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한국 사회의 화두 ‘일자리’
* LAB2050 ‘제조업 도시들이 흔들린다: 지역별 고용위기 시그널과 위기 대응 모델’ 보고서의 온라인 버전입니다. 주석, 참고문헌 등은 PDF 버전(다운로드)과 마지막 포스트(링크)에 표기하였습니다.
1. 연구 배경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화두는 단연 ‘일자리’다. 전체 고용율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한창 일해야 할 30~40대의 고용 지표조차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일자리 문제는 사실 이 지표들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안정된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것이 진짜 문제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20대 남성 지지율이 낮은 이유, 청년 세대 사이에서 ‘남혐’, ‘여혐’ 등 젠더갈등이 심해지는 이유도 ‘안정된 일자리’가 점점 희소해지는 현상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4차 산업혁명’이 기대보다는 두려움으로 인식되는 이유 역시 지금 존재하는 일자리들의 안정성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발전에 따라 회계사, 변호사, 기자 등 안정적이라고 여겨졌던 직업들도 위험할 수 있다는 ‘4차 산업혁명’의 메시지는 개발연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당연하게 작동했던 산업, 고용, 교육 정책의 기조를 모두 흔들고 있다. 그동안 ‘안정적인 일자리’의 특징은 분명했고, 그 일자리들에 진입하는 경로도 대체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므로 이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을 막고(가능하면 늘리고), 불안정한 일자리에 있는 사람들(혹은 그런 일자리에 진입할 가능성이 높은 청소년 및 청년들)을 되도록 안정적인 일자리들로 들여보내는 것이 정책 목표인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이제는 ‘어떤 산업이 유망하고 경쟁력이 있는지’와는 별개로 ‘그 산업에서 일자리가 없어지지 않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산업 자체는 경쟁력이 있고 매출이 유지되더라도 자동화, 디지털화에 따라 일자리는 얼마든지 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2016년 기준으로 일자리 1만 개 당 로봇 고용 대수가 631대(글로벌 평균 74대)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OECD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빠른 기술 변화 및 자동화의 영향으로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일자리들이 사라지고 있는데 이 일자리들은 주로 중간 수준의 임금, 중간 수준의 숙련도를 가진 일자리들이다(그림 1 참조). 지역 경제로 볼 때 중산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일자리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일자리들이 사라지는 속도는 빠르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나는 속도는 느리기 때문에(그림 2 참조) 구 산업에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일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큰 변화를 겪을 수 있는 일자리가 바로 ‘제조업 대기업(대공장) 정규직’ 이다. 이 일자리들은 1987~1989년 노동운동의 성과에 힘입어 한국 사회에서 드물게 강력한 노동조합을 가지고 있다. 그 덕
분에, 과정마다 어려움은 있었지만 어쨌든 꾸준히 임금단체협상을 해 온 결과로 제조업 대기업 노동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높은 수준의 임금(그림 3 참조)과 직원복지를 누리게 됐다.
특히 지방 소도시에서 제조업 대기업은 대체로 그 지역 내에서 비교 대상이 없을 만큼 독보적으로 고용안정성과 고임금을 갖춘 일자리다. 그 중에서도 정규직 노동자들은 지역의 중산층을 형성한다. 같은 기간 그와 같이 임단협을 통해서 임금과 복지 수준을 높여 온 일자리들이 극히 드물었고, 그 결과 임금과 근로조건이 법정 최저선 수준에 수렴돼 왔다. 때문에 대기업 정규직은 일각에서 ‘노동 귀족’, ‘비정규직 문제를 만들고 심화시키는 주범’이라는 비난을 받을 만큼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에 위치하게 됐다.
그러나 현재 가중되는 ‘일자리의 안정성’ 혼란에서 이 일자리들도 예외가 아니다. 고용 및 산업위기를 겪고 있는 지역의 조선업, 자동차 산업이 바로 그 ‘제조업 대기업 정규직’들이 종사하는 대표적인 산업이다. 그동안 정규직과 비정규직, 혹은 원청과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 간에 임금과 고용안정성의 차이를 벌리는 식으로 산업 내부에서는 고용유연성이 높아져 오기는 했지만 ‘정규직’의 안정성은 지켜져 온 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역시 담보할 수 없다. 2018년 5월 군산 한국GM자동차 공장의 폐쇄는 그런 면에서 상징적인 사건이다. 아무리 경영 상황에 대한 경고가 계속돼 왔어도 군산 지역에서는 “국가 기간산업인 자동차 산업, 전라도 지역의 대표적인 산업시설인 군산 GM 공장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했다. 그럼에도 공장 폐쇄의 날은 오고야 말았다. 2017년 현대중공업 군산 조선소가 폐쇄된 영향까지 겹쳐서 군산은 ‘쇠락도시’(rust-belt city)화를 걱정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런 상황들을 종합해 볼 때, 지금 한국 사회가 제대로 살펴봐야 할 것은 ‘가장 안정적인 일자리’들이다. 이 일자리들이 무너지면 지역 경제, 특히 지방 소도시들의 경제는 급격히 쇠락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이 일자리들의 안정성이 달라진다면 한국 사회의 산업, 고용, 교육의 정책의 기조가 모두 수정돼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또한, 그런 안정적인 일자리가 무너지기 전에, 혹은 고용위기가 도래했어도 ‘쇠락도시’화는 막기 위해서 취해야 할 대응전략 및 전환 프로세스에 대해 더 늦기 전에 구체적으로 준비해야 할 때다.
2. 연구 목적
산업 쇠퇴의 위험이 있는 도시들이 ‘쇠락도시’화 하기 전에 전환적인 시도를 할 수 있도록 고용위기 대응 체계 구축 및 장기적 도시 전환 프로세스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연구의 목적은 산업 쇠퇴의 위험이 있는 도시들이 ‘쇠락도시’화 하기 전에 전환적인 시도를 할 수 있도록 고용위기 대응 체계 구축 및 장기적 도시 전환 프로세스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지역별로 ‘산업 쇠퇴의 위험’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해 볼 필요가 있다. 각 도시의 주체들이 위기를 인지해야 대응 및 전환의 필요성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제조업 대기업’에 대한 고용 의존도가 높은 도시들은 전통적으로 안정적 일자리 비율이 높은 지역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구체적인 고용위기 시그널을 감지하기 전까지는 대응 체계를 마련하거나 도시 전환을 꾀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연구는 먼저 ‘제조업 대기업’ 고용 의존도가 높은 지역들을 중심으로 고용위기의 위험도가 얼마나 존재하는지 따져 볼 것이다.
또한, 고용위기 대응 또는 도시 전환의 시도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구 산업에서 종사하던 사람들의 동의가 필수적이다. 지금의 일자리를 잃으면 비슷한 수준의 일자리를 찾을 가능성이 낮고, 삶의 안정성이 떨어질 가능성은 높은 노동자라면 일자리를 위협하는 어떤 변화에도 저항할 수밖에 없다. 장기적으로 그 지역의 경제와 환경을 위해 유익한 변화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런 저항이 있는 상황에서는 산업의 쇠퇴, 고용위기 가능성에 대한 시그널이 사전에 감지되더라도 전환의 시도가 이뤄지기 어렵다. 변화의 적기를 놓치고 모든 절망적인 상황이 도래할 때까지 전환의 시도를 유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노동자들의 삶을 지탱해 주고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해주는 환경이 존재하는지 여부는 고용위기 대응 및 도시 전환의 프로세스를 위한 전제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이 연구에서는 그 구체적인 조건들을 탐색해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쇠퇴하는 구 산업을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들이 생겨나는 신산업 중심 도시, 청년 중심 도시로의 전환을 이룬 사례들이 드물지만 존재한다. 이 연구는 그런 사례들의 공통점을 통해서 전환을 시도하려는 도시들이 참고할 만한 시사점을 도출하고자 한다.
3. 연구 방법 및 이론
가. 지역별 고용위기 시그널 분석
현재 고용위기를 맞은 거제, 통영, 군산 등의 지역들이 조선업, 자동차산업 등 특정 산업에 대한 고용의존도가 높은 지역이다 보니, 이후의 고용위기 가능성도 주요 산업 및 대표 기업들의 경쟁력을 근거로 살펴보려는 노력들이 많다. 그러나 이 연구에서는 그와 같이 각 산업 및 기업의 경쟁력 평가는 포함하지 않는다. 각 지역(시·군·자치구 단위)의 관점에서, ‘제조업 대기업’을 중심으로 고용위기 가능성과 그에 따른 지역의 취약성을 측정해 보려 했다. 그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산업 및 기업의 경쟁력은 유지되더라도 고용 안정성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역 차원의 대응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지역 단위로 위험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연구에서는 지역별 고용위기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는 8가지 통계지표를 선정, 이를 웹지도 상에 GIS(Geographic Information System) 방식으로 표기함으로써 여러 지표의 위험도를 중첩해서 볼 수 있도록 했다. 전반적으로 고용위기 위험이 높은 지역을 도출해 보기 위한 것이다.
다만 지도상에서 8가지 통계지표를 겹쳐서 보여주는 것이 새로운 지수(Index)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각 통계지표에 가중치를 부여하거나 연관성(co-relation)을 분석하는 것은 이 연구의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에 최대한 각 정보들이 동일한 정도로 지도에 반영되도록 했다.
나. 정부 고용위기 대응 방식 평가
현재 고용위기와 관련해서 정부가 하는 일은 ‘고용위기지역’, ‘산업위기대응 특별지역’ 등으로 지정하고 그 매뉴얼에 따라 지원하는 것이 거의 유일하다. 이와 같은 방식이 어떤 효과 및 한계가 있는지를 2018년 군산의 사례를 통해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
다. 구산업 노동자 안정성 요건 분석
한 지역에서 대량 해고가 발생하면 해당 노동자 및 가족구성원은 물론 지역 공동체의 경제 및 건강성에도 큰 영향이 미친다. 이런 상황에서 비교적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노동자들과 그렇지 못 한 노동자들의 차이를 알아보기 위해 이 연구에서는 한국(군산), 호주(애들레이드), 스웨덴(말뫼) 3개국 도시에서 대량 해고를 경험한 노동자들을 심층 인터뷰했다. 이들이 경험한 위기 상황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고, 해당 사회에 존재하는 안전망의 차이를 비교해 봄으로써 전환의 상황에서 요구되는 안정성의 요건을 도출해 볼 것이다.
라. 도시 전환 성공 요건 분석
이 연구에서는 산업 전환에 성공한 사례로 스웨덴 말뫼, 스페인 빌바오, 프랑스 릴의 세 도시를 탐방, 조사했다. 모두 조선업, 탄광업 등 구산업의 쇠퇴기를 거치면서 ‘쇠락도시’화의 위험을 겪었으나 성공적으로 극복한 지역이다.
이 지역들의 특징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참고한 것은 인구유입이 일자리 창출을 이끈다는 ‘공급 이론’ 이다. 지역의 인구유입과 일자리 창출의 상관관계를 두고 기존에는 “일자리가 생기면 인구가 유입된다.”는 ‘수요 이론’(사람이 일자리를 따른다)에 따른 시도가 많았다. 지역에 대공장, 대기업 본사, 공기업 등을 유치하려 하는 현재 여러 지역의 시도 역시 이 맥락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인구가 유입되면 일자리가 생겨난다.”는 ‘공급 이론’(일자리가 사람을 따른다)을 검증하려는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지역에 ‘사람들이 계속 살아가고 싶게 만드는’ 환경이 조성될 경우 인구가 유입되고, 그에 따라서 일자리는 자연스럽게 창출된다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고영우(2016)는 한국의 229개 시·군·자치구 단위의 패널 자료를 구축, 지역별 인구이동이 일자리 변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실증 분석한 결과 공급이론이 작동함을 검증했다.
이에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말뫼, 빌바오, 릴의 사례가 ‘공급 이론’에 부합하는지,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지방 정부가 시도한 정책들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마. 대응 모델 제시
이상과 같은 과정을 통해서 이 연구는 두 가지 모델을 제시한다. 하나는 해고 노동자에 대한 대응 모델이다. 앞서 현 정부의 대응 방식의 한계 분석 결과, 해외 사례들에서 찾은 시사점을 반영해서 보다 효과적으로 작동될 수 있는 대응모델을 제시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도시 전환의 프로세스 모델이다. 역시 해외 사례들에서 찾은 공통점, 시사점을 통해서 한국의 각 지역 단위로 적용해 볼 수 있는 전환 프로세스의 기본 골격을 제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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