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현존의 언어 : 조력자

VR 영화의 스토리텔링 Ep.4

Che Minhyuk
ixi media
10 min readSep 13, 2021

--

관객 경험의 혁명

VR영화에서 스토리 세계에 현존(presence)해 있는 관객은 게임의 주인공이나 영화의 카메라 같은 존재일 뿐만 아니라 마치 누군가가 된 것 같은 정체성의 감각을 갖는다. 만약 관객이 느끼는 이 감각에 서사적인 상상을 불어 넣고 관객이 극중 캐릭터의 정체성에 따라 역할을 해내듯 스토리 세계에서 행동하게 만들수 있다면, VR 영화의 새로운 가치를 개척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인터랙션과 서사 경험의 단순한 결합이나 VR 영화의 경험을 단지 실감나는 공간의 재현 혹은 스크린 경험에서 확장된 감각적 체험으로 바라보는 인식들을 넘어서 말이다.

소설이든 영화든 어떤 매체든 이야기 경험을 창조한다는 것은 그 세계에 대한 관객의 믿음을 만드는 일이다. VR 콘텐츠에서 관객의 믿음을 만드는 매커니즘은 몰입적인 환경의 구축, 즉 (6축으로 체험 가능한) ‘공간 경험’에 있다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분명히 ‘공간’은 VR의 핵심적인 특성이다. (필자의 VR연출작 <공간소녀>의 구상도 거기서 출발했었다.) 하지만 그 공간의 본질은 스크린 너머에서 재현되어 왔던 ‘공간’과 다르다. VR영화의 공간은 관객의 몸과 연결된 관계를 갖는 공간이다. 관객이 보고 움직이는대로 렌더링 될 뿐만 아니라 관객의 정체성과 역할, 능력과 감각에 조응하여 서사의 흐름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형되는 무대이다. 그러므로 관객이 가상 공간과 맺는 관계를 어떻게 감각하고 인지하고 상상하는가에 그 ‘믿음’을 만드는 열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리즈는 그런 관점에서 관객 경험의 혁명을 중심으로 VR 영화의 언어를 모색해왔다. 첫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작은 캐릭터들이 살고 있는 미니어쳐 세계를 능동적이면서도 수동적으로 관찰하는 ‘거인이 된 관객’의 입장과 시점을 다루었다. 두번째 에피소드에서는 VR 환경이 ‘목격자’로서의 관객을 ‘인터랙티브 구경꾼’으로 재발명하고 주인공이 속한 세계와 그 바깥 세계 사이 접경의 공간에서 다양한 감각으로 관객을 초대하는 사례들을 다루었다.

이번에는 주인공이 있는 곳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그와 관계를 형성하고 그의 서사적 여정을 도와주는 존재로서의 VR 관객에 대해 다룬다. 더불어 그러한 관계를 디자인하기 위해 창작자의 입장에서 필요한 고민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자신의 눈 앞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넘어 자신이 이야기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향해 발돋움하기 위해서.

주인공을 돕다

<크로우 : 더 레전드>에서 크로우가 “생각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는 자"를 만나기 위해 날아가고 있다 © Babob Studios

VR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잘 알려진 바오밥 스튜디오(Baobob Studios) 는 관객을 ‘조력자’로 참여시키는 스토리텔링을 지속적으로 시도해 왔다. 그 중에서도 특히 존 레전드와 오프라 윈프리, 리자 코시 등 화려한 성우 캐스팅으로 유명한 <크로우: 더 레전드(Crow : The Legend, 2018)>에서 관객은 계절의 정령(Spirit of the Season)으로서 주인공 크로우의 여정을 돕는 역할을 맡게 된다.

평화로운 동물들의 숲에 처음으로 겨울이 찾아오자 아름다운 목소리와 화려한 깃털로 주목받던 ‘인싸’ 크로우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는 자”라는 신성한 존재에게 따뜻한 날씨를 되돌려 달라고 호소하는 일을 동물 친구들로부터 요청받는다. 하지만 공연을 앞두고 있던 크로우는 자신의 목소리와 깃털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험난한 여정 앞에 갈등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관객은 주인공 크로우의 입장이 되거나 그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아니다. 관객은 그가 겪는 딜레마와 선택의 과정을 한 발 물러서 지켜본다. 크로우가 자신이 숲의 유일한 희망임을 깨닫고 힘든 여정을 떠나기로 작정한 이후에야 그가 맞닥뜨리는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관객은 마법적인 힘을 가진 계절의 정령으로서 나뭇가지 모양의 손을 흔들어 크로우의 비행을 돕게 되는데 마치 음악을 지휘하는 듯한 신비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관객은 분명 주인공이 알고 있는 세계 속 존재이지만, 주인공과의 관계의 거리는 멀다. 주인공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같은 역할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관객이 돕지 않아도 이야기는 전개 된다. 아마도 크로스미디어 프로듀싱을 추구하는 바오밥 스튜디오가 이 작품을 2D와 VR 버젼 으로 동시에 배급하기 때문에 관객의 참여를 낮은 관여도이자 선택적 요소로 디자인 한 것으로 보인다.

<크로우 : 더 레전드>의 360 버젼은 무료로 공개되어 있다 © Babob Studios

반면, 페이블 스튜디오(Fable Studio)<벽 속에 늑대가 있어(Wolves in the Walls, 2018)>에서 관객은 주인공과 가장 친밀한 관계이자 그 이야기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관객은 주인공 루시로부터 ‘너(You)’라고 불리우며,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자신이 그녀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친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더불어 가족 누구도 믿지 않는 루시의 말을 믿어주는 존재이자, 그녀가 늑대들에 관한 증거를 찾을 수 있도록 그리고 그것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처음 <벽 속에 늑대가 있어>의 세계에 진입할 때 관객은 이야기가 흐르고 있는 공간 한 곳에 그냥 놓여지지 않는다. 내(관객) 앞에서 분필을 들고 나를 그리고 있던 루시와 눈을 마주치면, 그녀가 “어라, 너 키가 꽤 큰데” 하면서 나를 지우고 본인과 비슷한 키로 다시 그려낸다. 나의 스토리 속 현존은 주인공 루시에 의해 좌우된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건네던 루시가 나의 손이 없는 걸 발견한 후 “미안" 하면서 손을 그리기 시작한다. 나는 그제서야 손이 생겨 방 안의 물건을 집어들 수 있게 된다.

루시가 엄마에게 늑대의 증거를 찾았다면서 사진을 보여줄 때 “그 사진 누가 찍어준거니” 라고 엄마가 묻게 되는데, 그 순간 가슴이 덜컹한다. 관객인 나의 행위가 이야기 속 인물들의 관계망 사이로 깊숙이 진입한다. 내 손을 잡아 끄는 루시를 따라 이야기 속 더 깊은 곳으로 도망쳐들어가는 듯한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벽 속에 늑대가 있어>에서 루시가 관객의 손을 그려주고 있다 © Fable Studio

스스로 인터랙션을 조율하는 관객

흔히 스토리 기반의 인터랙티브 VR 콘텐츠에서 관객은(주인공이든 그렇지 않든) 공간을 탐색하고 사물과 인터랙션할 수 있는 자유를 통해 일종의 퀘스트를 수행하여 이야기를 전개시키거나, 아니면 목격자의 입장에서 스토리의 진행을 지켜보다가 인터랙션 큐에 맞춰 ‘참여’하게 된다. (<크로우 : 더 레전드>에서는 나레이션으로 친절하게 “Wave your hands”라고 안내해 준다.)

‘조력자’의 정체성을 가진 입장으로 스토리 안에 현존하게 되면, 게임의 주인공처럼 이야기 전개를 좌우하는 것도 아닌, 주인공을 목격자의 시점으로 지켜보는 것도 아닌, 주인공과 관계를 맺고 이야기 세계 깊은 곳에 위치하게 되는 경험이 가능해진다. 나아가 인터랙션은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한 인터페이스나 인터랙션 큐에 맞춰서 해야하는 행위가 아니라, <벽속에 늑대가 있어>에서 처럼 이야기의 흐름과 결부되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무대 위에 오른 배우가 자신이 가능한 모든 표현력을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배역에 대한 몰입을 통해 대사와 행동을 해 나가듯이 서사적 역할을 받아들인 관객은 주인공과의 대화 혹은 그가 하려는 일이 전개되도록 돕는 역할에 맞춰 자기도 모르게 행동을 조절하게 된다. 주인공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자신의 정체성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사건 속 자신의 역할에 대한 ‘모델링’을 하고 있는 관객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상상력이 자극된다. 마치 연기를 하듯 몰입하면서.

관객의 정체성을 이루는 요소들

그렇다면 조력자로서의 관객 경험을 디자인하는데 있어서 고려해야할 것들은 어떤 것이 있을지 생각해보자.

역할 (Role)
조력자로서의 관객이 누구인지는 주인공과의 관계에서 규정된다. 주인공이 태양이고 주변 인물들이 위성이라면 관객을 어떤 위치에서 이야기에 참여하게 할 것인가. 또한 주인공의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도록 할 것인가. <벽 속에 늑대가 있어>에서 관객은 주인공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지만 <크로우 더 레전드>에서는 그렇지 않다.

능력(Ability)
게임이라면 ‘함께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겠지만 스토리 현존의 관객이 갖는 능력은 ‘인터랙션의 범위와 효과’라고 할 수 있겠다. 공간적 이동, 사물과 환경에 대한 물리적 영향력. 혹은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있을수도 있다. 그렇다면 능력은 언제 소개되고 언제 활성화될 것인가.특정 인터랙션 큐에 활성화되는 ‘기능’일 수도 있지만, 정체성을 안내 받는 과정과 맞물려 부여 받았다가 클라이막스에서 수행하게 되는 ‘결정적 연기'일수도 있다.

현존감 (Sense of Presence)
관객이 스토리 세계 안에서 몸을 갖고 있는가. 시각과 청각 그리고 촉각. 자신의 신체에 대한 감각과 운동감각을 캐릭터의 정체성에 맞춰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가. 자신의 외모에 대한 이미지도 중요하다. 한편으로는 오히려 생략된 감각으로 정체성을 느끼도록 만드는 연출도 가능하다. 나를 둘러썬 다른 존재들의 반응을 통해서.

변형 (Transformation)
정체성의 요소들이 서사의 흐름에 조응하여 어떻게 변하는가. 역할은 쉽게 변하지 않겠지만, 능력과 감각은 달라질 수 있다. 관객의 인터랙션이 처음에는 그냥 주어져 있다가 점차 결정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사건을 통해 어떤 능력과 감각이 드러나도록 할 것인가. 그렇다면 그 전과 후는 어떻게 다르게 표현할 것인가.

연기하는 관객과 협연하는 가상

<Great Hoax: The Moon Landing(2020)> 에서 관객(주인공)은 극중 감독의 디렉션에 맞춰 ‘연기'해야 한다 © VR FILM LAB

자신의 몸을 스토리 경험의 인터페이스로 삼는다는 것은 관객이 스스로를 이야기의 일부라고 믿고 그 역할을 사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런점에서 조력자라는 서사적 역할을 부여 받은 관객은 주인공과 더 가까운 관계를 맺고 이야기 세계 깊은 곳에 위치해 인터랙션의 가능성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의 도구로 적절히 활용한다. 내러티브와 인터랙션의 만남은 그러한 내적 몰입의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한편, 관객의 정체성에 대한 상상력을 디자인 하는 것과 동시에 그러한 관객의 퍼포먼스에 맞춰 상호작용할 수 있는 시스템의 능력도 점차 요구되어 갈 것이다. <벽속에 늑대가 있어>를 제작한 페이블 스튜디오가 가상존재(Virtual Beings)를 개발하는 AI 회사로의 비전을 갖게된 것도 그 때문 아닐까. 관객의 행동과 태도를 이해하고 혹은 관객의 실수마저 보정하여 실시간으로 스토리에 반영할 수 있는 콘텐츠의 능력. 이는 마치 새로운 이야기 경험을 위해 관객과 공간이, 관객과 캐릭터가, 관객과 가상이 함께 하는 협연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관객을 연기하게 하고, 그 연기에 맞춰 협연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서의 스토리 경험을 디자인하는 것. 그것이 우리 이머시브 창작자들에게 주어진 하나의 도전일지 모른다.

이 글에서 소개된 작품들을 경험할 수 있는 곳

크로우 : 더레전드
오큘러스 스토어(리프트)에 공개되어 있으나 현재 한국 지역 서비스 불가
360도 영상 버젼과 2D 버젼은 유튜브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벽 속에 늑대가 있어(Wolves in the Walls)
오큘러스 스토어에 독점으로 공개되어 서비스 중이다. 오큘러스 리프트 및 리프트S, 오큘러스 퀘스트 및 퀘스트2를 통해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현재 한글 자막 및 더빙은 지원되지 않는다)

다음 이야기 : 연결된 관객

--

--

Che Minhyuk
ixi media

VR Film Director, Immersive Storyteller, Volumetric Capture Produc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