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시랩은 ‘정부 혁신’의 촉매제가 될 수 있을까?

김현아 (LAB2050 기획실장)

김현아
LAB2050
11 min readSep 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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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 결과에 입각해 신규 정책을 추진하는 폴리시랩(Policy Lab)을 시범적으로 도입하겠다.”

지난해 말 정부는 ‘2018 경제정책 방향’ 발표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최근에는 대구도시공사가 대구 스마티 시티 선도 모델 개발에 ‘시민주도형 폴리시랩’을 도입하겠다고 공표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직 낯선 개념이지만 폴리시랩은 2010년 이후 미국, 캐나다, 핀란드, 영국 등 서구권에서 시도돼 온, ‘정부 혁신’을 위한 하나의 흐름입니다.

특히 유럽 국가들에는 100여개의 폴리시랩이 정부 또는 민간 주도로 만들어져 활동 중입니다. 이 기관들은 ‘정부 혁신’을 위한 새로운 방법론을 제공하는 대안적 지식 조직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EU 정책연구소는 폴리시랩 모델과 현황, 혁신 사례를 소개하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EU 회원국 폴리시랩 ⓒ European Union, 2016

이처럼 폴리시랩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폴리시랩은 어떤 일을 하는 조직이며, 어떻게 ‘정부 혁신’을 촉진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다음 세대를 위한 정책실험실’을 모토로 출발한 LAB2050도 민간 주도의 독립적 폴리시랩이라 할 수 있습니다. LAB2050의 향후 방향을 전하기 위해서라도 폴리시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정리해 둘 필요가 있겠는데요. 이번 포스트에서는 폴리시랩의 개념과 해외 폴리시랩 사례를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기존 정책 과정의 한계로 등장

폴리시랩은 현 공공 정책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를 드러냈다는 비판과 반성 아래 등장했습니다.

현대 사회가 당면한 난제들은 복잡성과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일자리 감소, 저출생과 초고령사회 진입, 사회 양극화와 불평등 심화 등의 문제는 오랫동안 누적된 요인에서 기인하거나, 다양한 이해관계들로 얽혀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또, 급격한 기술 변화와 사회 변화로 미래 전망과 예측이 어렵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 Graham Foundation

기존 관료제 하의 정책들을 통해서는 이런 난제를 해결할 혁신이 나타나기 어렵다는 것이 공공정책가들의 중론입니다. 관료제의 특징인 하향식 (top-down) 정책 개발, 전문가 중심의 폐쇄적 의사 결정, 기계적 효율성 논리에 따른 자원 배분, 관료들의 위험 회피 성향 등 때문입니다.

이렇게 수직적이고 경직된 정책 과정으로는 정책 수요자의 다양성을 포괄하는, 다차원적이고 때로 상충되기도 하는 이해관계를 풀 만한 해법을 찾기 어렵습니다. 설사 혁신적인 해법이 제시된다 하더라도 전례 없는 시도를 꺼리는 관료들의 성향 때문에 현실화 되기 어렵습니다. 그 동안 수많은 정부 혁신 노력이 있었지만 대부분 실패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와 달리 비즈니스 등의 민간 영역에서는 혁신적이고 다양한 방법론이 개발돼왔습니다. 소비자 욕구 다변화를 반영해 서비스 효과를 높이는 인간 중심 디자인 방법론(Human Centered Design)이 그 예입니다. 이런 방법론들을 공공 영역에 반영한다면 경직된 관료제에도 긍정적 자극을 줄 수 있고, 정책의 효과도 높아질 것이라는 주장도 자연히 나오게 됐습니다.

폴리시랩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기존 정부조직과 정책에 자극을 주는 새로운 시도와 실험을 위해 시작됐습니다. 즉, 더 늦기 전에 정부 역량과 수단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켜야만 한다는 시민들의 강력한 요구 하에 탄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책 혁신’ 통한 사회혁신 전략

폴리시랩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부 혁신의 전략 중에서도 ‘정책 혁신’에 주력합니다. 공공 정책의 수립과 평가 과정의 혁신을 통해 사회혁신을 이루려는 전략입니다.

공공 정책 영역에서 사회혁신을 유도하는 데는 두 가지 접근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책을 통해 사회혁신 생태계를 구축하고 활성화하는 것’(Policy FOR Social Innovation)이며, 또 하나는 ‘정책 자체가 사회혁신인 것’(Policy AS Social Innovation)입니다.

공공 정책에서 사회혁신을 유도하는 두 가지 접근 방법 © SIC

현재 서구권의 폴리시랩들은 후자에 더 집중하는 편입니다. 공공 정책 자체를 혁신의 대상으로 삼고, 정책 형성 및 실행 과정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정부와의 협력 하에서 직접 새로운 정책을 설계하고 실험하기도 하고, 정책과정에 혁신적 방법론을 도입하기도 합니다. 즉, 사회혁신의 가치를 다양한 분야 공공정책에서 구현하는 ‘정책 혁신’을 목표로 합니다.

정책 의제들은 국가 수준일 때도 있고, 도시 및 지자체 수준일 때도 있습니다. EU 정책연구소의 보고서는 폴리시랩이 다루는 정책 범주를 아래의 표와 같이 소개합니다. 이 중 몇 가지 정책 범주에 집중하는 폴리시랩도 있고, 여러 의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곳도 있습니다.

EU 회원국 폴리시랩들이 다루는 정책 범주 ⓒ LAB2050

‘현실 세계’에 기반한 정책 설계

“우리는 정부를 수직적으로 조직하지만, 사람들은 수평적으로 산다.”

“We organise government vertically, but people live horizontally.”

- 스티븐 골드스미스(Stephen Goldsmith), 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 교수

한 폴리시랩의 정책기획자는 폴리시랩의 주된 방법론인 ‘실험’ 방식을 “새로운 정책을 수립할 때 ‘현실 세계(real world)’를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와 같이 폴리시랩은 사람들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행동하는지를 정책의 중요한 근거로 여깁니다.

소수의 관료와 전문가들이 데이터에 근거해서 결정하고 집행하는 하향식(top down), 폐쇄적인 정책 과정에서 벗어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책 수요자인 시민의 경험에 기반해 정책을 설계해야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혁신적인 정책을 만들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때문에 폴리시랩은 주로 두 가지 접근 방식을 취합니다. 하나는 정책 수요자를 정책 설계에 참여시키는 ‘디자인 기반 접근’이고, 또 하나는 시민들의 행동 양태를 정책 개발 및 검증의 근거로 사용하는 ‘증거 기반 접근’입니다. 두 방식 모두 실제 사람들의 경험 또는 행동 데이터를 근거로 한다는 점이 공통됩니다.

디자인 기반 접근방식은 쉽게 말해서 ‘이용자 중심’ 정책 설계라 할 수 있습니다. 비즈니스 영역의 디자인 씽킹(design thinking) 방법론을 공공 정책 개발 과정에 접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민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또는 현재 정책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춰 대안을 개발하며, 이를 위해 참여 관찰, 워크숍 등 시민의 실제 경험을 수집하고 참여시키는 방법론을 씁니다.

이러한 디자인 기반 접근 방식은 새로운 대안,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도출하는 데 유용합니다. 하지만 도출된 정책 대안이 실제 효과성을 갖는지까지 검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문에 정책이 의도한 바를 달성하는 지를 과학적이고 실증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폴리시랩의 또 하나의 접근 방식인 증거 기반 접근은 혁신적 정책을 제도화하거나 스케일을 키우는 데 강점을 가집니다.

폴리시랩 방법론 ⓒ LAB2050

증거기반 정책 개발과 정책 혁신

“정책 결정에 사용되는 많은 모델들은, 정책 입안자가 의도한대로 사람들이 자신에게 올 인센티브의 변화를 신속하게 인식하고 대응할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것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BIT ‘행동주의적 정부 : 행동주의 과학을 통한 정부 정책 결정의 개선’ 보고서

폴리시랩의 증거 기반 접근 방식은, ‘넛지(nudge)’ 개념으로 잘 알려진 행동주의적 정책 개입 전략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새로운 정책 개입이 이뤄졌을 때의 이용자 반응을 실증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시민들 스스로 현명한 선택을 하게 하는’ 행동주의적 해법을 검증하는 유용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영국 정부와 네스타(Nesta)가 공동 설립한 ‘The Behavioral Insights Team(BIT)’은 정부의 정책 혁신을 견인할 방법으로 행동주의적 접근과 정책 실험(policy experiment)을 주로 활용하는 폴리시랩입니다.

BIT는 무작위 통제 실험(RCT: Randomized Controlled Trial) 방식을 주로 사용합니다. 이는 정책 대상자를 실험 집단과 통제 집단으로 나누어 비교해 효과성을 검증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BIT는 구직 센터의 재취업자 지원 프로그램을 개선하는 방법을 실험을 통해서 찾아봤습니다. 먼저 BIT는 구직 센터 프로그램의 절차와 운영 방식을 ‘구직자의 심리적 탄력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바꾸면 재취업률이 높아질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2,000명의 구직자를 두 그룹으로 나누어서 그 중 한 그룹인 1,000명에게는 심리적 탄력성을 높이는 ‘자기 표현적 글쓰기’와 ‘강점 확인’ 등의 기법이 들어간 새로운 프로그램을 적용했습니다. 또 다른 1,000명에게는 기존 방식을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13주 후 두 집단을 비교한 결과, 새로운 프로그램을 적용한 실험 집단이 재취업 프로그램을 계속 이용하는 비율이 15~20% 떨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 구직센터 RCT 정책실험 ⓒBIT

핀란드의 기본소득 정책실험도 대표적인 무작위 통제 실험 입니다. 핀란드 사회복지국은 기본소득이 실업자의 근로 의욕을 향상시키고, 사회 복지 행정비용을 줄이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를 검증하는 정책 실험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장기 실업자 25~58세 중 2,000명을 무작위로 선발해 조건없이 매달 560유로를 지급하고, 그 대조군으로 별도 선발된 2,000명과 구직 행태 변화를 비교하는 실험입니다.

이와 같이 폴리시랩들은 증거기반 접근 방식을 활용해 다양항 정책 실험에 나서고 있습니다. 앞으로 조세, 의료, 고용, 환경, 지속가능성 등 여러 분야의 정책 혁신을 촉진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영국의 대표적인 사회혁신가 제프 멀건(Geoff Mulgan)은 “실험주의(experimentalism)를 영국 정부 내에만 펼칠 것이 아니라, 전 세계로 확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주목해 볼 만한 일은 BIT가 최근 Nesta와 직원들의 공동 출자를 통해 민간 조직으로 전환됐다는 것입니다.(관련 기사)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위치에서 좀 더 과감하고 혁신적인 정책 제안 및 실험을 하기 위한 시도로 보입니다. 또한 영국을 넘어서 미국, 호주, 싱가폴 등 전세계 여러 국가들의 정책혁신 과정에 참여하기 위한 행보로도 보입니다.

BIT는 영국 의료보장서비스 NHS 디지털 사이트의 팝업 프롬프트를 개선해, 병원 대기자율을 38% 감소시키는 성과를 냈다. ⓒBIT “Update Report 2016–17”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정책혁신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이처럼, 세계 각국은 정책 실험과 폴리시랩이라는 새로운 접근 방식으로, 기존 관료제 하의 정책 과정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찾아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더 늦기 전에 정부 혁신을 위한 방법론 모색에 나서야 합니다. 핀란드 정부가 국가 개혁 5대 전략의 하나로 ‘실험의 문화(a culture for experimenting)’를 설정한 것처럼, 우리도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지 않을까요?

정부 혁신과 정책 혁신의 ‘촉매제’인 폴리시랩이 우리 사회의 난제들에 대해서도 혁신적 해법을 제시하는 날을 기대해 봅니다. 이를 위해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부가 폴리시랩을 도입하고자 할 때, 그 방법과 전략부터 혁신적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해외 폴리시랩들이 혁신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연구하고 시사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LAB2050도 정책 실험을 제안하고 실행해 나가는 동시에, 혁신적인 폴리시랩 모델이 더 많이 확산되도록 좋은 사례를 알리는 노력을 계속 해 나가겠습니다.

폴리시랩 및 정부혁신 연구에 대한 제안이나 의견이 있으시면 아래 링크로 보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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