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도 변호사도 불안하다고 말하는 이유

황세원 (LAB2050 연구실장)

황세원
LAB2050
12 min readAug 2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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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이우기 © LAB2050

“당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유롭게 살지 못 한다면 무엇 때문인가요?”

이 질문에 할 말 있는 사람들이 둘러앉았다. 지난 8월 14일 서울 대학로 공공그라운드 5층, LAB2050이 주최한 대화 모임 ‘자유롭고 안정적인 사회를 위한 제안’이 20여명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광복절 휴일을 앞둔 저녁에 열렸는데도 사전 신청자 대부분이 참석했다. 동행자가 있는 사람보다 혼자 온 사람이 더 많았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만큼 이 모임에 온 이유가 분명한 사람들이었다.

이원재 LAB2050 대표는 “저희가 진행 중인 ‘자유 안정성 혁명’이라는 연구의 내용을 발표 전에 살짝 공개하고,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자 한다.”고 모임의 취지를 밝혔다.

사회는 발전했는데 왜 우리는 불안할까?

LAB2050 연구위원인 구교준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는 ‘대한민국은 지난 50~60년 동안 상당히 발전하고 풍요로워졌는데, 왜 이 사회를 사는 우리는 행복하지 못 하고 불안을 크게 느낄까?’라는 질문으로 연구의 출발점을 설명했다.

행복을 위해서는 자기 삶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안정성이 필요한데 우리 사회가 그런 토대를 제공하지 못 해 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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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발제 이후의 시간은 모두 참석자들의 이야기로 채워졌다. 모임의 참가신청서에는 사전 질문이 있었는데 ‘당신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자유롭게 살지 못 한다면 이유는 무엇인가요?’ 등이었다. 이 응답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대화는 ‘일’ 주제의 세션 1과 ‘돌봄’ 주제의 세션 2로 나뉘었다.

‘일’에 대한 참석자들의 응답은 크게 ‘일자리에서 안정을 찾았으나 여전히 불안하다.’와 ‘일자리가 불안해서 불안하다.’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흔히 불안정성을 안정된 일자리를 찾지 못 한 탓으로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 LAB2050

참석자 김경민 씨는 손꼽히는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안함을 느낀다고 했다.

“법무법인에서 5년째 일하고 있는 변호사입니다. 처음에는 1~2년 후에 독립할 생각이었는데, 결혼하고 아기가 생기니까 쉽지가 않더더라고요. 이 업계도 정글 같아서, 준비가 덜 된 채로는 나갈 엄두가 안 납니다. 개인적인 다른 사정도 있고요. 그래서인지 우리 사회가 불안정하다는 기사나 뉴스를 보면 답답하고 화가 나요. 과연 일할 자리가 있고, 돈을 계속 벌 수 있으면 행복한가?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이 모임 공지를 보고 참석하게 됐습니다.”

공무원 합격자도 불안하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사람도 불안함을 느낀다고 했다. 다음달부터 업무를 시작할 예정이라는 이주영 씨는 “일단 생존의 공포는 탈출했지만 다른 공포가 있다.”고 했다.

“저는 사람 사이의 관계, 신뢰에 대한 고민이 있어요. 학생운동, 공공프로젝트도 해 보고 일반 회사도 다녀 봤는데 소위 말하는 집단주의 문화, 조직문화가 어디에서나 강하더라고요. 제 또래들은 대체로 좀 더 가벼운 문화, 필요에 따라 뭉쳤다가 흩어질 수 있는 관계들을 지향하는데 한국 사회의 관계들은 그렇지가 않아요. 목숨 걸고 달려들어서 살아남지 않으면 자리가 보장되지 않는 거죠. 이제 공무원으로 일하게 되면 제 삶에서의 여가라든지, 선택의 자유는 얼마나 빼앗기게 될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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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활동가로 일 하다가 서울시 공무원이 됐다는 최순옥 씨도 다른 관점의 두려움을 말했다.

“풀뿌리 지역 활동가로 일하다가 서울시 공무원으로 2년간 일하게 됐어요. 월급 꼬박꼬박 나오지만 여전히 불안합니다. 나이가 쉰 넷인데, 청년들 못지않게 미래 불안이 커요. 지금 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어떻게든 유지해야 하나 고민도 합니다. 솔직히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재미’가 없거든요. 수다 떨면서 지역 활동 했던 때가 그립고, 그 때 더 창의적으로 에너지 있게 일 했던 것 같아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안정성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습니다.”

‘일자리가 불안해서 불안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더 다양했다. 특징적인 것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지 못 한 것이 불안의 핵심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안정적 일자리가 핵심은 아니다

지금까지 11개의 조직 경험을 했고 지금 소속은 동시에 여러 개의 일을 한다는 뜻의 ‘N잡’ 및 ‘N프로젝트’라고 밝힌 손호석 씨는 아예 “안정적인 일자리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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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삶의 어떤 부분은 안정적이었으면 하지만, 일에 있어서는 ‘정년 보장 일자리’보다는 다양한 일에 도전하는 것에 매력을 느껴요. 물론 그로 인한 불안정성이 있죠. 지난해 세대주로 독립을 했더니 의료보험부터가 현실적으로 부담되더라고요. 나이가 들수록 지인들의 경제적, 사회적 자원과 저의 것을 비교하게 되기도 하고, 어른들이 ‘너도 이제 안정적인 자리 찾아야지’라고 말씀하실 때는 신경이 쓰입니다. 지금처럼 한 조직에 속하지 않고 일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가능할까, 이 질문에 아직은 답하기 어렵네요.”

이소연 씨도 안정적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진로에 도전하는 중이지만 불안감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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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직장은 결혼해서 아기 키우는 여성들도 정년까지 다닐 만한 곳이었어요. 그렇지만 저는 결혼도 출산도 원치 않기 때문에 40대 50대가 되도록 이렇게 산다는 것이 무서웠어요. 열정을 쏟고 싶은 ‘맥주’라는 대상을 발견하고 그 분야 전문가가 되기 위해 사표를 냈습니다. 다음달 캐나다 유학을 떠날 예정이에요. 부러우실 수도 있지만 사실 막막해요. 5년쯤 후에 가진 돈은 다 썼는데 거기든 여기든 일할 자리를 못 찾는다면 어떻게 될까, 기댈 회사도 남편도 없는 싱글 여성은 50대, 60대에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지, 아는 선례가 없어서 더 막막해요. 쪽방촌 같은 데서 폐지 줍다가 홀로 죽는 것 아닐까, 이런 불안을 느낍니다.”

창업자의 관점에서 불안을 말해준 참석자도 있었다.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창업지원 일을 하다가 스스로 창업을 해서 5년째를 맞았다는 장연실 씨다.

“대기업, 공기업 다닐 때는 자유롭게 그만뒀는데, 창업을 하고 나니까 힘들어도 그만둘 수가 없어요. 저만 문제가 아니라 직원들의 생계도 달려 있으니까요. 또 정부의 창업 지원을 받아 보니 정말 속박이 심하더라고요. 창업은 자유롭게 한다고 생각들 하는데, 오히려 조직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자유가 없어요. 그러다보니 불안하다는 생각을 매년, 매 순간 하게 됩니다.”

돌봄 부담 때문에 자유롭지 못 하다

이야기는 ‘돌봄’이라는 주제로 넘어갔다. ‘자기 돌봄 부담 탓에 자유롭지 못 하다.’는 사람들과 ‘타인(가족) 부양 부담 탓에 자유롭지 못 하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고민은 ‘일’ 주제의 고민들과도 맞닿아 있었다.

© LAB2050

마을 활동가인 이미경 씨는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마을 안전망을 만들기 위해 일해 왔으면서도 “주거와 생계의 문제, 내 아이들에 대한 돌봄의 문제를 지금의 사회 제도로는 해결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저는 폐지를 줍더라도 마을에서 살아갈 수만 있으면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최근에는 내 생계가 불안해지면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게 될까 걱정돼요. 컴퓨터 등 변화하는 환경을 따라가지 못 하고 젊은 친구들에게 의존하는 것도 눈치가 보여요. 나이듦 자체가 불안이 되는 거죠. 어떻게든 지금 일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가치관에 어긋나는 일이어도 감수해야만 노후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김지영 씨는 “저희 아버지는 지난해 퇴직하시고 연금을 받기 시작하셨는데, 그 덕분에 부양의 부담이 덜하기는 하지만 저 자신은 나중에 연금을 받으리라는 기대가 없다.”고 했다.

“우리 사회는 예측할 수 없는 삶에 대해서는 불이익이 너무나 강합니다. 근로계약을 짧게 맺으면 같은 일을 해도 월급을 적게 받고, 주거도 단기로 계약하면 더 비싼 돈을 내잖아요. 더 취약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제약을 가하는 셈이죠. 예전에 여행하다가 만난 캐나다 청년은, 일 년에 열 달 일하고 두 달은 여행하며 살기 때문에 고정비용이 안 들고 더 자유롭다고 했어요. 부모님 돌봄에 대한 책임이 덜하고, 단기 일자리 선택에 대한 불이익이 덜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았어요. 우리도 장기간 예측할 수 없는 사람도 불안하지 않은 사회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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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 씨는 “은행에서 ‘55세까지 보장된다’고 설명하는 청약통장이나, 사회적경제 마을공동체 등에 대한 제도들도 과연 언제까지 존재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먼 미래에도 존재할 만한 제도에 대한 신뢰가 있지 않고서는 ‘나의 최후는 무연고자일지 모른다’는 불안을 떨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시민 노동’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

참석자들은 이런 고민만 털어놓은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가야 할지에 대한 제안들도 내놨다.

먼저 LAB2050이 조만간 발표할 ‘자유안정성 혁명’ 보고서에 들어 있는 ‘자유롭고 안정적인 사회를 위한 10가지 정책 제안’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photo by 이우기 © LAB2050

이원재 대표는 이 내용을 간략히 설명한 뒤, 그에 대한 의견 또는 각자가 생각하는 안정성을 높이는 방법에 대해 말해 달라고 요청했다.

가장 많이 나온 의견은 그동안 가치를 인정받지 못 해 온 ‘부불노동’(unpaid labor), 즉 공동체 활동과 같은 ‘시민 노동’, 가사 노동, 자기 돌봄 등에 대해서도 보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최순옥 씨는 “우리 사회에는 시민들이 자발적인 활동으로 채워 오던 일들이 있다.”면서 “이런 일들로 공동체에 기여해 온 사람들이 불안에 시달리지 않도록 ‘기본소득’과 같은 분배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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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시의 지역 활동가인 나경호 씨도 “기본적인 안정성만 있다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공동체에 기여하면서 제각기 다양한 형태로 살아가고 싶은 청년들이 많다.”면서 “이런 청년들에게 안정성을 주는 것은 사회를 위한 투자라는 인식이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장연실 씨는 “창업자를 지원한다면 사업개발비 같은 식으로 하지 말고 ‘기본소득’과 같은 형태로 매달 생활비 지원을 해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할 때 창업자들이 더 자유롭게, 더 혁신적인 도전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산 경성대학교 교수로 ‘재미’를 연구해 왔다는 김선진 씨는 “선택의 자유가 있을 때 사람들은 재미있는 일을 찾아갈 수 있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선택의 기회를 보장해 주는 문화, 사회적 여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지영 씨는 “월세, 임대료 등 토지나 집을 빌리는데 너무 많은 자원이 들어가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이미경 씨도 “빈곤을 벗어나기 힘든 가장 큰 이유가 주거비와 교육비”라면서 “대학교까지 무상교육을 해야 하고, 주거비도 국가가 책임질 수 있도록 과감한 해법이 나왔으면 한다.”고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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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 온 서울시민’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마이클 시글러 씨는 “한국 사회의 불안은 개인적 이유보다는 사회적인 이유가 많기 때문에, 교육의 측면에서 좀 더 할 일이 많아 보인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박소연 씨는 일자리의 질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고 했다. “지금 일자리가 불안정하더라도 내가 지금 하는 일 경험이 성장 동력이 되고, 그 성장을 통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면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면서 “어떤 일을 하건 즐거움을 느끼고 성장할 수 있도록 전반적인 일자리의 질이 높아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자유안정성 혁명’을 위해

종합하면 사람들이 원하는 안정성이란 이런 것이었다. 지금 몇 년 후 삶을 예측할 수 없어도, 빠른 사회 변화에 적응하지 못 해도, 일자리를 지키려고 아등바등 하지 않아도, 양심과 가치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아도, 원치도 않는 관계망 안에서 버티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래도 나 자신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이었다. 경쟁에서 승리한 몇몇 사람만이 아니고 누구나 이런 삶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회가 ‘안정성 있는 사회’라는 것이다.

이원재 대표는 “자유도 행복도 혁신도 안정감 위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 시간이었다.”면서 “그런 사회를 위한 변화가 시작되도록 연구와 정책 제안을 나가려 하니 지켜봐 주시고 의견 주시면 좋겠다.”는 말로 모임을 마무리했다.

LAB2050의 연구보고서 ‘자유안정성 혁명’은 조만간 이메일 뉴스레터와 블로그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솔루션2050 보고서

자유안정성 혁명: 행복하고 혁신적인 대한민국을 위한 제안 (다운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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