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밖으로 도망친 100세 영화

Jay Kim
ixi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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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min readJan 4, 2021

왜 영화는 ‘xR’ 쪽으로 손을 뻗게 되었는가?

#1. 영화의 진화방향, 그리고 XR

영화는 끊임없이 예술과 기술 분야의 성과들을 흡수해가며 발전해왔다. 최초의 영화는 아무 소리도 재생되지 않는 스탠다드 비율(4:3) 흑백 이미지의 연속에 불과했지만 한 세기에 걸친 이미지 처리와 사운드 기술 발전에 힘입어 지금 우리가 보는 영화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영화의 진화 속도와 범위는 무척 빠르고 넓었지만 그 방향성은 일관됐다. 오직 관객들을 이야기 속으로 더욱 몰입할 수 있게끔 하는 것. 영화를 현실의 삶 및 그 형식과 최대한 유사하도록 만듦으로써 관객들이 영화를 보는 그 순간만이라도 그 이야기가 ‘가상’이 아니라 ‘진짜’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 지난 125년 동안의 일관된 흐름이었다.

우리는 세상을 흑백이 아닌 컬러로 인식하기에 컬러 영화가 일반화 됐고, 우리의 세상은 전면에서만 소리가 들려오지 않고 사방에서 소리가 들려오기에 다채널 사운드 시스템이 구축됐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우리의 시야는 네모난 스크린의 영역을 넘어 전방향으로 열려있고 현실의 삶에는 프레임이 없다. 또한 우리는 만지고 맛보며 다양한 감각을 느끼면서 살고 있다. 더 나아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은 우연과 복잡함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에 ‘실시간’으로 반응하고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XR은 스크린의 확장, 오감의 구현, 그리고 상호작용을 가능케 하는 기술이다. 그렇다면 영화가 지금의 총천연색 초고화질 멀티채널 사운드 대형 스크린에서 머무르지 않고 xR 기술의 발전을 흡수하고 싶을 것이라는 욕망 역시 타당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Hunger in Los Angeles, 2012

#2. XR을 점점 더 주목하는 세계 영화제들

2012년 1월 미국 선댄스 영화제 뉴프론티어 섹션에서 오큘러스 리프트 시제품으로 ‘Hunger in Los Angeles (Emblematic 제작)’가 시연된 이래로 십년 가까이 흐른 지금, 전 세계 영화제에서 xR 콘텐츠를 만나보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xR 작품을 다루는 영화제의 수가 늘어나기도 했지만 XR이 단순히 영화제 흥행을 위한 관객 이벤트 정도로 치부 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 더 주목할만한 변화이다. 오히려 영화제 자체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낼 수 있는 수단으로 xR을 주요 부문으로 다루는 영화제들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이미 세계 3대 영화제인 칸, 베니스, 베를린 모두 xR를 주제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그 중 베를린 영화제는 ‘VRNow’라는 컨퍼런스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것 외에는 아직 소극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칸과 베니스의 움직임은 훨씬 본격적이다.

3대 영화제의 xR 부문 포스터들 (이미지출처: 각 영화제 홈페이지)

칸 영화제의 XR 마켓 섹션인 ‘Cannes XR’은 이제 기존 칸 마켓(Marché du Film) 내에서 가장 주목받는 부문으로 취급 받을 정도로 매년 큰 폭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2020년은 코로나19로 인해 오프라인 행사가 전면 취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서 취소된 트라이베카 영화제와 공동으로 버추얼 마켓을 개최함으로써 성공적인 평가를 얻어냈다. 특히 MOR(Museum of Other Realities)에서 작품 전시를 비롯하여 축하 퍼포먼스, 피칭 프로그램, 컨퍼런스 프로그램 그리고 기념 파티까지 멋지게 성공하면서 이후 영화제들이 적극적으로 XR 플랫폼을 통해 행사를 치르는 것을 시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냈다.

MOR에서 열린 Cannes XR 모습 (출처 : Laptrinhx.com)

세계 3대 영화제 중 상대적으로 그 영향력이 축소되어 가던 베니스 영화제는 XR 부문을 ‘정식 경쟁부문’에 발빠르게 도입함으로써 규모와 권위에서 가장 앞선 XR 영화제로 거듭났다. 베니스 영화제는 우선 기존 영화제가 열리는 리도 섬 바로 옆, 과거 교도소로 사용되었던 작은 섬을 VR Island로 명명하고 별도의 축제공간을 마련했다. 또한 베니스 영화제는 기존 메이져 영화제가 사용하던 ‘프리미어 룰’을 XR에도 적용함으로써 XR 초청작을 기존 영화와 동등한 ‘작품’으로 대우함을 공표했다. 그러자 XR 크리에이터들도 베니스 영화제 초청을 목표로 작품 제작 일정을 조율하여 선정작이 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으로 반응했다.

올해 버추얼 공간에서 이루어진 영화제 이벤트 모습. 왼쪽은 MOR에서 진행된 Cannes XR 컨퍼런스. 오른쪽은 VRChat에서 진행된 Venice VR 이벤트

3대 영화제 외에도 기존 인디 영화제로 유명하던 선댄스 영화제, 트라이베카 영화제, SXSW 페스티벌이 xR 분야의 메이져 영화제로 자리잡았다. 한편 아시아에서는 부천 국제 판타스틱영화제를 비롯해서 대만의 가오슝영화제, 중국의 샌드박스 이머시브 페스티발이 XR 분야의 주요 영화제로 부상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언급하지 않은 수많은 영화제들이 매년 새로운 방식과 실험을 포함하며 xR 콘텐츠 분야의 성장을 이끌어가고 있다.

#3. 영화제에 선정되는 XR 작품들의 변화양상

xR 콘텐츠를 선보이는 영화제가 많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단지 이 매체가 새롭고 신기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해가 가면 갈수록 양적인 측면과 질적인 측면 모두에서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영화제들이 주목하는 측면이 더 크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XR 콘텐츠를 만드는 스튜디오와 작가들이 미국과 유럽 몇몇 나라에 집중되어 있었고 작품 수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완성도 보다는 ‘기획의도’에 포커스를 맞춰 작품을 선정하는 경우도 있었고 일반 관객 입장에서 어지럽거나 너무 단순한 형태의 콘텐츠가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전 세계 곳곳에서 주목할 만한 작가와 작품들이 쏟아지고 있다. 완성도 높은 360영화들이 대만을 중심으로 등장하고 있고, 작년 베니스영화제 베스트 인터랙티브상과 올해 에미상을 휩쓴 ‘The Line’, 콜린 패럴이 내레이션으로 참여한 ‘Gloomy Eyes’, 올해 Cannes XR과 베니스영화제, 뉴 이미지 페스티벌과 부천 Beyond Reality 등 많은 영화제에서 호평 받은 ‘Gravity VR’ 과 같은 작품들은 모두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만들어졌다. 나이지리아와 콜롬비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좋은 작품들과 작가들이 나오고 있다.

Gravity VR 컨셉이미지 (이미지 출처: Fabito Rychter 감독 제공)

XR 작품들의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영화제에서 선정되는 작품들의 경향성도 이를 반영하게 되었다. 우선 ‘러닝타임’의 제약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 동안 XR 작품들은 기술적인 완성도도 낮고 표현 방식에도 많은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매우 짧은 러닝타임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대부분의 컨텐츠가 10분 미만이었고 3분 정도의 길이를 가지고 있는 작품들도 영화제에서 수용했다. 그러다 보니 이 매체가 스토리텔링에 부적합하다는 인식을 갖게 만들기도 했다. 스토리텔링이 꼭 몇 분 이상이어야 가능하다는 법은 없다. 아주 짧아도 촌철살인의 유머와 인사이트를 보여주는 훌륭한 단편영화를 발견한 경험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컨셉이 우연히 짧은 러닝타임에 표현된 것이고 기획 단계에서부터 ‘짧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면 제대로 이야기를 펼쳐 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꽤 긴 러닝타임을 가진 작품들을 발견할 수 있다. 30분 내외의 작품들은 이제 흔히 볼 수 있고, 몇몇 작품은 한시간이 넘어가기도 한다. 작년 베니스 영화에 초청된 ‘Cosmos Within Us’라는 작품은 어린 시절 잃어버린 여동생에 대한 기억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러닝타임은 45분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 대해 너무 길어서 지루하다거나 힘들다거나 하는 평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감정적으로 몰입되어 눈물을 흘려 헤드셋을 벗을 때 민망해 하거나 벗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XR 작품은 러닝타임이 짧아야 한다는 편견에서 벗어나면서 xR 콘텐츠 스토리텔링으로도 관객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창작자들 사이에서 붙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번째로 형식적으로 다양한 작품들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공연예술의 특징과 형식을 도입한 작품들이 많아지고 있다. xR은 스크린을 기반으로 하는 평면적인 기존 영화와 달리 3차원의 공간을 활용할 수 있어 무대 연출의 기법을 적용하기 좋은 부분이 있고 점점 더 많은 창작자들이 이를 깨달아 가고 있다. 작년 가오슝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이탈리아 안무가 Margherita Bergamo의 작품 “Eve, Dance is an Unplaceable Place”나 올해 선댄스영화제에 초청되었던 영국 National Theatre의 “All Kinds of Limbo”는 라이브 퍼포먼스를 주된 방식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Jack VR (Baobab Studios)”, “허수아비 (한국예술종합학교 AT센터)”와 같은 이머시브 시어터 형식의 xR 작품도 큰 호평을 받았다.

세번째로 다중 관객 경험을 실험하는 작품들의 수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2019년 베니스 영화제에 가상의 버라이어티쇼 형식의 작품 “Love Seat”을 선보였던 Kiira Benjing은 올해 “Pandora X”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전 세계 곳곳에서 접속한 관객들이 가상의 올림푸스 신전에서 그리스의 여러 신들의 역할을 하며 판도라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올해 베니스 영화제 베스트 인터랙티브 상을 수상한 것도 이러한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4. 영화의 정의는 스크린 밖으로 확장된다

그 동안 XR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은연 중에 ‘XR 기기’ 중심적인 사고를 하는 경향이 있었다. 기존 영화가 극장에 가서 좌석에 앉아 맨눈으로 대형 스크린을 바라보는 경험이라면 XR은 머리에 뭔가를 뒤집어쓰고 경험해야만 하는 무언가 라는 인식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곳의 영사기가 얼마나 고화질인지 스크린 사이즈는 얼마나 큰 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기기의 발전양상과는 별개로 XR로 표현할 수 있는 스토리의 발전에 좀 더 주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xR 디스플레이 기기의 한계만 바라보고 있다가는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가능성의 영역에서 현실 영역으로 뛰쳐나가고 있는 xR 콘텐츠의 본질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크린 밖으로 도망친 100세 영화’를 영영 찾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는 100세 노인이 아니라 아직도 희망에 찬 젊은이인 것이다.

2019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Beyond Reality에서 공연과 결합된 xR 콘텐츠 시연이 이루어지는 모습

영화를 ‘스크린’을 마주보고 앉아서 극장에서 보는 문화예술 장르라고 좁게 정의하지 않는다면, 영화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화하며 우리의 시각과 청각과 이야기 세계를 점유하고 있는 오랜 친구가 될 것이다. 영화를 ‘주로 이미지와 사운드를 통해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매체’라고 정의한다면 영화제에서 xR 콘텐츠를 주목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이미 스크린 밖으로 뛰쳐나가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2부에서 계속. 2부에서는 영화제에서 점점 더 주목받고 있는 XR과 ‘라이브 퍼포먼스’와의 결합 경향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다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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