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현존의 언어 : Intro

Che Minhyuk
ixi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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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min readNov 23, 2020

VR이라는 매체를 통해 ‘영화’는, 혹은 ‘스토리’의 경험은 어떻게 진화되어 갈까. 90년대 가상현실 붐 이후 다시 불어온 최근 6년여간의 물결 속에서 VR 기술이 열어주는 새로운 감각적 경험에 대한 흥분들, 실감콘텐츠 산업에 대한 전망들을 수없이 많이 들어왔다. 그리고 실제로 새로운 이야기 도구로써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들 또한 목격해 왔다. 하지만 ‘몰입적이고 새로운 어떤 체험’에 대한 이야기들을 넘어 이 매체를 통해 개척해내고자 하는 창조적 욕구와 지향성에 대한 논의들은 충분치 않았던 것 같다.

2015년 선댄스영화제 New Frontier 섹션 풍경. 필자의 VR에 대한 관심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이제 ‘가능성’을 넘어 ‘지향성’을 이야기 하기에 앞서 완전한 오감의 재현을 통해 궁극의 현실감을 제공하리라는 ‘가상현실’에 대한 기대, 혹은 그렇기 때문에 생겨나는 냉소를 조금 거두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러한 생생한 현실감을 만들어 내려는 발전 방향은 이 매체가 가진 하나의 본질적인 속성일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인류가 매체를 이용하면서부터 꿈꾸어 왔던, 매개가 완전히 사라진 ‘투명함’을 통해 대상을 경험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욕망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이어질 글들은 이 매체의 그러한 1차적인 속성을 넘어 이야기 되어야할 만한 어떤 관점들을 찾고자 하는 것이고, 지금의 기술 수준에서 구현된 동시대의 작품들의 가치를 곱씹어 보기 위한 적절한 낱말들을 고민하는 작업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단지 더 ‘몰입적’(immersive)이거나 더 ‘상호작용적’(interactive)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느끼는지 그 경험의 구조를 고민해 보려는 것이다.

VR 이전에 가상을 재현하는 역할을 해온 ‘영화’가 처음 발명되었던 시기를 생각해보자. 재현의 기술 자체에 대한 열광을 넘어 그 매체에 맞는 언어와 문법을 찾기 전까지 수많은 실패가 있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그 시기와 비슷한 모색의 터널 속을 지나고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새로운 길을 직접 탐색해 나갈 기회가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매체들이 자신만의 형식으로 삶을 모방하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감각을 열어주어 왔듯이, VR은 어떤 형식으로 이야기의 여정을 떠나게 하며 어떤 감각으로 캐릭터의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가. 필자는 ‘영화’에서 그 항해를 시작하려 한다. 영화의 리얼리티를 만들고 스토리를 전달해오던 매커니즘 중에서 어떤 것들을 흡수하거나 버리는지 혹은 재발명해 나가는지 따져보면서 앞으로 도래할 콘텐츠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려 한다.

1. 스크린 너머 안쪽으로

영화의 경험을 확장하고 관람의 인터페이스를 개척하려는 기술적 시도들(화면비의 확장, 입체 영화, 다면 스크린, 모바일 영화, 인터랙티브 영화 등)은 영화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시도되어 왔으나 VR이라는 컴퓨터 환경 속에서 비로소 ‘영화’는 근본적인 인터페이스의 전환을 겪게 되는듯 하다. 영화와 관객의 경계면이었던 ‘스크린’이 사라지고 관객이 영화의 내부에 현존(presence)하게 된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스크린 너머에 존재하던 가상의 공간이 이제는 관객이 서 있는 곳을 에워싼다. 가상을 재현하는 ‘창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관객은 고개를 돌려 360도를 둘러볼 수 있게 된다. 이제 ‘프레임’은 영화 감독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관객이 주도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되며 VR시스템은 그러한 관객의 움직임에 맞춰서 변화하는 원근법 이미지를 제공한다. 나아가 관객은 가상 환경 내에서 걸어다니거나 사물을 만질 수도 있으며 캐릭터와의 친밀한 교감도 가능해진다.

VR 영화의 관객에게 ‘영화를 보는 경험’은 스크린 너머의 세계를 하나의 현실이라고 믿고 극중 인물에 감정적으로 동일시하는 일과 다르다. 그 대신 서사가 흐르고 있는 공간의 한복판에 서서 자신의 주변세계을 탐색하고 그곳에 살고 있는 인물과 눈을 마주치며 그들의 이야기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스크린을 통해 “겨울왕국”을 봤던 관객은 이제 “겨울왕국”의 스토리 세계 한 곳에 서서 자신을 향해 펼쳐지는 이야기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겨울왕국”의 세계 속에 현존하는 방식으로 스토리를 경험할 수 있는 디즈니의 VR 애니메이션 “Myth” (출처 : https://i.ytimg.com/vi/dRspl6xbcu4/maxresdefault.jpg)

관객이 스토리 속에 현존하면서 생겨나는 가능성의 영역은 개척되어야 할 언어와 감각들이 기다리고 있는 미지의 보고라 생각한다. 그것은 탐험의 공간일수도 있고, 그리움의 과정이 펼쳐지는 캔버스일 수도 있고, 주인공을 도와야하는 선택의 순간일 수도 있고, 거인이 되어 소인들의 이야기를 내려다보는 체험일수도 있고, 이야기를 계속해서 흐르게 하는 역할을 가진 입장일 수도 있다. VR의 공간을 단지 스크린 크기의 확장으로 보거나 스토리에 현존해 있는 관객을 게임의 ‘아바타’나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카메라의 눈’으로 이해하는 것은 제한적인 관점일뿐이다. 그것은 마치 영화 초기 사진이나 연극의 문법으로 영화라는 매체의 가능성을 이해하려던 일과 비슷할 것이다.

2. 변형의 공간, 과정의 공간

어느덧 고전의 반열에 올라버린 오큘러스 스토리 스튜디오(Oculus Story Studio)의 “디어 안젤리카(2017)”는 이야기가 전개 됨에 따라 ‘나'를 중심으로 씬(scene)이 만들어진다. 실시간으로 무대가 만들어지며 관객을 감싸는, 다른 매체에서는 불가능한 체험을 하게 된다. 텅빈 어둠에서 시작하여 허공에 드로잉 되는 선들이 캐릭터를 드리우고 씬을 채색한다. 배우였던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주인공의 독백은 공간을 ‘그리움의 캔버스’로 만든다. 그녀의 목소리와 회상의 전개를 따라 관객은 공간을 둘러보고 그녀의 감정에 몰입 한다. 현실적인 움직임을 모사하는 캐릭터 애니메이션 대신 장면을 그리는 ‘과정’이 바로 애니메이션이 된다.

“디어 안젤리카”의 공간은 영화가 그러하듯 필름 위에 저장된 ‘이미 만들어진’ 객관적 세계가 아니다. 내가 이야기에 진입하는 순간 비로소 조성되는 ‘과정의 공간’이다. 따라서 관객은 이미 재현되어 있는 가상 세계로 접속해 그곳을 관음한다기 보다는, ‘만들어지고 있는 공간’ 혹은 관객의 참여와 움직임을 기다리며 ‘관객의 도착’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공간으로 초대 받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디어 안젤리카(Dear Angelica)“(2017) (출처 : https://mk0uploadvrcom4bcwhj.kinstacdn.com/wp-content/uploads/2018/12/DearAngelica.png)

기존 영화 문법에 익숙한 창작자들이 전방위로 펼쳐진 VR 공간 속에서 관객의 시선을 어떻게 유도할 것인가 혹은 프레이밍과 편집의 문법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 곤란해 하는 경험담을 많이 들어 왔다. VR 영화의 공간은 기존 연극이나 영화 매체가 리얼리티를 구축하기 위해 시공간을 구성하는 방식과는 달리 다른 종류의 ‘리얼리티’를 향해 진화해 나간다고 보는 관점이 필요할 것이다. 즉, 영화가 생명으로 삼았던 구상적 재현의 집착을 버리고 가시화하기 힘들었던 추상적인 것들도 수용하여 배치할 수 있는, 연속적이고 균질한 공간이길 과감히 포기하고 해체하는 공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매체미학자 박영욱의 표현을 빌리면, VR은 “관객의 욕망에 따라 항상 새롭게 변형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관객의 시점이나 움직임에 따라 실시간으로 다르게 체험되고 3차원적인 탐험이 가능한 공간. 즉, 보는 나를 중심으로 변형되는 주관적인 세계 체험의 공간인 것이다. 말하자면 영화의 배경이자 무대로써의 공간은 이제 상호작용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형가능한 다이나믹한 공간이 된다.

3. 스토리의 일부이자, 연기하는 관객

관객의 시각장을 모두 차지하여 마치 다른 곳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몰입감, 그리고 고개를 돌려볼 수 있다는 상호작용의 감각은 스토리 세계 안에 있는 듯한 ‘현존감’을 만들어 낸다. 나아가 관객의 위치를 트랙킹 할 수 있는 6DOF HMD, 신체 곳곳을 트랙킹하여 가상의 몸을 느끼게 하는 기술, 촉각을 제공하는 글로브나 햅틱 수트와 같은 기술들은 가상의 경험을 더욱더 신체화함으로써 현존감을 높인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은 관객 자신의 몸을 스토리 경험의 인터페이스로 만드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극장의 객석에 가만히 앉아 있던 관객은 스스로 ‘인터페이스’가 되어 가상과 현실의 경계면을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창조적인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무대와 관객의 경계가 무너진 연극적 공간 속에서 관객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며 이야기에 참여하는 ‘이머시브 연극’의 관객 경험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머시브 연극 “슬립 노 모어 Sleep No More”의 한 장면. 가면을 쓴 관객들이 배우 옆에서 연기를 바라보고 있다. (출처 : https://pyxis.nymag.com/v1/imgs/fb6/190/33eeee03c1866e9891bab32ffae1a1246e-15-sleepnomore2.rsquare.w700.jpg)

스토리 속에서 현존감을 느끼는 관객은 어떤 종류든 정체성에 대한 감각 내지는 자신의 입장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된다. 이머시브 연극 “슬립 노 모어”에서의 관객이 가면을 쓴 능동적인 관음자라고 하면, 김진아 감독의 360 영화 “동두천”에서 처럼 ‘유령’과 같은 목격자 일 수 있고, “I, Philip”이나 “1인치”의 경우처럼 주인공이 될 수도 있고, “버디VR”이나 “Asteroids”에서 처럼 주인공의 친구이자 조력자가 될 수도 있다. “진격의 아빠”에서 관객은 공간 속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환타지를 경험하는 ‘특수한 시선’이 되며, “Rain Fruits”에서 관객은 이주 노동자의 감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방인의 감각을 경험한다. “7 Lives”에서 관객은 타인의 삶을 선택하여 그 사람의 죽음의 순간을 맛보는 ‘능동적인 유령’이 되며, “Vader Immortal”에서 관객(게이머)은 이야기의 전개를 진행시키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동적인 프로타고니스트 역할을 맡게 된다. 이렇듯 게임의 ’아바타’ 처럼 미션을 수행하는 주인공과 영화의 ‘카메라의 눈’처럼 스토리 속 인물들의 세계를 바라보는 ‘고스트’ 사이에는, 시점의 문제로만 다룰 수 없는 아직 다 개척되지 않은 무수한 입장과 감각의 스펙트럼이 존재하는 듯하다. 영화 서사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캐릭터나 플롯에 대해 말하듯이 이머시브 스토리텔링이 진화해 감에 따라 관객의 정체성과 역할을 논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예컨데 펜로즈 스튜디오(Penrose Studios)“Allumete”이나 “Arden’s Wake” 같은 작품들을 통해 개척되어 Atlas V“Gloomy Eyes” 시리즈를 통해 계승되고 있는 ‘인형의 집’ 스타일의 작품들을 관객 경험의 관점에서 들여다 보면 흥미로운데 이를 다음에 이어질 첫번째 ‘스토리 현존의 언어' 토픽으로 다뤄볼 예정이다. 관객의 능동적 개입이나 역할은 없지만 ‘거인이 된 관람자’로서의 관객의 감각 자체가 스토리의 형식을 전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VR에서의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관객 경험의 근본적 변화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관객의 이야기 속 정체성과 입장에 따라 캐릭터와의 관계와 상호작용 방식이 만들어지고, 관객에게 주어진 인터랙션의 자유가 어떤 의미인지 정의되며, 그러한 인터랙션이 서사에 영향을 줄것인지 아닌지를 좌우하게 되고, 관객의 즉흥성을 얼마나 수용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스토리 속에 현존하는 관객의 시점, 입장이나 역할, 능력, 감각, 관계 맺음에 대해 탐구해 나가며 관객 정체성의 스펙트럼을 탐색해 나려는 것은 ‘내러티브와 인터랙티브의 만남’이라는 막연한 가능성을 넘어 관객 자신이 상상력을 동원해 몰입하는 실시간 콘텐츠의 전성기를 꿈꾸기 때문이다.

“VR은 관객의 몸과 이미지 사이에 급진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관계를 만든다” -레프 마노비치

4. 공간과 연결된 관객

VR은 실시간으로 변형가능한 공간을 무대로 삼고 관객을 스토리 세계의 일부로 초청한다. 이머시브 스토레텔링, 즉 스토리 현존의 경험이 스크린 기반의 경험과 갖는 가장 큰 차이는 앞서 말한 공간 경험과 관객 경험의 차원일 것이다.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를 통해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스토리기반 VR 작품들을 주로 관객 경험의 관점에서 곱씹어보고 영감을 얻어 보려한다. 하지만 이 두 측면은 서로 뜯어 내어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일 것이다. 관객의 감정과 행동을 유도하고 혹은 반영하기 위해 공간은 관객과 상호작용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VR이라는 컴퓨팅 환경을 통해 관객과 영화는 연결되었다. 여기에 더해 스토리 세계 안에서 관객들이 서로 연결된다면, 혹은 관객 개인의 감정까지 데이터로 ‘연결’(센싱)되어 스토리에 반영된다면, 실시간 스토리텔링의 ‘즉흥성'을 더욱 실감나게 만들기 위해 인공지능을 활용한다면? 상상만해도 흥분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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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 Minhy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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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 Film Director, Immersive Storyteller, Volumetric Capture Produc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