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동대문 젠트리피케이션: 작가 노트
박은선 (리슨투더시티)
도시가 기록하지 않거나 주목하지 않은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 또한 도시의 역사는 누구를 위주로 기술되는지 주목해야 한다.
뉴타운 키즈와 DDP
서울은 기억상실증의 도시이다. 도시 공동 장소의 기억을 삭제하는 것을 넘어, 그러한 공간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도시이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파크(DDP)가 원래 동대문운동장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20대는 거의 없다. 청계천이 원래 고가도로였다는 사실을, 한강이 백사장이 있고 물이 맑아 수영할 수 있는 강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 문제는 한강 변이나 청계천이 콘크리트여서 불편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별로 없다는 점이다. 콘크리트 건물에서 태어나 아파트 단지 내 조경을 자연 삼아 자란 세대에게 도시 과거와 자연을 기억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600년 된 도시의 역사를 일일이 기억하고 암기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우리 세대나 다음 세대가 동대문 운동장이 어떤 공간이었는지, 청계천이 어떤 공간이었는지 기억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도시 행정가들과 시민들이 왜 청계천 개발과 DDP라는 선택을 했는지, 과연 그 선택이 지속가능했는지에 대해서는 질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결정 과정에서 우리가, 도시가 기록하지 않거나 주목하지 않은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 함께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도시의 역사는 누구를 위주로 기술되는지도 주목해야 한다. 청계천과 동대문은 이들 지역 노점상의 이야기 및 청계천 복원 문제를 제대로 기록하거나 공론화할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짧은 시간에 개발되었으며, 소수자들의 의견과 싸움 또한 공식 역사에 담기지 못했다. 리슨투더시티가 청계천 동대문 노점상 젠트리피케이션 지도 만들기, 청계천 투어와 재난지도 프로젝트를 하게 된 배경은 여기에 있다. 리슨투더시티에서 관심 두는 부분은 토목개발 중심 도시 패러다임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이해하고, 그 시스템을 지속가능한 시스템으로 전환할 수 있는 문화를 구축하는 일이다.
서울은 뉴타운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2003년 이후로 급격히 변했다. 2005년 기준으로 1950년 한국 전쟁 이전의 건물은 전국에 3%가 채 남지 않았고 (Gelézeau 2007), 2002년-2005년 단 3년 사이에 서울의 주거지역 면적 305.74㎢의 약 7.5%에 달하는 23.16㎢가 재개발 재건축 정비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장남종 et al. 2010). 서울의 오래된 동네들이 아파트로 대체되는 사이, 아파트 재개발을 피해간 장소들 — 이태원, 망원동, 서촌, 이화동, 익선동 등 — 은 오래된 장소의 미학을 이용하는 카페가 들어서기 좋은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최근 이러한 현상과 관련해서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용어를 탈 맥락적으로 쓰는 경우가 있는데, 2003년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뉴타운 사업과, 서울의 지가 상승, 상가임대차 문제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단순히 주거 재개발과 상가 임대차 문제로 나눌 수 없다. 우리나라처럼 도시 곳곳의 큰 면적을 국가와 기업이 주도하여 깨끗하게 철거하고 새 집합 주택을 짓는 현상은 세계적으로 특이한 현상으로, 영미권에서 수입된 젠트리피케이션 개념과 일본에서 도입된 재개발 개념을 한국 도시 상황에서 1:1 대응해서 쓰기는 곤란하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개념의 전면 재개발은 유럽에서는 1853년 오스만의 파리 재건의 사례 이후에는 거의 없었다) 예를 들어 용산 참사는 재개발 사업이지만 그때 투쟁했던 철거민들은 대부분 상가 세입자였다. 또한 두리반이나 카페 마리도 도시 정비법에 의한 재개발 사업이었지만 상가 세입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운동이었다.
우리나라처럼 부동산을 통한 착취가 지속적,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곳은 지리학자 제이슨 핵워스와 닐 스미스가 주장한 대로 1, 2, 3차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본다. 한국 도시들에서는 핵워스와 스미스가 구분하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세가지 물결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 물결은 고립된 작은 지역에 국한되어 일어나는 현상을, 두 번째 물결은 거주지역과 연계되어 일어나는 현상을, 예를 들어 자본이 소호와 로어이스트사이드로 침입하여 주거 지역이 상업지역으로 바뀌는 것을 가리킨다. 세 번째 물결은 큰 자본과 연계되어, 개발자들이 국가의 도움을 받아 동네 전체를 재개발하는 것을 뜻한다 (Hackworth and Smith 2001).
청계천 개발(2003–2005)과 DDP의 건립(2007–2014)은 위의 젠트리피케이션 모델의 3차 모델에 해당할 것이다. 이 두 사업은 단순히 그 장소만을 개발하는 사업이 아니라 주변 부동산 개발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뉴타운 특별법을 만들고 이끌어 갔던 정치인들에 의해 기획된 사업들이며, 부동산 개발 사업을 지지했던 사회 분위기의 정점에서 시작되었다는 맥락을 염두에 둬야 한다. 2004–2008년 서울시 평균 평균지가상승률이 7.6%이었던 반면 뉴타운 지구는 적게는 48%에서 많게는 258%까지 뛰었다. 그렇다면 뉴타운은 정말 헌 집 주면 새집 주는 사업이었을까?
2015년 서울시 주택 보급률은 97.5%이지만 자가주택 보유율 평균은 42.1%에 지나지 않는다. 2005년 자가주택보유율인 44.6%보다 낮아졌다. 즉 뉴타운 사업으로 주택은 늘어났으나, 이미 집이 있는 사람들이 한 채 더 갖게 된 셈이다. 원래 자기 동네에 살던 사람이 뉴타운 이후 재정착 한 경우는 10% 미만이다 (국토교통부 2016). 재개발지역으로 선정된 지역의 인구의 70%는 세입자였지만 임대주택 건립비율(총 건립세대수의 17%)이 낮아 원주민 재정착을 위한 세입자 대책은 매우 미비했다 (이주원 2016).
청계천과 DDP도 마찬가지로 부동산 부양을 목적으로 하는 대규모 개발사업이었다. 청계천 주변의 지가는 가파르게 상승해 청계천으로부터 1m 가까워질수록 필지는 1㎡당 약 28~36만 원의 프리미엄을 가졌다. 또한 시청에 제일 가까운 1공구는 2, 3공구보다 단위면적당 약 14~29% 높은 지가를 형성했다 (장유경, 황기연 2013). DDP 주변의 부동산 가격도 상승했지만 정작 청계천과 동대문의 상권을 만들었던 6만이 넘는 상인들, 천여 명이 넘는 노점상들과 상인들은 주변으로 밀려가거나 강제 이주당했고, 1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정착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청계천의 지속 불가능한 개발
청계천 사업은 추진 당시 지속가능한 녹색성장으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사업이 정말 그러했는지, 무엇을 성취했는지 살펴본다면 어떨까. 콜로라도 대학교 자연재해센터에서는 밀레티가 <디자인된 재앙>에서 제시한 원칙을 각색해서 지속가능성의 여섯 가지 원칙을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Monday 2001).
-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인다
- 지역경제를 활성화한다
- 사회적 동시대적 평등을 보장한다
- 환경의 질을 높인다
- 재난 회복력을 증진하고 나아가 재난을 예방하도록 한다
- 도시 결정 과정에서 동의의 과정을 구축하고 참여를 보장한다
청계천 복원사업은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인 2003년 7월 1일부터 2005년 9월 30일까지 2년 3개월간 진행된 공사이다. 총사업비 3,867억 원, 투입 누적인원 69만4000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토목 사업이다. 당시 청계천 복원 명분은 고가 철거로 안전성 확보, 환경친화적 도심 공간 조성, 역사성과 문화성 회복, 강남·북 균형 발전 등이었다. 예컨대 청계천 복원 후 청계천으로부터 거리가 100m 가까울수록 온도가 0.39℃ 하락하였다 (김경태, 송재민 2015). 도시 열섬 현상을 완화했다는 점에서 청계천 사업이 환경적 측면으로 긍정적 역할을 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도시 재난 회복력과 방재 능력은 취약해졌다. 청계천은 불투수율이 70%가 넘는 하천으로 건강한 자연하천이 아니라 수돗물을 흘려보내는 거대한 어항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 문제인데, 청계천 주변의 하수가 모두 청계천으로 유입되고, 비점 오염원이 모두 청계천으로 흘러 들어가게끔 설계되어 홍수해 위험도 크고, 시민이 고립되는 사고가 매해 10건 정도 발생하고 있다. 매번 주변 하수가 흘러들다 보니 대장균도 기준치 50배가 넘는 상황이며, 가끔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더 큰 문제는 비민주적인 프로젝트 과정이었다. 지속가능성의 위기는 거버넌스의 위기에서 시작된다고도 한다. (Lange et al. 2013) 서울시는 천 번 이상 상인들을 만났다고 했지만, 상인 대표회를 둘로 나눠 서울시에 우호적인 측하고만 협상을 진행했으며, 그나마 노점상인들은 만나주지도 않았다 (최인기, 저자와의 인터뷰, 2017). 조명래는 “복원과정이 비민주적으로 꾸려진 결과, 서울시가 선호하는 관점이 지배하면서 시민사회가 제기한 대안적 관점들이 철저히 배제된 결과를 온전히 보여주고 있다 (조명래, 배재호 2005)”고 지적했다. 서울시는 청계천 상인들에게 가든파이브로의 이주를 약속하고 복원공사를 진행했다. 2007년 서울시는 청계천 상인 6만여 명 중 이주 의사가 있는 6097명에게 특별분양 자격을 줬지만, 약속보다 분양가가 훨씬 높게 책정된 가든파이브에 실제로 입주한 상인은 1028명에 불과했다. 이 중 2015년 가든파이브에서 장사하는 사람은 100여 명뿐이었다.
당시 주로 청계 7–8가에서 장사 하던 천여 명 노점상인들은 복원 계획의 논의에 초대조차 받지 못했고 서울시는 2003년 11월30일 새벽 공권력 5,000여 명과 공무원, 용역 최소 3,000명 이상을 투입하여 천여 개가 넘는 노점철거를 강행했다. 노점상인들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청계천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2004년 1월 동대문운동장 주차장 자리에 이주했다. 하지만 2008년 DDP 사업 때문에 어렵게 자리 잡은 운동장 주차장 자리에서 다시, 그중에서도 일부만 현재 풍물시장 자리로 강제이주하게 되었다. (박경리 2004)
역사문화 복원에 대해서도 원래 목적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 청계천 복원 제1의 목적은 현재 장충단 공원에 방치된 ‘수표교’를 다시 청계천에 돌려놓는 것이었다. 그러나 설계 오류로 인해서 현 청계천 폭이 너무 좁아 다리를 되돌릴 방법이 없다. 청계천 사업 완공이 1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수표교 복원은 미지수이다. 청계천 복원을 적극적으로 찬성했던 소설가 박경리는 청계천 공사가 졸속으로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서 “지금의 형편을 바라보면서 미력이나마 보태게 된 내 처지가 한탄스럽다. 발등을 찧고 싶을 만치 후회와 분노를 느낀다. 차라리 그냥 두었더라면 훗날 슬기로운 인물이 나타나 청계천을 명실공히 복원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몇 년은 더 벌어 먹고살았을 텐데. 노점상인들이 안타깝다. (박경리 2004)” 라고 동아일보에 특별기고를 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파크의 지속 불가능한 개발
2007년 디자인서울 계획 발표와 함께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고 디자인파크를 건립한다는 계획이 발표 되었다. 그러나 894명이 넘는 노점상인들, 청계천 개발 당시 서울시에 의해 동대문운동장 한쪽 주차장 자리에 강제이주된 노점상들은 이번에도 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우리를 시민으로 보지 않았어요. 공무원들한테 우리는 ‘게네들’이에요. 사람이 아니라고 취급받았는데 어떻게 공청회에 초대를 받겠어요 (동대문지역 노점상 우종숙, 저자와의 인터뷰, 2017).” 시민사회는 노점상을 그대로 두고, 운동장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쓰자고 건의했으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고, 양인수 씨 등이 동대문운동장 조명탑에서 고공시위를 했지만 결국 2008년과 2009년에 걸쳐 동대문운동장의 노점상들은 강제 철거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상권이 형성되지 않은 숭인동 풍물시장에 이주하게 되었고, 풍물시장에서 장사가 잘 안되는 바람에 아예 접어버린 경우도 많았다.
근대문화재 전문가들은 동대문운동장 자체가 근대문화재로 지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최초 근대식 스포츠 시설인 데다, 수많은 국가 행사를 했던 시설이기 때문이다. 군부 독재 시절에는 아마야구, 축구경기를 보려는 사람들로 동대문운동장이 북적댔다고 한다. 당시 추억이 많았던 세대들도 운동장과 야구장을 철거하는 데 반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시민사회나 불시에 삶터를 다시 잃게 된 노점상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채로 공사가 강행되었다. 터파기 공사를 시작하자, 큰 규모의 하도감터 등 수많은 조선시대 유구를 발견하게 되었다. 당시 문화재계에서는 이 터 자체가 국보급이라고 하였지만, 공사는 재개되었고 유물은 현재 공원 중간에 어설프게 재현되어있다.
DDP는 자하 하디드가 외국 건축가라는 이유로, 주변의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핵심적인 문제는 큰 건물 내부 프로그램의 공공성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건설비 총 4800억 원, 토지 구입비 까지 합하면 1조 원이 훌쩍 넘는 사업이지만 그만한 경제적 효과를 가져왔는지 결과는 부정적이다. DDP 운영비는 2014년 300억이 넘었는데,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공공을 위한 디자인 전시를 직접 기획하기보다는 대관 전시를 주로 해왔고 또는 대기업에 임대를 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냈다. DDP는 디자인장터(3523㎡ㆍ약 1065평)와 살림터(2959㎡ㆍ약 895평)를 각각 GS리테일, 디자인하우스에 3년 계약으로 위탁해 운영했다. DDP보다 몇 년 앞서 완공된 중국 광저우의 자하 하디드 오페라하우스 건물도 같은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필자는 그 건물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연구하려고 직접 광저우에 방문했는데, DDP와 마찬가지로 건물은 크지만 운영할 프로그램은 부족한 실정이었다. 광저우의 경우는 건물을 통째로 사기업에 대관하였고 지금은 歌剧院(오페라 하우스)이 아니라 大剧院(대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어 주로 어린이 오페라를 하고 있었다 (광저우대극원 프로그램 매니저 넬리 리우 및 문화연구자 얀한 펭, 저자와의 인터뷰, 2013). 더욱이 운영자금이 부족해 건물은 빠르게 부식되고 있었다.
최초 근대 운동시설인 동대문운동장, 조선시대의 하도감터, 2007년 이전 일본 관광객을 위한 노점상 가이드북이 나올 정도로 유명했던 동대문의 노점상거리 대신 서울이 얻은 거대한 건물은 그 내용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난관에 빠지고 말았다. 서울시는 심지어 자신들이 지워버린 노점상의 역사를 복원시켰다. 2016년과 2017년 두 차례 밤도깨비 야시장이라는 프로그램을 열어 참가자들에게 하루 임대료 15만 원을 받고 200여 푸드트럭을 DDP에 일시적으로 입점시켰다. 이 장면을 보고 이 지역에서 IMF 이후로 줄곧 포장마차를 하다 DDP 건립 과정에서 한가한 길가로 이주하게 된 우종숙씨는 분노했다고 한다. “서울시는 분명 만약에 DDP에 노점상을 도입하면 우리를 제일 먼저 입점시키겠다 했어요. 그런데 작년에 푸드트럭 200여 대가 DDP 안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제가 미친 사람처럼 두 시간 넘게 항의했어요. 우리가 장사하던 곳을 양보해서 줬는데, 새로운 푸드 트럭은 되고 우리는 안 된다는 게 말이나 되나요?”
노점상이 단순히 도로 불법점거자가 아니라, 인구를 유입하고 거리를 활기차게 하는 중요한 도시 문화 요소라는 사실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줄곧 무시 당해왔다. 서울시는 필요에 따라 그 사실을 부정하다가 지금은 수용하는 이율배반에 봉착했다. 적은 비용으로 큰 공간을 메우는 방법을 DDP는 과연 찾을 수 있을까?
평범한 사람들의 도시 역사
이번 워크숍은 도시의 역사 구성에 대해서 지도로 질문하는 과정이었다. 어떤 지도에도 노점상의 위치는 남아 있지 않다. 도시 거버넌스에서 노점상은 오랜 시간 동안 목소리가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뉴타운 개발로 낡은 마을들이 거의 사라진 지금, 노점상은 도시 골목의 정서를 유지해온 장소적 장치가 되었다. 빈민운동을 해오고 청계천에서 유년기를 보낸 최인기, 청계천에서 오랫동안 장사해온 소순관, 그리고 동대문 지역에서 장사해온 우종숙의 이야기를 듣고 세 팀으로 나누어 그들의 이야기를 지도로 표현했다. 역사는 주로 영웅을 중심으로 서술된다. 하지만 도시의 삶은 영웅적이지도 않고, 대단한 드라마가 있지도 않다.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이 마주치며 삶을 만들어가는 순간이 도시 민중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자격 없는 자’들이 각자 도시민의 권리를 이야기하고, 공공공간에 대하여 함께 논의하는 것이 도시권이다. 소홀히 다루어졌던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를 다시 발굴하고 기록하며, 그간 개발주의에 의해 삭제되었던 다양한 도시 문화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날은 지도를 통해 노점상인들의 민족지(ethnography)를 썼다면, 워크숍 둘째 날은 청계천 재난지도 구축을 하기 위해 직접 답사에 나섰다. 리슨투더시티에서 2010년부터 서울투어를 만들어 청계천 녹조투어를 해왔는데, 청계천 10km 정도를 개발하는 사업이 전국의 4대 강 600km를 개발하는 사업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이를 상기시키고자 투어를 만들었다. 시민들은 청계천 복원공사의 과정, 문화재 졸속 복원의 문제, 비가 오면 청계천 양측 우수구가 열린다는 사실, 하천 바닥이 70%가 불투수면이며 청계천 물이 수돗물인 데다 전기에 의해 물이 흐른다는 사실을 대부분 모르고 있었다. 참가자들과 함께 비가 15분에 3mm 이상 비가 내리면 자동으로 열리는 우수구의 위치를 오픈스트리트맵에 표시하고, 비상 사다리의 위치도 표시하였다. 한 참가자는 “위험한 것이면 눈에 띄게 해야 하는데 안 보이게 감춘 것이 이해하기 힘들다”고 이야기했다.
청계천 공사가 완공된 지 12년이 되었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완공된 지도 4년 차에 접어든다. 청계천 유지비는 일 년에 72억, DDP는 300억에 이른다. 비단 이 두 사업이 유지비나 공사비가 많이 들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제 DDP도 청계천도 서울시민이 풀어야 할 숙제가 되었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다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 두 장소를 시작으로 이제 서울에서 공공이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는 시대가 막을 내렸으면 한다. 도시는 부동산 가치로만 이루어진 공간이 아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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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슨투더시티는 예술가, 도시연구자, 디자이너로 구성된 예술, 디자인, 도시 콜렉티브이다. 리슨투더시티는 2009년 결성되어 현 멤버 외에도 많은 외부 협업자와 작업을 함께해 왔으며, 주로 도시의 기록되지 않는 역사와 존재들을 가시화 해왔다. 그동안 4대강 사업지인 내성천, 옥바라지 골목,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등을 통해 공간을 소유하는 권력의 관계와 공통재(the commons)에 주목해왔다. 2014년에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건립을 둘러싼 목소리를 담은 <동대문디자인파크의 은폐된 역사와 스타건축가>를 펴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