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 전공한 사람들의 작당

Sunghee Woo
Unusual Suspects Festival Seoul
10 min readNov 23, 2018

평범한 당사자들이 만들어서 비범했던 언서페 세션 후기(2) #내전공은지리구요

이 글은 언유주얼서스펙트페스티벌(이하 ‘언서페’ Unusual suspects festival)에서 열렸던 스물 일곱개의 세션 중에서 ‘평범한 당사자들이 모였기 때문에 비범했던’ 세 개의 세션에 대한 후기다. 언서페는 서로 다른 영역과 분야의 사람들끼리 만나서 주제와 형식의 제약 없이 3일동안 서울 곳곳에서 열린 대화의 장이다.

세 개의 세션인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회혁신을 위한 통번역의 역할>과 <내 전공은 지리구요>, 그리고 <WORKIDSHOP> 은 자기 삶의 문제에 대한 대화가 요청되었을 “저요!”하고 반갑게 모인 ‘평범한’ 사람들의 모임이란 공통점이 있다. 당사자들이 모여서 처음으로 자기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고(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회혁신을 위한 통번역의 역할), 이후에 같이 해 볼 수 있는 작당에 대한 아이디어를 나누기도 했으며(내 전공은 지리구요), 혼자서는 하기 어려운 실험도 함께 해 보았다(WORKIDSHOP). 각 세션이 모두 평범한 당사자들이 모였기에 비범했던, 언유주얼서스펙트페스티벌이 아니면 만나기 힘든 언유주얼한 세션들이었다. 이 세션들의 후기를 3회에 걸쳐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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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뒤의 사람들이 꺼낸 자기 이야기 — 평범한 당사자들이 만들어서 비범했던 언서페 세션 후기(1) #사회혁신을 위한 통번역의 역할

뿔뿔이 흩어졌던 지리전공자들의 만남

<내 전공은 지리구요> 세션은 이태원 보광동에 있는 작은 게스트하우스에서 열렸다. 주최자인 이영동씨는 대학을 졸업할 무렵 이 곳에서 ‘계단장’이라는 플리마켓과 ‘동동투어’라는 투어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다. 지리를 좋아해서 전공했고 지역적 특색을 살린 활동을 즐겁게 해 온 영동씨는 지금은 (지리전공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서울혁신센터라는 중간지원조직에서 일하고 있다.

세션에 참여한 사람 중에는 나처럼 지리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있고, 지리학과 인접 학문인 도시계획학이나 부동산학을 전공한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세션 제목을 보고 자석에 이끌리듯 이곳에 모였다고 했다.

이날 이야기 주제는 크게 두가지였는데, 전반부에는 지리와 관련된 자기 경험을 나누는 것(전공 소환)이었고, 공감대가 무르익었던 후반부에는 지리와 가깝기도 멀기도 한 자기 일상에서 작게라도 지리전공자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는 작업을 했다(욕망 소환).

1부 전공 소환: 지리 러버들의 커밍아웃

‘문송하다’는 세상에서 자기 전공을 살려 일하기는 쉽지 않은 터. 지리 전공자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학교에서 지리를 가르치는 교사, 환경단체에서 기업 CSR을 담당하는 사람, 교육 계발 NGO에서 일하는 사람, 마을 연구를 하는 사람, 문화도시콘텐츠 기획자가 되고 싶은 꿈을 안고 지금은 도시정보 관련 회사에 다니는 사람, 정보통신회사에서 신재생에너지나 IOT사업을 맡았던 회사원, 언서페에서 일하는 사람, 서울혁신파크에서 일하는 사람, 그리고 지리 전공자는 아니지만 보광동을 좋아하는 사람과 사회학 전공자인 나까지. 정말로 사회혁신과 관련된 여느 콘퍼런스에서는 모이기 힘든 ‘평범한’ 사람들이 지리 전공자의 모임이라는 제목만 보고 ‘내 얘기’라며 모여들었다.

먼저 자기소개와 함께 지리전공자들이 왜 지리를 전공했는지, 자기 일상에서 지리는 어떤 의미인지를 나누었는데, 들으면서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여기 있는) 지리 전공자들은 지리를 사랑한다는 기운이 뿜뿜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리 전공자들이 유난히 전공에 애정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런 주제로 이야기를 하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의 전공을 어느 정도 좋아하는 나에게도 여기 모인 지리 전공자들의 지리에 대한 추억과 사랑은 조금 각별해보였다.

지리전공자들이 가져온 지리 관련 애장템들 ⓒ듣는연구소

이들의 이야기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는 고등학교나 대학 지리 수업에서 좋은 경험을 했다. 학창시절부터 지리 과목을 좋아했기 때문에 지리학과 진학을 선택했거나, 대학에서 수강한 지리 수업에서 인생관이 바뀔만큼 좋은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나의 고등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선생님도 지리 선생님이었다!)

지금 지리교사인 문경 씨는 고등학교때 지리 선생님을 너무 좋아해서 지리교육과에 진학해 그 선생님의 후배가 되었고, 회사원인 준현씨와 교육 계발 일을 하는 신혜씨도 어려서부터 지리과목을 좋아했다. 지은씨는 고등학교 때 팬이었던 지리 선생님이 지리에 대한 애정이 넘치셔서 ‘사회’과목 교과서 앞에 ‘지리’라는 스티커를 붙여서 ‘사회와 지리’로 만들어주셨다는 일화와 함께 직접 교과서를 들고 왔다.

도시계획학을 전공한 단비씨도 학창시절 지리과목을 좋아했고 대학에서의 경험도 좋았기 때문에 다시 선택해도 같은 전공을 택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수업에서 도시 문제를 찾아서 대안을 만드는 과제를 해 본 후, 살고 있는 강원도에 젊은이들을 위한 문화 기반이 왜 안 되어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도시문화에 관심이 생겼다고 했다. 또, 경영학과에서 지리학으로 편입한 호연씨는 사회정의와 공간문제라는 수업을 듣고 사회를 평등하게 만드는 데 공간으로 기여할 수 있겠다는 새로운 시야를 얻게 되었다.

이들 이야기에서 두드러진 두 번째 공통점은 현재 지리와 관련없는 일상을 살아가더라도 언제 어디서든 ‘지리학의 렌즈’를 장착하고 세상과 공간을 보고 있더라는 것이다.

지리학을 하고나서 세상을 보는게 달라지더라고요. 교통이 이렇게 됐고, 시가지가 보이고, 이런 문화를 갖게 됐고. 종점에 내려서 야경 보이는 것도 도시가 형성된 배경이 다 보이고, 골목 한 가운데 떨어뜨려 놔도 어디든 여행지가 되고. 새로운 곳이 보이고. 지리학을 한 게 밥벌이는 안되더라도 나에게 축복이구나, 삶이 재밌어졌어요. (호연)

영동씨도 지금 경관을 보고 과거 경관을 유추하는 ‘경관의 이해’라는 수업을 너무나 재미있게 들었고, 그 후에는 어느 곳에 가든지 이 지역의 과거는 어땠을까를 유추해보게 된다고 했다. 그가 일하는 서울혁신파크는 과거 질병관리본부 건물을 리모델링해 쓰고 있는데, 예전에 의약품 실험을 하던 장소에서 지금은 혁신가들이 사회혁신을 ‘실험’하는 오피스로 쓰고 있다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진다고 했다.

참여자들은 전공과 관련이 없는 일을 하고 있더라도 지리학의 렌즈로 일을 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러한 렌즈가 일에서 유용하게 작용하기도 한다고 했다. 환경단체에서 CSR을 담당하는 지은씨도 일상 업무에서 지리학과 연관성을 발견하곤 한다.

보잉 사는 하늘에 미안해서인지 기후에, 도요타는 농사관련한 사회공헌을 해요. 사람들은 연관성을 찾기 어렵겠지만 저는 그게 전공과 관련해서 잘 보여요. (지은)

정보통신 기업에서 일하는 준현씨도 “신재생에너지 사업을 할 때 전북지역에 태양광을 많이 설치하는 이유는 일조량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안다.”고 하기도 하고, “빅데이터 사업을 맡았을 때 지자체에서 관광객들이 밀집한 마을에서 주민들의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관광객 동선 분석을 해달라는 의뢰를 받은 적이 있다. 도시재생에서 발생하는 문제도 과학적으로 접근해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며 지리학의 렌즈가 유용함을 느낀다고 했다.

지리 교사 문경씨는 학생들을 공간에 많이 데리고 간다. 을지로 세운상가에 갔을 때 처음에 “빨리 재개발이 이뤄져야겠다”고 하던 아이들이 주변을 둘러보고 상인들과 대화를 나눈 후에 “여기는 부수면 안 될 것 같아요.”라고 생각이 바뀌는 모습을 보고, 아이들에게 지리와 관련하여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더불어 피상적인 직업관을 가진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다양한 미래상을 보여줄 수 있을지 아이디어를 얻고 싶어서, 새로운 영역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고 싶은 마음도 꺼냈다.

2부 욕망 소환: Geography for good society

이 모임의 기획이 애초에 한 번의 모임을 끝나지 않을 거란 걸, 2부에 접어들면서 알았다.

모임을 개최한 영동씨와 친구들은 이렇게 지리학을 사랑하는 이들이 일상 업무에서는 지리 전공을 활용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지리를 활용해 자기 삶과 사회를 바꾸는 작은 일이라도 일상에서 하기위한 ‘작당’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래서 2부에는 각자 자신이 느끼는 삶의 불편을 꺼내놓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side projects를 기획하는 브레인스토밍을 했다.

욕망을 소환하는 과정 ⓒ씨닷

참여자들이 꺼내놓은 일상의 불편함으로 환경문제, 경쟁적인 문화, 도시재생 등이 가장 많이 언급됐다. ‘1회용품을 쓰는 것이 너무 싫지만 직장에서 불가피하게 쓰게되는 문제를 해소할 순 없을까’, ‘하루의 업무 스트레스를 퇴근길 따릉이 타면서 해소하는데, 따릉이를 함께 더 재밌게 타는 방법은 없을까’, ‘아파트를 너무 많이 지어서 이웃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들고 있는데, 아파트에 살지 않고 잘 사는 방법은 없을까’, ‘도시재생으로 관광객들이 붐비는 마을이 늘어났는데 주민들의 고통을 줄일 방법은 없을까’ 등..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 볼 수 있는 아이디어들도 가볍게 이야기 나누었는데, 자세한 계획은 향후 모임에서 발전시켜 보기로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느슨하게 만나는 모임으로 발전할 계획이고, 다음 모임은 12월 8일 토요일에 열린다고 하니 관심있는 분은 누구든지 참여의 문을 두드려보시라. 주변에 지리 전공자가 떠오른다면 공유해도 좋고, 지리 전공자가 아니어도 환영한다고한다.

내전공은 지리구요 모임은 자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말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는 모임이면서, 동시에 본업이 있는 만큼 각자의 속도에 맞춰 움직이는 커뮤니티예요. (영동)

내전공은 지리구요 보광동 투어 ⓒ 씨닷

참여자들의 후기를 들어보자.

저는 요즘 동료를 찾고싶다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들어요. 환경문제에 함께 관심갖던 모임이 있었는데 요즘 만나지 못하고 있거든요. 서로를 채찍질해주는 동료가 있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느슨하든 쫀쫀하든. 청년들이 만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힘이 있어요. (최지)

지리가 제 삶에 침잠해 있었던 것 같은데, 오늘 다시 확 꺼내놓은 느낌이예요. 각자 분야에서도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걸, 지리학이든 뭐든 통해서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이 생겼어요. (호연)

졸업하고 나이 들면서 점점 나한테 편한 사람이나 비슷한 얘길 나누는 사람만 만나게 되는데, 오늘 다양한 사람들 만나면서 서로 가진 생각을 나눠서 의미있었어요. (준현)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대화가 끝나고 3부에는 보광동 일대 골목을 투어했다. 이태원 사원부터 도깨비시장, 미용실 거리를 걸으며 ‘지리학 렌즈를 장착하고’ 보광동의 과거 이야기를 들었다. 마지막에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보광동 비밀의 전망 명소에 도착했을 때, 노을이 그림같이 지는 것을 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와, 전망이 정말 지리네요!”

내 전공은 지리구요 블로그 : https://blog.naver.com/jiriguyo2018

문의: jiriguyo20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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