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 매혹적인 시작의 순간, 그 후

Da Ye Kim
ixi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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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min readMay 9, 2021

“Virtual Reality(VR)가 영화의 미래라고 생각하시나요?”

영화학 전공자로서 VR 관련 논문을 쓰고 있다고 말할 때면 항상 받는 질문입니다. 학과 동료들도 제가 VR 이야기를 꺼내면 걱정 반 기대 반의 반응과 함께 비슷한 질문을 하곤 합니다. 2015년 뉴욕 영화제의 Convergence 프로그램에서 VR을 처음 만났을 때 이 질문을 받았다면 영화의 미래는 VR을 향해 있으며 저는 그래서 이 분야에 관심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간 영화를 공부하고 VR의 발전을 바라보면서 VR을 주 연구 주제로 결정할 만큼의 애정이 생긴 지금, 제가 VR에 관심이 있는 이유는 VR이 미래를 꿈꾸게 하는 만큼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매력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VR의 ‘시작’이나 ‘처음’을 언제로 정하는가에 대한 부분은 개인적으로 다를 수 있고 특히 새로움을 강조하는 VR 홍보에서 ‘처음’은 흔히 쓰이는 표현입니다. 영화 역시 비슷한 초기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가상 현실 속 메타버스, 오아시스를 향한 경쟁이 더욱 더 빨라지고 거세지고 있는 2021년 팬데믹 시대에 <레디 플레이어 원>(2018) 속 오아시스 창시자 할리데이의 대사처럼 한 번쯤은 앞이 아닌 뒤로 가보는 건 어떨까 생각합니다. 이 글에서는 영화의 매혹적인 초기 순간들을 돌아보며 VR이 영화의 과거를 뒤돌아볼 때 얻을 수 있는 미래를 향한 열쇠인지를 고민해보려 합니다.

매혹적인 볼거리로서의 영화, 매혹적인 경험으로서의 VR

영화 역사학자 톰 거닝(Tom Gunning)은 1906년 이전의 영화/무빙 이미지를 ‘Cinema of Attractions’(어트랙션 영화 : 기존 번역들에서는 ‘매혹의 영화’라 번역 되어있지만 여기서 ‘attraction’은 볼거리/명물/신기한 경험의 의미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이론화하며 내러티브 영화 이전의 영상들은 이야기적 표현보다는 보여지는 경험,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선사하는 것에 집중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 경험들은 보드빌(vaudeville) 공연장이나 야외 축제 공간에서 자유롭게 전시되어왔다고 기억합니다. 근대화와 맞물려 발전해온 시각 기술의 하나였던 영화의 진정한 잠재력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나 자연의 움직임을 모방하는 것보다 신기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이미지를 보여주는 감각적 경험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기존 영화 역사가 초기 영화의 이런 부분을 놓쳐왔음을 비판합니다. 미디어 학자 레프 마노비치(Lev Manovich) 역시 2001년 저서 ‘뉴 미디어의 언어’(The Language of New Media)의 도입부에서 이러한 초기 무성 영화에 대한 자료 부족을 아쉬워합니다. 극영화의 유행, 특정한 스크린 비율, 밀폐된 상영 공간, 정형화된 상영시간과 관람 매너가 확립되기 이전의 영화는 시각적 경험 자체로도 충분히 매혹적이었습니다. 보여주는 전시에 가치를 둔 초기 영화는 영화관 속 관람객과는 다른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전시 공간도 즐기는 관객도 더 자유롭고 정신없이 움직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거닝은 더 나아가 초기 영화가 내포했던 시각적 미학과 경험을 향한 갈망은 내러티브 영화가 확립되고 나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후 아방가르드 시네마, 아티스트 시네마 등 다른 방식으로 계속 이어져왔음을 주장합니다. 저는 VR이 그 연장선상에 있으며 시각적 경험을 향한 도전에서 ‘보고 또 체험하는’ 경험을 향한 갈망으로 확장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러티브도 중요한 요소지만, 초기 영화에서부터 이어온 감각적 경험, 즉 시각에 더해진 청각, 후각, 촉각 등을 통한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 VR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VR 작품들 중에서도 2016년 트라이베카 영화제에서 경험했던 <Notes on Blindness: 실명에 관한 노트>의 시도가 기억에 깊게 남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동명 다큐멘터리 속 작가가 시력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기록했던 것들을 가상의 공간에서 재현하며 목소리로 남겨진 기억의 이미지화/시각화를 구현해낸 작품이었는데 이야기보다도 순간의 감각적 경험이 매우 특별하게 다가왔습니다.

팬데믹 시대를 맞아 더 빨라지고 있는 VR의 대중화 속에서 감각적 경험, 체험적 경험으로서의 가능성에 다방면으로 도전하는 컨텐츠들이 다양하게 개발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Tribeca Film Festival 2018 전시장 외부 사진 (사진 출처: 작가)

이미 역사가 된 on site 영화제 속 VR

영화제 외에도 미술관이나 공연장, 엑스포 전시장 등에서 열린 VR 행사들도 참여해봤지만 그 중에서도 영화제 속 VR 프로그램에 가장 주목해온 이유는 영화제 프로그램으로서 즐기는 VR이 거닝이 주장하는 cinema of attractions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둡고 한정된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와 달리 오픈된 공간에서 체험하는 VR은 퍼포먼스적인 성격이 강했고 VR 자체를 경험하는 것만큼이나 그 장소를 경험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습니다. (올해 초 인천국제 공항에서 열린 부천영화제의 Beyond Reality 전시는 새로운 공간에서의 체험이라는 점에서 특히 관심이 갔습니다) 보여지고 보는 경험이 매혹적이었던 초기 영화처럼 영화제 VR은 체험하고 체험을 전시하는 경험 자체로서도 새롭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축제 속 VR은 전시인 동시에 공연으로 다가왔고 저는 이렇게 오프라인 공간 속의 경험과 연결된 VR 경험에 매료되었습니다. 글로만 읽어왔던 미디어의 융합이 이루어지는 현장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눈물 짓기도 했고 넘어지기도 했으며 이 모든 행동들은 다른 관람객들에게 가상 경험 밖 또 다른 경험을 선사했습니다. 마치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을 보고 기차가 화면 밖으로 나올까봐 무서워 소리 지르던 1895년 프랑스 사람들의 재방송을 보는 듯한, 영화의 시작이라고 불리는 순간이 다시 반복되는 역사적인 순간을 목격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많았습니다.

영화의 가치를 생성하고 영화적 담론을 다루는 자리인 영화제가 VR의 새로운 장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은 특히나 주목해야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펜로즈(Penrose) 대표 유진 정(Eugene Chung)이 <아덴스 웨이크(Arden’s Wake)>로 2017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역사상 첫번째 Best VR상을 수상한 후 남긴 수상소감에서 VR을 100년 전 영화의 상황에 빗대며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던 것 역시 VR이 영화의 미래만큼이나 과거도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그 해 포브스 잡지는 유진 정을 VR계의 D.W. 그리피스(D.W. Griffith는 내러티브 영화 구조를 확립한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초기 영화감독. 인종차별과 백인우월주의 사상으로 논란이 많은 동시에 역사상 첫번째 흥행 영화인 <국가의 탄생>(1915)의 감독으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음)로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VR은 2012년 선댄스 영화제 뉴 프론티어 프로그램에서 처음 소개 된 이후 여러 유명 국제 영화제의 가장 핫한 콘텐츠가 되었고, 이는 영화계가 VR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미래를 건설하고자 하는 노력을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선댄스 영화제는 2012년 프로그램을 새로운 매체의 탄생 (“Birth of a Medium”) 으로 부르며, VR을 향한 여러 분야들의 골드 러시(gold rush)의 시발점이 된 행사였다고 주장합니다. 마치 1932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영화가 처음 추가된 이후 다른 유럽국가들이 영화제를 주최하기 시작하면서 영화를 하나의 예술 매체로 인정하고 발전시켰던 때를 떠올리게 합니다.

2018 부산영화제 VR Theater 관람을 위해 줄을 선 사람들 (사진 출처: 작가)

이미 과거가 된 코로나 이전의 영화제 속 VR 프로그램 공간은 설레임과 다급함과 불안함과 즐거움이 가득한 시네마틱한 공간이었습니다. 그 공간 자체가 주는 에너지는 영화제가 주목하기 시작한 VR을 향한 열기만큼 강렬했습니다.

VR 프로그램 시작 전 문 앞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 이게 무엇을 위한 줄인지 묻는 행인들, 남녀노소 다양한 관람객들 사이에 보이는 업계 전문가들이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 긴장한 듯 보이는 안내 요원들, 장비 점검으로 바쁜 프로그램 담당자들… 문이 열리자마자 각자 가장 원하는 부스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달리는 사람들, 넓고 화려하게 꾸며진 전시 공간, 첫 관객인 줄 알았으나 이미 예약이 다 찼다는 슬픈 소식에 절망하는 몇몇 사람들, 시작도 못하고 문제가 생긴 기기 때문에 곤란한 표정의 담당자들, VR 경험을 설명하느라 바쁘지만 신나 보이는 감독과 크리에이터들, 긴 줄을 뚫고 들어왔으나 또 줄을 서야 하는 사람들,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 보면 또 마주치는 반가운 얼굴들…

팬데믹 이후 영화제 VR 프로그램 자체도 가상의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스크린 밖으로 도망친 100세 영화 2편) 겨우 재작년까지의 영화제 경험들을 이렇게 먼 과거형으로 써야한다는 점은 안타까우면서도 한 매체의 발전에 얼마나 많은 변수들이 존재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코로나가 종식되고 영화제들이 다시 행사를 시작하면 돌아갈 수 있는 과거 일지 모르나 과연 그때와 같을까 의문이 듭니다. VR 공간에서의 행사가 활성화되고 있는 요즘, 미래의 영화제가 과연 VR 전시를 물리적 공간으로 다시 가져올 것인지, 영화제에서 전시되는 VR을 체험하러 오는 사람들의 기대감은 어떻게 변해 있을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영화와 VR 사이의 접점에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리고 2020년은 거닝이 초기 영화가 내러티브 위주의 스토리텔링 매체로 돌아선 시기로 주목한 1906년과 비슷한 전환점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야말로 한 걸음 물러서서 영화와 VR의 과거 및 현재를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재정비해야하는 시기라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IXI의 “오아시스까지 한걸음” 시리즈는 분명 시기 적절하고 중요한 기획이라고 생각합니다.

2018 부산 영화제 (출처: 사진 작가)

영화의 가능성, VR의 잠재력

미디어 학자 진 영블러드(Gene Youngblood)는 디지털 시대에 확장된 영화의 정의를 이론화하는 과정에서 음악이 다양한 악기를 통해 표현될 수 있듯이 영화도 여러 방식으로 풀어나갈 수 있음을 주장했습니다. 영화 학자 토마스 앨세서(Thomas Elsaesser)는 미디어 융합 시대의 새로운 영화역사는 목적론적인 순차적 접근이 아닌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여러 미디어 매체들의 접점들을 찾아가며 쓰여 져야한다고 했습니다. 그림에서 사진으로, 사진에서 무빙 이미지로, 필름 영화에서 TV, 디지털 시네마, VR/AR/XR로 차례대로 발명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매체들은 오랜 시간 서로 영향력을 행사해왔고 비슷한 접점들을 만들어가며 발전해왔다는 주장이며 이 발전 과정에는 미학적, 기술적 요소 외에도 사회, 문화, 정치, 경제적 다른 변수들도 너무나 많다는 것 역시 강조했습니다. 앨세서는 새로운 영화역사를 90년대 이후 영화학의 중요한 방법론으로 부상하고 있는 미디어 고고학(Media Archeology)과 연결시켰습니다. 그는 이 접근을 영상 미디어 역사의 가계도(family tree) 그리기에 비유하기도 했는데, 이는 순차적 접근보다는 각 미디엄 사이의 연결성을 더 부각하려는 의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확장된 의미로 생각해보면 VR은 어쩌면 잊고 지냈던 영화의 먼 친척같은 존재일지 모릅니다.

VR이 영화의 미래인가 아닌가를 논하기 이전에 그 질문에서 말하는 영화가 무엇인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질문 속 ‘영화’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스토리텔링 매체, 내러티브 영화만을 뜻한다면 이는 첫 단추부터 VR의 가능성을 제한하게 될 것입니다. (스크린 밖으로 도망친 100세 영화 1편 마지막 부분을 보며 크게 공감했습니다) 2017년 처음 신설되어 이어지고 있는 베니스 영화제 VR 시상 부분이 Best VR 외에 Best VR Interactive Content(immersive experience)와 Best VR Story로 구분된 것은 신선하면서도 우려되는 부분입니다. VR의 가능성을 논할 때 내러티브 중심의 경험과 몰입 및 인터랙션 위주의 경험으로 나누어서 생각하기 보다는 두 가지를 함께 구현해낼 수 있는, 또는 그 이상의 경험을 창조할 수 있는 것으로 더 열린 자세를 취해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초기 영화/영상 미디어의 매혹적인 순간들로 돌아가 시각적 경험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면서, 더 나아가 VR을 통해 확장된 매혹적인 감각적 경험으로서의 가치를 놓치지 않는다면 VR은 더 다양하고 유기적으로 발전해나갈 것입니다.

‘뉴’ 과 ‘올드’의 구분이 모호해질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미디어 분야에서 영화와 VR은 2021년 현재 공존하는 매체들입니다. 영화제 VR 프로그램을 통해 점접을 발견하고 발전해온 두 매체는 팬데믹 시대에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확장성은 다시 부각되고 있으며 초기 영화를 연상시키는 감각적 경험의 잠재력은 VR로 전이되어가고 있습니다. 과거는 빠르게 현재화 되어가고 있으며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은 더욱 더 모호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VR이 영화의 미래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대답하곤 합니다.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영화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VR의 미래가 더 다양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고 김다예(Da Ye Kim)

저는 Atlas of Transnational VR Sites and Communities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VR이란 무엇인가,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VR이 어디에서, 어떤 사람들의 노동을 통해 만들어지고, 전시되고, 유포되고, 담론화되고 있는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VR의 현장과 커뮤니티는 국경, 민족, 성별, 분야, 시공간을 초월하며 발전하고 있고, VR의 이러한 초월적, 전복적 (subversive) 가능성이 기존의 미디어, 제도, 관습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 질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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