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까지 한 걸음 (1/5)

Ep01. 오아시스, 그리고 메타버스

Giioii
ixi media
13 min readOct 2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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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신기루

“저희 지향점은 ‘오아시스’ 같은 플랫폼을 만드는 것입니다”

2020년 현재 xR 업계에 관심이 있다면 주변에서 한번쯤 들어봤을, 심지어는 본인의 입으로 직접 해봤을 말일 것이다. 특정 소설 속의 어떤 개념이 이 정도로 한 산업의 지향점이 된 적이 있었을까? 이번이 처음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현재 태동하고 있는 ‘xR 업계’의 지향점에 소설 <레디 플레이어 원>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가상현실’이라는 개념은 오래되었지만 이번 xR ‘유행’(이번이 처음은 아니다)은 2014년 페이스북이 VR 헤드셋 스타트업 ‘오큘러스’를 20억 달러에 인수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오큘러스’가 막 설립되어 킥스타터 펀딩을 시작할 무렵인 2012년, 당시 스무 살이던 오큘러스 공동 창업자 팔머 러키는 자신의 미래 비전을 주변에 알리기 위해 한 권의 책을 적극 추천했는데 바로 그 책이 2011년 출간된 소설 <레디 플레이어 원>이다. 소설의 영향력은 페이스북이 오큘러스에 인수되면서 자연스럽게 페이스북 창업자인 마크 주커버그에게로 옮겨갔다. 비록 그가 소설 속 가상현실 서비스 ‘오아시스’를 공식석상에서 언급한 적은 없지만 소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의 목표가 현재의 페이스북을 ‘오아시스’로 진화시키는 것에 다름 아님을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오아시스’에 꽂힌 사람들은 그 둘만이 아니었다. 실리콘밸리에서 xR 사업에 꿈을 품게 된 사람들은 모두 그 소설에 매혹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소설 속 개념이 실제 사업에 적극적으로 반영되기 시작됐고 투자자의 호응을 얻었다. 소설 속 ‘망막 투사형 디스플레이’를 실현시키겠다고 나선 스타트업 ‘매직 립(Magic Leap)’은 제품이 출시 되기도 전에 이미 5조 원이 넘는 기업가치를 가진 유니콘으로 평가받았다. ‘델(Dell)’은 자신들이 출시한 첫번째 VR 기기의 이름을 소설 속 헤드셋 명칭인 ‘바이저’로 정했다. ‘세컨드라이프’라는 3D 기반 소셜 서비스로 한때 세간의 주목을 끌었던 ‘린든 랩’은 소설 속 ‘오아시스’와 동일한 경험을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산사(Sansar)’라는 새로운 서비스를 런칭했다. 린든 랩의 초기 창업자였던 필립 로즈데일 역시 이와 유사한 가상현실 서비스 ‘하이 피델리티(High Fidelity)’를 공개했다.

Ready Player One — Official Trailer

2018년, 소설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어 전세계에 공개되자 ‘오아시스’라는 개념은 실리콘밸리를 넘어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게 되었다. 여전히 생소한 ‘xR’ 투자자들이나 정책결정자들에게 설명할 때 영화 속 장면을 인용하는 것은 그 어떤 피칭보다 효과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지금 개발 중인 xR 기술이 고도화되면 저런 일들이 가능하겠구나’, ‘사람들이 xR 기기를 지금의 스마트폰처럼 사용하는 세상이 언젠가 올 수도 있겠구나’를 이해시키는 데는 효과적이었지만 정확히 언제, 구체적으로 어떤 영역부터 그런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영화가 설명해 줄 수 없었고 불행히도 그 영화를 인용한 xR 산업의 초기 개척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기대감은 빠르게 실망감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오큘러스 퀘스트, HTC 바이브, 삼성 오디세이 등 당대 최고 수준이라 알려진 xR 기기들을 체험해 본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대한 영화 속 ‘가상현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질은 예전 DVD 수준에 불과하고 그래픽 수준은 어설픈 CG 애니메이션 같을 뿐더러 콘트롤러는 낯설고 모션 트래킹은 부자연스러운데다 헤드셋은 무겁고 조금만 쓰고 있어도 땀이 흘러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화장을 망가뜨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경을 쓴 사람에 대한 배려가 거의 없었다. 초기 개척자들은 떠나가려는 투자자들을 붙잡아두기 위해 모든 책임을 기기에 돌렸다.

“지금 이 기기는 제가 꿈꾸는 ‘오아시스’를 위한 기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기기가 완성만 되면 ‘오아시스’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라고.

그러고 나니 ‘오아시스’가 정확히 어떤 서비스인지 사람들이 그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게 지금의 인터넷 경험과 어떻게 다를지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대신 xR에 대한 관심은 어떤 새로운 기기가 나올 지, 그 기기는 얼마나 더 개선됐으며 누가 그 기기를 만드는지 같은 것들에 집중되었다. 그 사이 ‘매직 립’은 붕괴했고 삼성은 더 이상의 VR기기를 만들 계획이 없다고 선언했으며 구글은 스마트폰과 연결해서 볼 수 있는 자사의 VR 서비스 ‘데이드림’을 공식 종료했다.

2020년 10월, 아직 ‘완성된 기기’는 나오지 않았다. 오큘러스는 기존 기기의 성능을 개선한 ‘오큘러스 퀘스트2’를 새롭게 출시했고 MS도 ‘홀로렌즈2’를 판매하기 시작했으며 그 밖에 Nreal, HTC, HP, 밸브 등도 새로운 기기를 판매하고 있지만 아직 영화에서 본 그런 기기, 즉 스마트폰을 대체할 수 있고 24시간 내내 쓰고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기기에 이르지는 못했다. 누군가는 결국 “애플이 그걸 내놓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나와봐야 아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오아시스’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일까? 어쩌면 ‘오아시스’는 신기루에 불과한 것일까?

<레디 플레이어 원> 시사회장에서 만난 오큘러스 창업자 팔머 러키(중)와 작가 어네스트 클라인(우) https://www.reddit.com/r/oculus/comments/87nsko/oculus_cofounders_brendan_iribe_and_palmer_luckey/

메타버스? 또 다른 오아시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이 개봉하던 그 해, 에픽게임즈(Epic Games)는 온라인 게임 <포트나이트>를 출시한다. 한국에서는 비슷한 시기 출시 된 <배틀그라운드>의 아류작 취급까지 받으며 이내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포트나이트>는 출시 첫 해 역대 게임 역사 상 연간 매출 신기록을 수립하고 전 세계 3.5억 명이 플레이하는 메가 히트작이 되었다. <포트나이트>는 특히 10대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기에 10대를 주 고객층으로 삼는 상품들의 마케팅 채널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디즈니는 영화 <어벤져스:엔드게임> 및 <스타워즈: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 개봉 시 <포트나이트> 게임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때만 해도 <포트나이트>는 ‘오아시스’와는 전혀 관련성이 없는 서비스처럼 보였다. 그저 흔한 온라인 게임 중 하나였고 심지어 xR 기기를 전혀 지원하지 조차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 1월,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산업 분석가이자 투자자인 매튜 볼(Mattew Ball)의 ‘메타버스(Metaverse)’ 개념을 사용하여 <포트나이트>의 잠재력을 설명하는 글이 화제를 모았다. ‘메타버스’ 역시 1992년에 출판된 SF 소설 <스노우 크래시>가 처음 쓰기 시작한 소설 속 개념으로 ‘현실세계와 같은 사회적/경제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3차원의 가상공간’을 뜻한다. 이 개념을 매튜 볼이 꺼낸 이유는 한 게임 시상식에서 에픽게임즈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도날드 머스타드(Donald Mustard)가 ‘포트나이트를 통해 메타버스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즉, <포트나이트>라는 게임공간을 단지 끊임없이 전투가 반복되는 놀이터로만 쓰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다양한 사회적/경제적 활동이 일어날 수 있는 장이 되도록 진화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그 발언은 현실이 되었다. 올해 4월 공개된 트래비스 스캇(Travis Scott)의 <포트나이트> 공연이 그 시작이었다. <포트나이트> 내 모든 전장이 일시에 중지된 뒤 하늘에서 거대한 트래비스 스캇 캐릭터가 내려와 10분 남짓 공연을 펼친 이 이벤트를 무려 1230만 명이 실시간으로 지켜봤고 이곳에서 처음 공개된 신곡은 그 주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곧바로 1위가 되었다. 게임 속 이벤트가 완벽하게 현실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었다. 이에 고무된 에픽게임즈는 한달 후 아예 ‘파티로얄’이라는 모드를 <포트나이트> 내에 정식으로 런칭한다. ‘파티로얄’은 사용자들이 모여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 영화를 보거나 공연을 관람하고 서로 파티를 즐길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런칭 후 이곳에서는 스티브 아오키 등이 참여한 DJ 파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테넷>의 트레일러 월드 프리미어 이벤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영화 상영회(한국에서는 인셉션), 그리고 9월 말에는 BTS의 ‘다이나마이트 뮤직비디오 안무 버젼’을 세계 최초로 공개하는 이벤트 등이 이어졌다. 현재 이 ‘파티 로얄’ 모드의 주 소비층이 기존 <포트나이트> 유저들인지, 이제까지 <포트나이트> 게임을 즐기지 않았지만 라이브 공연이나 이벤트를 관람하길 원해 새롭게 <포트나이트>를 설치한 사람들인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에픽게임즈가 진지하게 자신들의 “게임서비스” 공간에서 사용자들이 다른 여러가지 활동들이 가능하도록 해주고 그 활동들이 심지어 물리적 현실세계까지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면, 우리가 <포트나이트>를 ‘오아시스’라고 부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왜냐하면 ‘오아시스’ 역시 처음에는 온라인 게임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포트나이트 파티로얄에서 최초 공개된 영화 ‘테넷’ 트레일러https://www.epicgames.com/fortnite/ko/news/tenet-movie-trailer-premiere-in-party-royale

소설 <레디 플레이어 원>은 ‘오아시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중접속 온라인 게임으로 시작해 오늘날 거의 모든 인류가 사용하는 범세계적 가상현실이 된 오아시스 … 대다수 오아시스 유저는 아바타 레벨이나 게임 측면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문화생활을 즐기거나 사업을 하거나 쇼핑을 하거나 친구와 놀기 위해 오아시스를 이용했다”

소설 속 ‘오아시스’와 현실의 ‘메타버스’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인식은 그저 먼 미래로 치부되던 ‘오아시스’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오아시스’는 최첨단의 xR기기가 완성된 이후에야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어떤 미지의 킬러 서비스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 곳에 존재하는 온라인 게임들이 기존 게임 서비스에서 벗어나 여러가지 다른 활동들이 가능한 온라인 플랫폼으로 진화해가는 모습 그 자체이다. 심지어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 ‘xR 기기’는 전제조건도 아니다.

지난 6개월 사이 사람들은 온라인 게임 서비스를 활용하여 많은 일들을 벌이기 시작했다. 청와대는 어린이날을 맞아 <마인크래프트> 안에서 가상의 청와대를 짓고 거기에 어린이들을 초청하고 대통령의 메시지를 남겼다. 가수 존 레전드는 새로운 앨범을 발표한 뒤 ‘웨이브(Wave)’라는 xR 버추얼 콘서트 서비스를 통해 3D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형태로 첫번째 쇼케이스를 진행했다. 존 레전드는 모션캡쳐 수트를 입은 상태에서 라이브 공연을 진행했고 팬들은 유튜브를 통해 애니메이션 캐릭터 존 레전드의 라이브를 지켜봤다. ‘웨이브’는 가수 더 위크앤드 역시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바꾸어 공연을 열었고 이번에는 ‘틱톡’이 공연을 생중계했다. KPOP 아이돌 ‘블랙핑크’는 <제페토>에서 팬사인회를 열었고 실제 블랙핑크의 멤버들이 역시 애니메이션화 된 캐릭터의 모습으로 제페토 세계에 등장해 팬미팅을 진행했다. 이 모든 일들이 ‘xR 기기’의 도움을 받지 않고 벌어졌다.

사람들이 온라인 게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게임말고도 많다는 것을 알아가게 되면서 온라인 게임을 닮았지만 게임이 주 목적이 아닌 서비스들도 등장했다. <MOR(Museum of Other Realities)>은 가상의 미술관이자 컨벤션 센터로서 올해 ‘칸 영화제 필름마켓’을 가상공간에서 열 수 있도록 도왔다. 사람들은 MOR에 접속한 뒤 참가자들의 프레젠테이션을 보고, 비즈니스 미팅을 진행했다. ‘베니스영화제’는 HTC가 운영하는 ‘바이브포트(Viveport)’와 ‘VR챗(VRChat)’을 활용해 자신들의 행사를 가상공간으로 옮겼고 ‘버닝맨’은 MS가 보유한 ‘알트스페이스VR(AltspaceVR)’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전세계적으로 온라인 게임, 혹은 온라인 게임과 유사한 3D 서비스를 활용해 가상 컨퍼런스, 전시회, 페스티벌을 개최하는 사례가 거의 매주 등장할 정도로 많아지기 시작했다.

코로나19라는 천재지변으로 인해 사람들의 대면접촉 및 집합이 전세계적으로 제한되면서 직접적인 타격을 받은 글로벌 이벤트들이 자구책 모색 차원에서 가장 먼저 움직이긴 했지만 사람들은 이번의 경험을 계기로 앞으로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온라인 게임, 혹은 이와 유사한 서비스를 이용하게 될 것이다. 영화나 스포츠 중계, 콘서트를 보고 파티를 열고 비즈니스 미팅과 학술 컨퍼런스를 여는 것 뿐 아니라 물건을 사고 팔고 가상 공간 안에서 여러 사람들이 원격으로 접속하여 물건 또는 콘텐츠를 직접 만들어 내고 가상 공간 내에서 회사를 운영하는 것도 이미 현실화 되기 시작했다. 소설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2044년의 일상으로 묘사된 가상공간 내 학교 수업이나, 명상, 종교활동이 이미 2020년의 현실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비록 아직은 마이너의 영역이라 부를 수는 있어도 ‘오아시스’는 엄연히 현재가 된 것이다.

이번 칸 영화제 필름마켓이 열린 버추얼 이벤트 플랫폼 ‘MOR’ https://laptrinhx.com/catch-the-cannes-xr-marche-du-film-festival-in-the-museum-of-other-realities-only-until-july-3rd-3809063903/

오아시스를 향한 경쟁의 시작

사람들은 xR 기기가 완성된 이후에야 ‘오아시스’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었지만 실은 ‘오아시스’는 이미 이곳에 존재하기 시작했다. 물론 앞으로 등장할 더 나은 기기와 더 빠른 통신속도와 더 뛰어난 그래픽 처리장치와 데이터 처리 기술이 ‘오아시스’ 자체의 기능을 개선시키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오아시스’를 쓰도록 도울 것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지금이 ‘오아시스’ 자체에 대해 좀 더 깊게 파고들 시점이다. 영화에서는 ‘온라인 게임’의 이미지가 훨씬 더 부각되었지만 소설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는 ‘오아시스’가 어떤 과정을 통해 전세계인을 사로잡은 메이져 플랫폼이 되었는지, 그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들이 가능한지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에서는 소설 <레디 플레이어 원> 속 ‘오아시스’ 묘사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지금 우리 현실 속 ‘오아시스’가 어떻게 발전해 나갈 것이며 어떤 서비스가 성패를 좌우할 것인지, 그리고 현재 존재하고 있는 서비스 중 어떤 서비스가 플랫폼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을지, 새롭게 시장에 진입할 후발 주자가 갖춰야 할 요소는 무엇일지 등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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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는 이제 막 설립된 신생 xR/이머시브 콘텐츠 프로듀서 그룹입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일들을 벌이고 있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giioii_immersive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