된다. 로베르토의 경우에는 빈센테의 외형의 변화는 그를 사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크리스티나에게도 외형적 성별이 그를 사랑하는 계기가 될것인가? 그렇다면 빈센테는? 그의 성적 지향성과 정체성은 지금 어떠하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많은 질문들이 생각나는 삼자대면이지만 작가는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묻고 있다. 빈센테의 어머니가 그를 어떻게 대하게 될지 우리는 모른다. 크리스티나도 그를 어떻게 대하게 될 지 모른다. 그것은 영화에서 결정되지 않은 채 끝난다. 하지만 서사를 통해 작가가 묻고싶은 것은 어떻게 대하는 것이 ‘맞겠는가’하는 것이다. 이것의 답은 정해져 있다. 빈센트는 시작부터 끝까지 빈센트였다. 그의 엄마와 크리스티나는 그를 여전히 빈센트로 대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 특수적 예를 일반적인 상황에 대입해보자. 우리는 살아가면서 외형적 성별과 성적 지향성, 성적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하는 것일까? 어떻게 대하는 것이 틀린 것이고 어떻게 대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빈센트를 생각해보자.

그리고 이 글을 통해 감독에게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

페드로, 닌 걸리셔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