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락도시 위기에서 탈출한 도시들: 말뫼 빌바오 포틀랜드 히가시오사카

LAB2050 보고서 인사이트205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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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min readJan 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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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황세원 (LAB2050 연구실장)

거제, 통영, 군산 등 제조업 중심 도시들이 직면한 제조업 일자리 감소와 청년 인구 유출이라는 위기가 ‘쇠락도시’(rust-belt city)라는 현상으로 귀결되지 않으려면 혁신적인 전환의 전략이 필요합니다. 다행인 것은, 이런 위기는 산업사회 이후로 세계 곳곳에서 계속해서 발생해 왔고, 드물지만 이 위기를 극복하고 전환에 성공한 도시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보고서가 분석한 네 도시는 제조업 호황으로 팽창했다가 산업 쇠퇴로 급격한 축소를 경험했고, 위기 상황에서 이전의 산업과는 다른 방향의 전환을 모색해서 일정한 성과를 거뒀고, 이 과정에서 지역민 전체의 삶의 질, 도시의 미래 지속가능성까지 고민한 도시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연구에서 네 도시들의 전환 과정을 자세히 분석 결과, 유사한 시도를 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만한 공통된 특징들과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보고서에서 확인해 주세요.
보고서는 PDF(다운로드)를 통해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본 보고서는 2019년 3월 8일 LAB2050과 경남연구원이 체결한 『학술·연구 교류 협력 협약서』와 『공동연구 수행 협정서』에 의거해 두 기관이 공동으로 수행한 연구 ‘경상남도 청년도시모델 연구’의 일부를 따로 펴낸 것입니다.

1. 서론: 제조업 일자리 위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가. 똑같은 위기, 다른 해법을 찾은 도시들

최근 몇 년간 한국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서울을 제외한 지역들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임금 수준이 높은 일자리로 오랜 세월 자리매김해 온 자동차·조선 산업의 일자리들이 크게 흔들리고, 대규모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1]

단순히 개별 산업의 특성, 단위 기업들의 사정으로만 볼 수 없는 큰 흐름이 있다는 것이 진짜 문제다. 한국은 이미 제조업 부문에서의 로봇 도입 비율이 세계 최고 수준[2]이고, 이 대부분이 단순 조립 로봇[3]이다. 한국의 제조업 기업들은 단순 조립 위주의 생산직 일자리들을 빠르게 줄여왔던 것이다. 또한, 조선업 기업들은 위기를 겪을 때마다 정규직을 구조조정하고, 다시 일감을 수주하면 그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채워[4]왔다. 산업 자체의 안정성 및 지속가능성과 별개로 고용 측면에서 볼 때 ‘조선업’과 ‘안정적이고 임금 높은 일자리’라는 개념 사이의 연결고리는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8년 5월 전북 군산의 GM자동차 공장이 폐쇄된 것은 또 다른 상징적 사건이다. ‘자동차 산업은 안전하다.’, ‘자동차 공장의 일자리는 안전하다.’, ‘지역 고용을 위해 자동차 공장을 유치해야 한다.’ 등, 지역 제조업 도시들이 오래 가져 온 견고한 ‘상식’을 깨트렸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제조업, 그 중에서도 자동차와 조선업에 대한 비중이 높았던 도시들이 직면한 상황은 심각하다.[5] 안 그래도 수도권으로의 인구 집중 현상이 심각한 가운데[6] 거의 유일하게 지방 도시들을 지탱하고 있던 제조업 일자리들마저 이렇게 무너진다면 인구소멸의 위기까지 닥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에서 지방 도시들의 일자리를 위해 추진 및 실행하고 있는 정책은 위기의 원인과 현상을 충분히 반영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상생형 지역 일자리’[7] 정책의 설명을 보면, ‘광주형 일자리’[8]를 비롯해 경남, 밀양, 대구, 구미, 횡성, 군산 등에서 추진되고 있는 신규 일자리 사업이 대부분 자동차 산업, 대공장 생산직 일자리 중심이다. 여전히 이전 시대의 ‘안정적이고 임금 높은 일자리’의 상(像)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대규모의 산업 및 고용 위기를 처음 경험하는 중이어서 발상의 전환이 어려운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위기는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오랫동안 한 도시를 지탱해 오던 산업이 경쟁력을 잃어버리고, 도시의 인구가 줄어들면서 활력이 없어지는 일은 산업혁명 시대 이후로 전세계적으로 계속해서 일어났다. 탄광, 제철, 목재 산업 등으로 번성했던 도시들이 그런 경로를 걸었고, 조선업, 자동차 산업 등으로 성장했던 도시들이 1970년대 이후로 지금까지 연달아 전환기의 고통을 겪는 중이다.

이 도시들 중 상당수는 경제가 성장하고 인구가 팽창하던 시기에 건설한 도심 인프라와 건물들을 관리하지 못 해 ‘쇠락도시’(rust-belt city)의 악순환에 빠져든다. 쇠락의 분위기가 한 번 도시를 덮치면 경쟁력이 남은 기업과 인재들이 먼저 빠져나가고, 비어버린 도심은 우범지대가 되며 이 때문에 사람들은 더 빠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영국의 글래스고, 리버풀, 미국 디트로이트, 볼티모어 등이 이런 위기를 맞아 헤어 나오지 못 하고 쇠락한 대표적인 도시들이다. 태백, 사천 등 탄광 도시들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그리고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자동화, 무인화, 디지털화의 영향으로 이런 전환의 위험은 점점 더 많은 도시들 앞으로 닥쳐오고 있다.

때문에 산업 전환의 위기를 맞았으나 쇠락하지 않은 도시, 혹은 쇠락의 악순환에 빠져들 뻔했으나 초기에 탈출한 뒤 나름대로의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도시의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드물기는 하지만 실재하는 그 사례들에서 공통의 시사점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이를 찾을 수만 있다면 전환기에 접어드는 도시들이 충격을 최소화하고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대응 방안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 사례 선정 기준

이 연구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관점으로 해외 도시 사례를 선정해 살펴보고자 한다. 선정의 기준은 첫째, 제조업으로 대량의 일자리가 생겨나면서 지역 경제가 커지고 인구가 팽창한 적이 있으며 이후 산업 경쟁력 저하 등의 원인으로 축소의 위기를 겪은 도시다. 둘째, 위기를 맞이했을 때 전 도시 차원에서 이전과는 다른 대응 방안을 찾아보고, 이를 실행에 옮긴 경험이 있는 곳이다. 셋째, 이 과정에서 단지 기존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노력만이 아니라 지역민 전체의 삶의 질, 도시의 미래 지속가능성 등까지 고민한 도시다. 특히 청년 세대가 이 도시에서 지속가능하게 정주하고 일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데 대한 고민과 노력을 했던 도시 사례를 찾고자 했다.

이와 같은 기준으로 선정한 도시는 스웨덴 말뫼, 스페인 빌바오, 미국 포틀랜드, 그리고 일본의 히가시오사카(東大阪) 등 네 곳이다.

말뫼와 빌바오, 포틀랜드는 조선업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 번성에 힘입어 성장하다가 1970년대를 기점으로 쇠락을 경험했고, 여러 어려움과 시행착오 끝에 전환에 성공한 도시들이다.

[그림 1] 스웨덴과 말뫼의 인구 변화 (자료: Population Stat, EURO STAT.)

말뫼는 1970년대 초까지는 스웨덴 평균보다 높은 인구증가율을 보였으나, 조선업 위기를 겪으면서 1990년까지 인구의 급감 시기를 거친다. 그러나 전환 전략을 실행한 이후로 다시 인구가 크게 증가했으며 이 증가세는 스웨덴 평균보다 높았던 것은 물론, 유럽 전체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특히 연구개발, 금융, 사회서비스 인력 등 고학력 인재들이 주로 유입되는 양상을 보였으며(Salonen, 2015), 그 결과 말뫼 시 평균 연령이 36세로, 스웨덴 전체 인구 연령 평균인 41세보다 크게 낮은 ‘청년 도시’가 됐다(Hsiung, 2014).

[그림 2] 스페인과 빌바오의 인구 변화 (자료: Population Stat, EURO STAT.)

빌바오 역시 1980년대 초까지 스페인 평균 인구 증가 추이를 크게 상회하는 수준의 인구 증가를 경험했고, 이어서 급격히 인구가 감소하는 시기를 거친다. 이후 전환의 전략이 1단계(인프라 중심)를 지나서 2단계(가치 중심)로 접어든 2000년대 이후로는 인구가 더 감소하지 않고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1981년에 27%대였던 20~30대 인구 비중은 2001년 34%대까지 상승[9]했다.

[그림 3] 미국과 포틀랜드의 인구 변화 (자료: Population Stat, EURO STAT.)

미국 포틀랜드의 인구는 꾸준한 증가세를 보여 왔는데 미국 평균 인구 증가세보다 늘 높은 수준이었다. 포틀랜드가 1970년대에 이미 도심 공동화 현상을 겪었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일자리 8만 개가 한꺼번에 사라졌다고 할 만큼 타격을 받았던 것을 감안하면 이렇게 인구 증가세를 유지한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1990년대 이후로는 인구가 더 크게 늘었으며, 특히 청년 인구가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있다.[10]

[그림 4] 히가시오사카의 인구 변화 (자료: 히가시오사카시 홈페이지)

히가시오사카는 앞의 도시들보다는 조금 늦은 시기인 1990년대부터 일본 버블경제 붕괴와 기업 해외 이전 및 도교 집중 현상으로 인한 산업공동화 등으로 위기를 맞았다. 인구는 고령화 및 수도권 집중화 등 영향으로 198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그런 가운데 오사카 부(府, 광역시)와 히가시오사카 시(市)가 힘을 합친 전환의 프로세스가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으며 현재도 진행되고 있다. 그 영향으로 전출 인구가 전입 인구보다 많았던 상태는 2010년대 들어서는 전입과 전출 인구가 균형을 이루는 수준으로 바뀌었으며 2016년 이후로는 전입 인구가 전출 인구보다 늘어나는 추세가 보이고 있다. 전체 인구가 계속 줄어드는 데 비해서 20대 인구는 오히려 늘어나, 전체 인구 대비 20대 인구의 비율이 소폭 상승하기도 했다.

[표 1] 히가시오사카 전입 전출 인구 (자료: 히가시오사카 시 홈페이지, 2019년 8월 기준)
[표 2] 히가시오사카 20대 인구 및 전체 인구 대비 비율 (자료: 히가시오사카 시 홈페이지, 2019년 3월 기준)

이상과 같이 말뫼, 빌바오, 포틀랜드, 히가시오사카 네 도시는 한 때 제조업에 의존해 성장하다가 그 산업 기반을 잃어버린 도시들 중에서는 드물게 쇠락의 악순환에 빠지지 않고 전환에 성공했으며, 특히 청년 인구가 유출되지 않거나 오히려 유입되는 모습을 보인 곳들이다.

이 연구에서는 먼저 각 사례들을 도시의 기본 개요 및 주요 산업의 역사, 전환의 계기 및 시도, 결과와 현황, 특징과 한계 등의 틀에 맞춰 살펴본다. 그리고 네 곳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 이에 따른 시사점을 별도로 정리한다.

2. 사례 분석

가. 스웨덴 말뫼[11]

(1) 도시 개요 및 산업의 역사
스웨덴의 서남쪽 끝에 위치한 인구 30만 명 규모의 도시 말뫼는 덴마크 코펜하겐과 외레순(Öresund)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외레순은 말뫼와 코펜하겐을 포한한 이 근방 지역을 포괄하여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외레순 지역에는 총 370~380만 명이 거주하여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가장 높은 인구 밀도를 보이며 서로 통근하는 인원이 8만여 명에 달할 만큼 경제적 지리적으로 밀접하다.

말뫼는 18세기부터 섬유·가죽·벽돌 등 제조업이 발전했으며 특히 코쿰스(Kochums) 일가가 1840년에 코쿰스 기계작업장(Kochums Mechanical Workshop)을 설립하고 기관차를 생산하면서 본격적인 제조업 도시의 면모를 갖췄다. 코쿰스 작업장은 말뫼시 서부 해안가인 베스트라 함넨(Västra Hamnen) 지역에 조선소를 지었고 1870년쯤부터 배를 건조하기 시작했다. 이후 100여 년 동안 조선업은 말뫼의 대표적인 산업으로 기능했고, 1950년대 초 말뫼는 건조 실적으로 세계 1위의 도시였다. 이후로 1970년대까지 조선업은 계속 성장했으며 코쿰스 조선소만의 고용 인원이 최대 7,000여 명에 이르렀다.

말뫼는 1950년대 이후 봉제, 금속, 식품가공 등 제조업들이 임금 상승 추세를 이기지 못 하고 문을 닫거나 해외 이전하면서 산업 조정이 이뤄졌으나 조선업은 견조한 편이었고, 이에 설비 투자가 계속 이뤄져 1973년에 세계 최대의 ‘코쿰스 크레인’이 설치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1960년대부터 조선업 국제 경쟁력 하락에 대한 전문가들의 경고는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1973년과 1978년의 오일쇼크를 계기로 세계 경기가 급속도로 하락하면서 조선소도 위기에 직면했다. 경영진은 생산설비 축소와 인력 감축을 단행했고 노동조합도 조선소가 경영 위기를 타개할 수 있도록 최대한 협력했다. 스웨덴 정부도 조선소의 지분을 계속 사들이고 국가가 발주처가 돼서 선박을 건조하게 하는 등 구조조정 대책을 실행했다. 이런 노력에도 조선업을 유지할 수 없자 스웨덴 정부는 1985년 전국의 조선소 폐쇄를 결정했고, 코쿰스 조선소도 1987년 폐쇄됐다. 이 때까지 10여 년 동안 스웨덴 정부가 코쿰스 조선소에 지원한 금액은 340억 스웨덴 크로나(SKK·4조 8,700억 원 상당)에 달했다.

이에 따라 일시에 조선업 노동자들이 실업 상태가 되자 스코네 주 정부와 말뫼 시는 일대일 이직 컨설팅과 더불어 생활 안정성이 흔들리지 않도록 공영주택의 주거 조건을 조정해 주는 등 세심한 대처에 나섰다. 또한 공공부문의 고용을 늘려서 실직자들을 적극 흡수하기도 했다. 당시 말뫼에는 조선업 외에도 코쿰스 계열의 기관차 및 잠수함 기업도 있었고 다른 제조업 일자리들도 존재했기 때문에 조선업 노동자들 중 일부는 이들 일자리로 이직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정부와 시민들 사이에 ‘조선업을 대체할 만한 대규모 제조업 일자리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강했다. 이에 스웨덴 정부는 조선소 부지를 Saab 자동차에 1SKK에 제공하면서까지 자동차 공장을 유치했다. 이에 따라 2,700개의 일자리가 창출되기는 했으나 1989년 문을 연 공장은 만 3년을 넘기지 못 하고, Saab가 GM에 매각된 1992년쯤 문을 닫고 말았다.

이러는 동안 말뫼의 제조업 취업자 수가 3만여 개 사라졌고, 연쇄적 효과까지 포함해서 말뫼 시 전체 일자리의 25%가 감소했다. 여기에 1980년대부터 시작된 해외 이주민들의 유입까지 겹쳐져서 한때 말뫼의 실업률은 22%에 달했고, 도심 전반의 공동화 및 쇠락으로 ‘브라운 시티’(Brown City)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2) 전환의 계기 및 과정

조선업이 몰락하고, 새롭게 기대를 걸었던 자동차 공장까지 문을 닫게 된 1990년대 초, 말뫼는 전형적인 쇠락도시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였다. 말뫼 시가 체감하는 위기가 얼마나 컸는지는 숙원사업이었던 ‘외레순 대교’ 건설과 관련한 당시의 입장을 짐작할 수 있다.

말뫼 시민들은 이전부터 외레순 해협을 건너 덴마크 코펜하겐과 연결되는 다리가 건설되는 것을 바라왔다.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롬에서 기차로 5시간 걸리는 외진 도시였던 말뫼가 이 다리만 연결되면 코펜하겐에서 30분 거리인 스칸디나비아 중심 도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스웨덴과 덴마크 정부는 국책사업으로 외레순 대교 건설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말뫼의 경제 상황이 안 좋아지자 스웨덴 정부와 말뫼 시는 이 사업을 적극 추진하지 못 했다. 자칫하면 다리 연결과 함께 말뫼 인구가 코펜하겐으로 빠져나가 도시가 더 공동화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도시 전반에 부정적인 전망이 크게 덮여 있던 상황이었다.

이 때 전환의 계기가 된 것은 1994년 말뫼 시 신임 시장이자 시 집행위원회 의장으로 일마 리팔루(Ilmar Reepalu) 사민당 대표가 선출된 일이다. 리팔루 전 시장은 야당과의 연정을 통해 2013년까지 19년간 안정적으로 시정을 이끌었고 이 시기에 말뫼 시는 전환의 프로세스를 진행할 수 있었다.

리팔루 전 시장은 당선 당시 말뫼 시의 상황에 대해서 “실업자의 도시, 쇠락한 ‘브라운 시티’의 분위기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오히려 기존 방식의 일자리 창출이나 경제 발전 방안에 대해 아무런 기대가 없었고, 완전히 새로운 시도를 제안했을 때 ‘어디 한 번 해 보자’는 반응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리팔루 시장 당선 직후, 각 분야 전문가와 시민 대표로 구성된 태스크포스(TF)가 구성됐고, ‘말뫼가 어떤 도시가 되었으면 좋겠는지’에 대해 몇 달 동안 토론을 벌였다. 당시 TF 운영 및 거버넌스 실무 담당자였던 크리스터 페르손(Crister Persson) 전 말뫼 시청 직원(현 말뫼 대학 교수)이 “이 모든 과정이 시민들에게 알려지고, 최대한 전 세대 시민들의 의견이 반영되도록 말뫼 축제 등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마다 나가서 홍보하고 의견을 취합했는데, 지금처럼 스마트폰이나 SNS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무척 힘든 과정이었다.”라고 했을 만큼 말뫼 시는 이 TF의 의사 결정 과정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피드백을 받는 데 각별히 신경을 썼다. 리팔루 전 시장은 “큰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시민 중 누구도 ‘이 의사결정 과정에서 나는 배제되었다’고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그래야 전환의 과정 내내 시민들이 ‘내가 참여해서 결정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그것이 전환의 가장 큰 동력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해서 말뫼 시는 ‘친환경 도시’라는 비전을 채택했다. 이는 특히 청년 세대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당시는 1992년 리우 환경 회의 직후여서 환경 문제에 대해 젊은 층의 관심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 때 채택된 내용은 2000년까지 세부 사항이 채워져서 ‘Malmö 2000’이라는 문서로 공식 발표됐다. 이는 “2020년까지 지속가능발전 측면에서 최고의 도시가 된다.”는 목표와 기존의 노동집약적 제조업을 탈피해 친환경, IT, 바이오 등 신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지식 도시’(Knowledge City)로 간다는 비전을 담고 있다.

이에 따라 말뫼 시가 한 첫 사업은 구 코쿰스 조선소 부지인 베스트라 함넨 지역에 100% 에너지 자립 주거 단지 ‘Bo01’[12]를 건설한 것이다. 단지 주택단지를 지은 것이 아니라 거주하는 사람들이 주거와 양육, 문화 및 여가 생활, 학습 및 연구, 소비 등을 가까운 거리 안에서 영위할 수 있도록 지역 전체를 종합적으로 설계한 것이다. 여기에 재생에너지와 지열로 100%에너지를 공급하는 첨단 기술을 적용하고, 대중교통(버스)의 에너지도 천연가스[13]로 교체하면서 말뫼는 유럽에서 가장 앞서 나가는 친환경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이런 방향에 따라 말뫼 시에는 친환경, 미래 산업에 대한 비즈니스와 인재가 모여들었고, 이에 발맞춰 말뫼 시가 적극적으로 추진해서 설립한 ‘말뫼 대학’은 기존의 학문 체계에 얽매이지 않고 융합 연구에 나서는 젊은 연구자, 교수진이 채워졌다.

한때 추진이 보류됐던 외레순 대교 건설도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됐고 2000년 7월 지상구간 8㎞, 해저구간 5㎞의 외레순 대교가 개통됐다. 그 사이에 말뫼 시는 ‘브라운 시티’ 이미지를 벗고 ‘깨끗하고 살기 좋은 도시’로의 전환을 상당 수준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말뫼 인구가 코펜하겐으로 대거 빠져나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코펜하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말뫼 시로 이사 오고, 그러다가 비즈니스까지 옮겨 오거나 말뫼에서 창업을 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말뫼 시는 2000년대 이후로 산학협력을 통한 창업을 더욱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2002년 구 조선소 부지인 베스트라 함넨 지역에 친환경, IT, 교육 등 분야의 창업 인큐베이팅 기관인 ‘밍크’(MINC)를 설립했다. 이는 말뫼 시가 절반을 투자했고, 스웨덴 정부 및 유럽 지역개발 기금, 기업 투자금 등이 나머지 절반을 부담해서 세워졌으며 스타트업 벤저 그룹들을 최장 3년까지 지원하는 구조다. 2004년에는 말뫼 대학 인근에 생명과학분야 연구단지 ‘MEDEON’이 설립돼 생명공학, 의료보건 부문의 혁신 및 창업지원 센터로 기능하고 있다. 2010년에는 역시 구 조선소 지역에 ‘미디어 에볼루션 시티’(Media Evolution City)가 설립돼 미디어, 문화예술 분야의 창업이 이뤄지고 있다. 이와 같은 활동들을 통해서 구 조선소 지역에서는 과거 조선소 노동자들 숫자의 1.5배에 달하는 청년 창업자들이 일하고 있다는 통계가 있으며, 2000년대 이후 말뫼 시 총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16만3,000여 명의 연인원이 스타트업 벤처에서 일해온 것으로 집계되기도 했다.

이런 흐름 등의 영향으로 말뫼 시는 1990∼2014년 기간에 스웨덴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높은 인구 증가세(36%)[14]를 보였고, 2007년 유엔환경계획(UNEP)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꼽혔고, 2013년 OECD에 의해 세계 혁신 도시 4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3) 특징과 한계

말뫼 시의 사례는 한국에 꽤 많이 알려져 있다. 한때는 ‘말뫼의 눈물’이라는 말로 회자됐는데, 코쿰스 조선소 부지에 남아있던 대형 크레인(코쿰스 크레인)을 2002년 현대중공업이 단돈 1달러에 구입한 뒤 해체해서 한국의 울산으로 옮겨온 일 때문이었다. 크레인이 해체되던 날 말뫼 시민들이 나와서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지면서 국내에서 말뫼는 한동안 ‘경쟁력을 잃고 쇠락한 산업 도시’라는 반면교사의 취지로 언급됐다. 그러다가 우리 조선업의 경쟁력도 하락하기 시작하면서 말뫼가 첨단 지식 도시로 전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일각에서는 1990년대부터 외레순 대교, Bo01 주택단지, 말뫼 대학을 비롯한 여러 건설 사업이 벌어졌다는 이유로 말뫼 시의 위기 극복이 이와 같은 건설 프로젝트 덕분인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말뫼 시의 전환 과정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을 정도의 장기 프로젝트이고, 일시적인 건설 경기 부양, 조선업 실직자를 건설 일자리로 유인하려는 의도도 없었다. 리팔루 전 시장의 설명과 같이 말뫼 시 전환 프로세스의 궁극의 목표는 “시민들, 특히 젊은 세대가 거주하고 일하고 즐기면서 살아가기 좋은 지역을 만드는 것”이었으며 건설 프로젝트들도 이와 같은 목표 하에 진행된 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다만 말뫼 시가 진행한 사업들이 다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외레순 지역의 주택 개발을 비롯해서 몇몇 지역들은 의도한 경제 효과를 거두지 못 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또한 대규모 개발 때문에 지역의 주택 가격이 올라가서 시민들의 주거의 질이 오히려 낮아졌다는 비판도 나온다. 해외 이주민들이 대거 유입되는 상황에서 이들과 기존 시민들과의 문화적 융합, 격차 해소, 동등한 교육 기회 부여 등에 더 신경 쓰지 못 한 결과 양극화, 이중화가 스웨덴 다른 지역보다 심하게 나타난다는 지적도 있다.

또한, 말뫼의 전환이 성공적일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스웨덴이 복지국가라는 점이다. 대부분 남성 가장이었던 조선업 노동자 수천 명이 단기간에 실직을 했고, 그에 비해 도시의 전환 과정은 십수년에 걸쳐 진행됐으며, 새로 생기는 일자리는 제조업 노동자들보다는 IT, 에너지, 생명공학 등 분야의 기술집약적 연구자, 노동자들에 걸맞은 상황에서도 도시 인구가 썰물처럼 빠져나가지 않고 유지된 데는 시민의 생활안정성의 최저선을 국가가 책임지는 복지국가 시스템 영향이 컸다. 따라서 사회 구조 및 복지 시스템이 이와 상이한 환경에서 비슷한 전환의 프로세스를 진행한다고 할 때는 기존 산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일정 기간 안정성을 유지하면서 변화에 적응하게 해줄 방안을 필수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나. 스페인 빌바오[15]

(1) 도시 개요 및 산업의 역사

빌바오는 스페인 바스크 주에서 가장 큰 도시로 인구는 약 35만 명이다. 빌바오 주변 35개 도시들까지 포함한 빌바오 대도시권(Área metropolitana de Bilbao)의 인구는 약 100만 명으로 바스크 인구의 1/3을 차지한다.

16세기 이후 빌바오는 인근에서 생산된 철광석을 활용한 제철 공업, 화학 공업이 성장했고, 모직물과 포도주 등의 교역이 일어나는 항구도시로 기능하기도 했으며 조선업도 발전했다. 산업혁명기를 거치면서는 스페인의 금융 중심지 역할도 했다.

말뫼 시의 경우와 비슷하게 1970년대 오일 쇼크를 계기로 불황을 맞았고, 주력 산업이었던 철강과 조선업에서 경쟁력을 잃으면서 실업률이 급증했다. 1985년에는 실업률이 25%에 이르렀고, 1980년 43만8,000명을 기록했던 인구는 5년 후인 이 시점에 38만 명 수준까지 줄어들었다. 사람들이 빌바오를 떠나기 시작한 것은 단지 일자리가 없어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문 닫은 공장들에서 방치된 폐기물과 폐수로 빌바오 시내를 관통하는 네르비온 강과 그 주변 토양이 심각한 수준으로 오염됐기 때문이다. 경제가 안 좋아지자 사람들이 떠나고, 사람들이 떠나자 도시가 더 쇠락하는 전형적인 ‘쇠락도시’의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2) 전환의 계기 및 과정

이런 상황에서 빌바오 시민들은 무엇보다도 오염된 환경을 개선하고 지역을 사람이 살 수 있는 정도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고 1985년 15명의 법률가, 건축가 등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빌바오 도시재생협회가 설립됐다. 그리고 1986년 스페인이 유럽연합에 가입함으로써 유럽 지역 원조(European regional aid) 등 도시 재생 프로젝트에 쓸 수 있는 자금이 마련됐다. 이에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네르비온 강 수질 개선을 중심으로 한 도시재생 기본계획이 수립됐다.

재생 사업이 계속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민관 합동 연구소 ‘빌바오 메트로폴리-30’의 알폰소 마르티네즈 세에라 총감독에 따르면 재생 사업 초기에는 강 주변 30개의 마을공동체가 서로 프로젝트를 유치하려고, 자금과 설비를 차지하려고 싸웠다. 극심한 혼란을 겪은 뒤에야 시민들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조금씩 양보하고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구성한 것이 빌바오 메트로폴리-30이었다.

1991년 설립된 빌바오 메트로폴리-30은 도시의 핵심 발전 사업을 연구하고, 도시 재생에 관한 모든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기관이다. 시민들로부터 새로운 아이디어가 도출될 수 있도록 하며 이에 대한 근거와 접근 방법을 찾아내고, 대화를 통해 여러 주체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역할을 하기 위한 기관이다. 빌바오 시청을 비롯해 지역 대학, 금융, 전기, 철도 등 빌바오의 모든 민관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는 구조다. 처음에는 19개 회원조직으로 시작됐으며 현재는 단체 회원이 140개에 이른다. 빌바오 시청 역시 140개 단체 회원 중 하나일 뿐 특별한 지위에 있지 않다. 민관 협력 기관이지만 ‘민’과 ‘관’이 50대 50으로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주제에 적합한 전문가, 실무진들이 참여하는 독립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연구에 따라 기획된 프로젝트는 회원 중 일부 단체나 ‘빌바오 리아 2000’(Bilbao Ría 2000)[16]이라는 별도 기관에서 실행한다.

초기 빌바오 메트로폴리-30은 “단순한 개발을 넘어 전통과 문화를 계승하고, 공공성을 극대화 하며, 주거 지역을 보호하면서 균형 발전을 이룬다.”는 도시 재생의 목표를 설정했고, 이러한 기반에서 각 구역 별로 특화 된 재생 마스터플랜이 추진됐다. 특히 산업 쇠퇴로 오염이 심각했던 ‘아반도이바라’(Abandoibarra) 지역을 복합 비즈니스 지구로 조성하는 프로젝트에 힘이 실렸다. 이 지역은 업무와 주거, 문화, 연구 등에 관한 시설들이 균형을 이루도록 디자인됐다.

가장 큰 특징은 ‘친환경’을 핵심 키워드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단지 이 지역의 개발 키워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빌바오 도시 재생의 키워드이자 미래 비전이었다. 세에라 빌바오 메트로폴리-30 총감독은 이 방향을 정한 데 대해서 “빌바오에 살고 있는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설명했다. 1984년부터 시작돼 약 30년간 진행된 네르비온 강 정화 작업과 상하수도관 교체 공사가 그 대표적인 사업이었다. 시민들의 생존, 건강한 삶과 직결되는 사업이었기 때문에 약 10억 파운드의 비용이 소요됐지만 시민들은 이를 위해 추가적인 세금을 부담하는 데 동의했다. 그리고 도시 재생 사업들도 이 연장선에서 추진됐기 때문에 시민들의 동의와 결속력을 얻기에 용이했다.

네르비온 강 주위의 수변 공간도 빌바오 시민들이 자유롭게 오가면서 여가를 즐기게 하려는 목적으로 조성됐다. 강 주변에 공장들이 있던 당시에는 시민들이 강변으로 오가기 어려웠지만 재생 사업 이후에는 강으로 접근하기 쉬워지도록 보도를 만들었고 다리도 건설했다. 이와 함께 도심 번화가와 광장 등도 정비됐고 빌바오 인근 지역과 연결하는 지하철이 1995년, 시 중심부를 순환하는 트램이 2002년 개통되면서 이동량이 많아지고 활기가 생겨났다. 현재 빌바오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된 구겐하임 미술관(Guggenheim Museum)도 네르비온 강가에 지어지면서 관광객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이밖에 콘서트홀, 대학과 호텔 등이 들어서면서 이전에 항구, 물류창고, 조선소, 공장들이 있던 지역들이 탈바꿈 한 데 대해서 세에라 총감독은 “관광객을 위해서 재개발을 한 것이 아니고, 빌바오에 사는 시민들이 살아가면서 자주 방문하고 즐길 만한 공공 장소들을 접근성이 좋은 도심 중앙부에 재조성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빌바오 시는 환경적 측면의 산업 정책도 폈다. 사무디오 첨단기술 산업 단지(Parque Technologico de Zamudio)에 200여개의 환경 산업 기업들이 들어오도록 지원했고, 이 분야에 종사하는 7만여 명이 기술 및 직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투자했다. 또한 지역 기업들이 유럽연합의 환경 기준을 준수하고, 공정을 현대화 하도록 지원하기도 했다. 대중교통 시스템도 친환경 에너지로 대체해 갔다.

또 빠른 기술 변화에 대응해 지역 산업의 역량을 강화하고, 청년층이 혁신 산업에 진입해서 일할 수 있도록 빌바오 시는 여러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지식 기반 비즈니스 서비스 산업 인프라 구축을 위해 지역 제조 기업들과 전문가, 대학이 협력해 운영하는 ‘에스 파브릭’(AS-Fabrik) 프로젝트다. 과거 전통적인 산업지구였던 ‘소로타크아우레’(Zorrotzaurre) 지역을 지식 기반 산업 지구로 전환하기 위한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빌바오 시가 이 지역 부지를 제공하고, 대학과 연구기관이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민간 기업이 참여하는 식으로 협력하고 있다.

혁신 기업들을 발굴하고 성장시키기 위한 ‘비비에프’(BBF) 프로젝트도 유사한 형태다. 빌바오 시가 10년간 무상으로 도심 부지를 제공하기로 했으며, 협동조합 대학으로 유명한 몬드라곤 대학이 혁신 창업가 과정의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빌바오 메트로폴리-30이 2016년에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1990년에서 2000년대까지의 전환 전략은 인프라 중심이었고, 2000년대 이후의 전환 전략은 가치 중심이다. 혁신, 전문성, 정체성, 커뮤니티, 개방성이라는 가치에 기반해서, 특히 청년 세대의 관점을 반영해서 2035년까지의 분야별 발전 전략을 제시했는데 ‘부(wealth) 창출 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이해관계자들의 삶의 질 향상’, ‘인간과 사회, 환경, 경제적 가치에 기반한 현대적인 산업 지역으로의 도시 개발’, ‘지식기반의 지속적 학습 체계 구축’, ‘실업에 대한 현실적 대안 마련’, ‘유년기 빈곤 완화와 기회 균등을 위한 사회부조 확대’, ‘보편적 의료 보장 시스템의 효율성 개선’, ‘고령자 친화적 도시 환경 제공’ 등의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3) 특징과 한계

빌바오가 속한 바스크 지역은 공동체와 협동조합의 전통이 강하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바스크 정부의 연구 역량은 스페인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환경에서는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한 이해관계 조정, 대학 및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협력 프로젝트 진행 등이 다른 지역보다 용이했을 것이고 도시 재생 사업도 이 덕분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가운데, 구겐하임 미술관의 유치 과정을 보면 꼭 모든 과정이 시민 주도, 사회적 대화와 협의를 통해서 진행되지는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미술관을 유치하는 프로젝트에 대해서 초기에는 주민의 95%가 반대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빌바오 시는 문화 도시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빌바오와 외부 지역과의 연결을 강화할 만한 프로젝트라고 보고 미술관 유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결과적으로 구겐하임 박물관은 빌바오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했고 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지만 빌바오 시는 시민들과 미술관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계속해서 여러 노력을 하고 있다. 즉, 관광객과 시민들 사이의 괴리가 생길 가능성이 여전히 있는 것이다. 때문에 세에라 총감독은 “구겐하임 미술관을 빌바오 도시 전환의 상징으로 보지 말아 달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빌바오 전환의 성공 비결을 유명 박물관 유치, 예술적이고 눈에 띄는 건축물 건설 등으로 분석하는 시각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 미국 포틀랜드[17]

(1) 도시 개요 및 산업의 역사

포틀랜드는 미국 오리곤주 북서부 태평양 연안 지역에 위치한 도시다. 동부 해안 도시들에 비해서 200여 년 늦은 1851년 도시가 세워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주로 유럽 가톨릭 신자들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넘어온 개신교도들이 주축이 돼 도시를 세웠으며 미국의 주요 도시들 중에서 드물게 현재까지도 백인 인구가 70% 이상을 차지하는 도시다.

서부개척기 이후로 한동안 지역의 자연 자원에 의존한 농업, 임업 등의 경제활동이 주를 이뤘고, 토지 개척 과정에서 벌목한 나무 그루터기가 정리되지 않고 곳곳에 방치돼 있어 ‘그루터기 마을’(stump town)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이후 미국 내 많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공업화가 이뤄지면서 인구도 늘어났다. 1930~1940년대에는 도시를 관통하는 윌래밋 강을 따라 제철공장과 조선소가 세워졌다. 2차 세계대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화물선 ‘리버티’와 ‘빅토리아’가 여기서 건조됐기 때문에 태평양전쟁이 본격화됨에 따라 조선소가 점점 확장됐다. 최고 전성기에는 12만5,000여 명이 조선소에서 일했다. 이에 따라 주위에 주거지와 상권이 조성되면서 인구가 20만~30만 명 수준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1930년대부터 도시화 영향으로 많은 농지와 임야가 사라졌고 환경이 오염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이르자 도시에 증가한 인구의 생활하수, 공장 폐수에 더해서 캘리포니아에서 넘어온 관광객들이 남긴 쓰레기까지 더해져서 강물과 강 인근 지역은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오염돼 갔다. 거기다 급증한 자동차, 농업용 및 공업용 기계들에서 나오는 배기가스들로 대기오염도 심각해졌다.

여기에 2차 세계대전 이후 찾아온 불황, 세계 대공황 영향 등으로 1970년대에 이미 포틀랜드 도심은 공동화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인구 확장기에 지어진 낡은 건물들이 그대로 남겨진 채로 도심은 활기를 잃어갔다. 특히 아프리카계 주민들이 모여 살던 시 북동부 알비나 주변지구의 슬럼화가 심각했다.

다음 부분에서 기술할 여러 가지 노력으로 도시는 안정화 됐고 도시 전체로 볼 때 인구 변화는 크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와 샌프란시스코 실리콘밸리와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점에다 상대적으로 깨끗하고 잘 정비된 도시 환경 덕분에 계속해서 고학력 청년 인구가 유입돼 왔으며 그에 따라 시대 흐름에 맞는 새로운 비즈니스, 일자리가 계속해서 창출돼 왔다. 포틀랜드 도시권에 매주 300~400명이 이주해 오며 그 중 25~35세 젊은 층이 가장 많고 약 30%가 대졸 이상 학력자라는 통계도 있다.

한 때 도시 경제를 이끌던 조선업은 사라졌지만 컴퓨터 및 전자제품 제조업이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인텔의 반도체 공장 등 규모 있는 제조업 공장들이 남아있어서 여전히 제조업 일자리가 3만 개 이상 유지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다른 러스트벨트 도시들이 경험한 것과 같은, 제조업 축소에 따른 급작스러운 쇠락은 포틀랜드에 찾아오지 않은 것이다. 다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타격을 받아서 일자리 8만 개가 사라지고 실업률이 11%로 증가한 바 있었다.

(2) 전환의 계기 및 과정

포틀랜드에서의 전환은 빌바오의 경우와 유사하게 ‘시민들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환경을 되돌려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1966년 환경재생 공약을 내건 톰 맥콜이 11대 오리건 주지사로 당선된 것이 가시적인 전환점이었다. 맥콜 주지사가 한 첫 번째 일은 해안을 사유지화 하려는 민간 개발자들을 규제하는 ‘Beach Bill’(1967년 통과)을 만든 것이다. 이 법안에 의해 오리건 주는 584km에 달하는 해안선에 대한 민간 개발을 지금도 금지하고 있다. 그 덕분으로 시민들은 어느 해안에나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다. 맥콜 주지사는 유리병 재활용과 환급금 지급을 미국에서 처음으로 의무화 한 ‘Bottle Bill’(1971년 통과)로도 유명하다.

포틀랜드 도시 역사 상 가장 큰 전환의 분기점은 1970년대에 찾아왔다. 미국은 1960년대부터 자동차 산업의 폭발적 성장과 맞물려서 전 지역에 주간(interstate) 고속도로가 깔리기 시작했다. 포틀랜드에는 1943년에 이미 4차선 고속도로 ‘하버 드라이브’가 도심을 관통하는 형태로 개통해 있었다. 이 도로는 이전까지 쉽게 오갈 수 있었던 도심과 윌래밋 강 사이를 완전히 끊어버렸고, 이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계속됐다. 맥콜 주지사는 시민들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그 결과, 1974년 하버 드라이브를 폐쇄하고 이 지역을 ‘워터프론트 파크’로 전환하기 위한 공사가 시작됐다. 1976년 고속도로 건설 반대파였던 닐 골드슈미츠가 포틀랜드 시장으로 재선되면서 고속도로 건설 사업은 완전히 중지됐다.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지원됐던 연방정부 자금 500만 달러(당시 기준)은 도심 대중교통인 라이트레일을 건설하고 버스 체계를 개편하고 주요 도로를 개편하는 데 사용했다. 이와 같이 고속도로를 포기하고 도심 교통 체계 구축에 집중한 것은 미국 전체에서 포틀랜드가 처음이었다.

또한 포틀랜드는 도심 공동화 현상을 되돌리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표적인 것이 ‘건물의 복합 이용’(mixed use) 원칙이다. 이는 도시 중심부에 하루 16시간 동안 유동인구가 유지되고 활기가 돌게 하기 위해서 상업지구와 주거 지역의 균형, 주간과 야간 인구의 균형을 맞추는 도시 계획이다. 이와 같은 정책은 1960년대부터 시작됐고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이를 ‘조닝’(zoning·용도지역지구제)이라고도 하는데, 도시 모든 건물과 부지의 용도를 정하는 데 적용하는 원칙이다. 예를 들어서 도심 한 지구에 사무용 건물만 있다면 이 지역은 저녁 이후와 주말에 유동인구가 적어지게 마련이다. 때문에 한 지구 안에 상업 지역과 주거 지역이 어우러지도록 하고, 이에 더해서 사람들이 20분 이내에 걸어서 오갈 수 있는 도심부 안에 지역 기업과 특색 있는 레스토랑과 가게들, 생활 편의 시설이 들어있도록 하는 것이다. 도시 개발을 위한 민관 협력 기관인 ‘프로스퍼 포틀랜드’(Prosper Portland)[18]가 이를 위해 건물주, 개발업자 등 사이에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적극적으로 특정 지역으로 기업 및 상업시설을 유치하기도 한다.

여기에 촘촘하고 편리한 대중교통, 통근자의 6%가 자전거를 이용할 정도로 잘 조성된 자전거 도로 등이 어우러져서 포틀랜드는 미국 도시들 중에서 보기 드물게 자동차보다는 보행자가 우선인, 오밀조밀하고 활기찬 도심부, 깨끗한 대기 환경을 자랑한다.

또한 1990년대 말부터는 도시 개발에 있어서 친환경 원칙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한 지구(district) 단위를 하나의 환경시스템으로 보고 종합적인 계획을 짜는 것이다. 건물들의 상하수도와 도로 및 가로수의 빗물 활용 시스템, 교통망 등이 연결됨으로써 환경에 대한 악영향을 최소화 하고 재생에너지를 최대한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1999년부터는 ‘파크 2020’이라는 비전하에 2020년까지 모든 시민이 도보 10~15분 이내에 공원에 갈 수 있도록 하는 공원 마스터플랜도 추진되고 있다. 포틀랜드에는 이미 1900년대 초부터 시 전체의 공원 마스터플랜이 있었고 그 결과로 현재 시 면적의 12%가 녹지이기도 하다. 개발 업자들이 스스로 사업 용지의 일부를 공원용지로 시에 제공하면 인프라 개발비 의무 지불액 중 일부를 면제해 주는 제도 등으로 인해 녹지 공간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포틀랜드 시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획기적으로 감축하고 있는 도시다. 1990년~2013년 사이에 기존의 14%를 줄였다. 같은 기간 미국 전체의 배출량이 7% 늘어난 것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성과다.

환경과 관련된 이와 같은 도시의 노력이 경제 및 산업 발전, 인구 유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포틀랜드는 본래 서부해안도시 특유의 자유롭고 포용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친환경적 전환의 시도가 맞물리면서 지속가능성을 지향하는 라이프 스타일이 자리잡힐 수 있었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도록 다소 불편하더라도 될 수 있으면 걸어 다니며 자동차보다는 자전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문화, 지역 내에서 수확한 농산물과 지역 제품을 구매하려는 경향, 소비보다는 체험을 중시하고 엔터테인먼트보다 교육에 투자하는 삶의 방식을 따르는 사람들이 모여들게 된 것이다.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와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던 젊은 층 중에서 특히 이와 같은 라이프 스타일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이들 중에서 이주가 가능한 사람들이 포틀랜드로 오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지역 내에 존재하던 히피 문화, 인디 밴드, 지역 맥주, 푸드 트럭 등이 활력을 얻고, 이런 것들이 어우러진 도심의 자유롭고 예술적인 분위기에 매료된 청년들이 더 많이 이주해 오는 ‘선순환’ 구조가 생겨나게 됐다.

프로스퍼 포틀랜드 직원 출신인 도시 재생 컨설턴드 야마자키 미츠히로는 “포틀랜드로 이주해 오는 청년들 대부분은 일자리가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온다.”면서 “느긋하고 여유로운 포틀랜드의 라이프 스타일 영향도 있고, 창업을 권장하고 작은 사업체들이 공존하기 좋은 비즈니스 환경 영향도 있다.”고 설명했다.

야마자키 미츠히로가 프로스퍼 포틀랜드에서 일한 경험에 따르면 포틀랜드 도심부에 규모가 큰 기업을 유치하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도심부가 오밀조밀하게 구성돼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무리 많은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해도 포틀랜드의 정서 및 문화와 맞지 않는 기업이면 굳이 유치하려고 하지 않는 시 정책 때문이기도 하다. 포틀랜드 도시권 기업의 80% 이상은 사원 20명 이하의 작은 기업들이며, 직장을 다니면서 공방을 운영하는 등 겸업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수상자에게 1년 동안 5만 달러 상당을 지원하는 프로스퍼 포틀랜드의 ‘스타트업 PDX 챌린지’ 등 여러 가지 창업 지원 프로그램들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포틀랜드로 이주해 오고자 하는 기업들이 있다. 독일 자동차 다임러의 상용차 부분인 다임러 트럭은 북미 신본사를 포틀랜드 도심 외곽에 건설했다. 전기차, 자율주행차 관련 연구개발센터 등을 위해서는 인재들이 모인 지역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다임러 트럭이 밝힌 이유였다.

(3) 특징 및 한계

포틀랜드는 미국의 여러 도시, 여러 공동체 중에서도 특이할 정도로 주민 참여 및 이해관계 조정, 협업이 잘 되는 도시다. 주민 참여가 도시 정책에 영향을 준 첫 번째 사례는 1968년 3월 실시된 포틀랜드 사상 첫 지역주민단체(ACWPC) 임원 선거였다. 연방정부 자금으로 진행될 도시 재생 프로젝트를 받기 위해서는 지역 주민 참여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이 단체는 일반 시민을 임원으로 선출하기 위해 대대적인 홍보 활동을 벌였다. TV, 라디오, 신문 광고와 가두 선전차량 활동까지 한 끝에 2만8,000명 지역 인구 중 6.4%에 해당하는 1,781명의 투표를 이끌어 냈고, 당시 일반 참정권도 없던 아프리카계 주민 5명을 임원으로 선출했다.

이후 도시의 환경 및 개발에 관한 사안마다 주민 참여를 바탕으로 하는 것은 포틀랜드의 전통이 됐다. 행정 부서와 건설업체가 대략의 계획을 세운 후에 시민들에게 설명하고 의견을 듣는 정도가 아니다. 개발이 필요한 지구 범위를 정하고, 개발의 방향과 규모, 자금을 정하는 초기 단계부터 시민들이 참여하는 것이다. 이 때 두 개의 위원회가 구성되는데 하나는 주민과 행정 담당자, 개발 사업자, 그리고 지역의 대학이나 공공기관 등까지 4개 부문의 이해관계자들로 구성된 위원회다. 또 하나는 교통, 공원, 수도, 개발, 환경, 주택, 경찰, 소방 등 지역개발에 관여하는 전문가 위원회다. 이들이 지역 공동의 이익과 환경까지 고려하는 개발 방향이 정해지면 이것이 행정 체계를 거치면서 구체적 실행 방안이 되는 식이다.

이와 같은 전통과 시스템을 하루 아침에 만들어낼 수는 없다. 특히 이익이 걸려 있는 개발자, 건물주 등의 이해관계까지 조정하면서 도심부의 구성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다소 포기하고 협력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도시의 활기를 높이고 다시 모두의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점을 실제로 경험해야만 가능하다. 따라서 지역 이해관계자들의 거버넌스가 존재하지 않거나 미약한 다른 지역에서 포틀랜드 사례를 벤치마킹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또한, 포틀랜드에도 개발이 이뤄짐에 따라 임대료가 올라가는 현상은 나타난다. 포틀랜드의 도시 개발 시스템 자체가 개발에 따라 해당 지역의 가치가 올라가고, 그에 따라 임대료 수입, 도시의 세수가 증대된다는 점을 전제로 짜여 있다. 그 과정에서 임대료 증가를 감당하지 못 한 세입자들은 주변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고려되지 못 하고 있다.

한편, 포틀랜드에 청년층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현상은 지금까지 설명한 지역의 장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리콘밸리를 비롯한 캘리포니아 지역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영향도 있다. 고학력 청년층이 학업과 일자리를 찾아서 캘리포니아로 유입되다가, 생활비가 덜 들고 환경이 좋은 포틀랜드 쪽으로 넘어오는 구도가 존재하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 지리적 이점이 없는 곳에서라면 포틀랜드와 거의 유사한 환경, 제도를 갖추더라도 청년층의 유입 효과는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라. 일본 히가시오사카[19]

(1) 도시 개요 및 산업의 역사

히가시오사카는 인구 약 50만명 규모의 도시로 오사카부(府)내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다. 1967년 후세(布施), 카와(河内), 히라오카(枚岡) 세 개 도시가 합병하여 히가시오사카시가 만들어졌다. 오사카 지역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선착장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이 있어서 에도시대에는 야마토 강 근처에서 면화 재배가 이뤄졌고, 무명을 가공하는 소규모 공업도 발전했다. 무명 공업은 가내 공업 수준이었기 때문에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사라졌는데 이 때 남겨져 전해진 기술이 현재의 공업 기술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1920년대 이후로는 도로가 정비되면서 길을 따라서 금속·주물을 비롯한 다양한 업종의 공장가가 형성된다.

2차 세계대전 후에는 히가시오사카에 공장이 더욱 집적되었는데 오랜 기간에 걸쳐 다양한 형태와 업종으로 구성된 공장지대가 형성됐다. 특정 대기업에 의존해서 단기간에 지역이 재편되는 일본형 기업도시(企業城下町)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1950~1970년대의 일본 고도성장기에는 수출형 기계산업 발전에 따라 나사, 볼트, 작업 공구 등의 생산이 확대됐다. 동시에 각종 금속 가공 기술도 성장, 발전했고 다양한 관련 기술들이 지역 제조업의 넓은 저변을 형성했다. 금속·기계·전기·플라스틱 등의 부품부터 완제품까지 생산이 가능한 유수의 중소기업과 높은 기술력의 작은 공장들이 조화를 이뤘다.

히가시오사카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사업자 수 기준으로 26.7%, 종업원 수 기준으로 30.5%에 이른다. 일본 전체에서 공장 수가 4,000개 이상인 도시 7곳 중에서 히가시오사카는 공장 수는 5위(6,546개)지만 면적 대비 공장 수(밀도) 면에서는 단연 1위다. 이는 종업원 수 10명 미만 업체가 74%, 20명 미만이 90%에 이를 정도로 작은 기업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기업의 하도급, 하청에 의존하는 기업보다는 스스로가 모기업이거나 독립적인 기업이 90%에 이르는 것도 특징이다.

그런 히가시오사카도 일본의 다른 공업도시와 마찬가지로 오일쇼크, 버블경제 붕괴의 영향으로 산업 쇠퇴를 겪었다. 1989년부터 기업이 해외 및 다른 도시로 빠져나가거나 폐업, 도산하기 시작했으며 기업 수의 감소세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2) 전환의 계기 및 과정

히가시오사카 시 정부, 그리고 광역 단위인 오사카 부 정부는 이 지역의 특징인 중소 및 영세 규모 제조업 위주의 산업 환경이 강점이자 경쟁력이 될 수 있도록 정책적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 출발점은 1995년 중반 실시된 산업 진흥 정책이다. 이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작은 기업들의 기술을 모아서 지역 브랜드의 완제품(최종 제품)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것이다. 히가시오사카의 제조업체들은 본래 지역의 다른 업체들과 수평적으로 협력하고 연합해서 제품을 만들거나 공동 수주를 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협업 방식으로 일하는 기업이 전체의 30%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다. 그럼에도 독자 브랜드로 최종 완제품을 생산하는 곳은 드물다보니 국제적 업황이나 납품 대기업의 상황에 업체의 생존이 좌우되는 일이 많았다. 이에 지방 정부는 지역 기업들의 안정성과 지속가능성을 위해 보다 독립적, 수평적인 협업과 품질 제고, 독자 브랜드 구축을 지원하게 된 것이다.

1995년부터 업종 간 교류 사업이 시작됐고 2000년에는 히가시오사카시 기술 교류 프라자가 만들어져서 지역 기업들의 기술·기업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 하고, 공동 수주 그룹이 조직되도록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히가시오사카 지역에는 현재 공식적으로 15개의 업종 교류 및 공동 수주 사업 네트워크가 있어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 중 대표적 네트워크인 ‘로댕21’의 사례를 보면, 13개 업체가 모여 1998년 설립했으며 매달 한 번씩 정례회의를 하면서 서로의 공장을 견학하고, 각 사에서 팔리지 않은 물건을 가져와 분석하며 실패의 원인을 토론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1999년에는 공동 출자 회사인 ‘유한회사 로댕21’을 설립했고 2001년에는 이를 주식회사로 개편했다. 이 법인은 공동 사업의 코디네이팅을 담당한다.

특히 하기시오사카 정부는 지역 기업들이 고부가가치 산업에 뛰어들 수 있도록 유인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분야가 환경 비즈니스 산업이다. 이 분야의 기술로드맵을 만들고 관련 연구·개발 활동을 지원하면서 ‘환경비즈니스연구회’가 발족되도록 했으며 관련 기업들 간의 연계·협력이 이뤄지도록 신경 써 왔다.

또 디자인 측면의 지원도 이뤄졌다. 시 정부는 ‘히가시오사카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세계적 공업 디자이너인 키타 토시유키를 크리에이티브 어드바이저로 영입했고, 디자인의 중요성을 교육하는 과정과 함께 각 기업들의 실제 제품을 재디자인, 재설계 해 주는 ‘디자인상담회’도 운영하고 있다. 기업들 내부에서 디자인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대학 디자인학과, 디자인 전문 업체들과 연계해 주기도 한다.

이런 실사구시적인 지원에는 히가시오사카시에서만이 아니라 광역 단위인 오사카부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오사카부는 2010년 ‘제조 비즈니스 센터 오사카’(MOBIO)라는 조직을 만들어서 중소 제조 기업들의 기술 개발과 판로 개척, 매칭, 홍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오사카부는 첫째, 종업원 수 100인 미만 제조업(식품·의약품 분야는 제외) 기업 그룹 단위로의 기술 집적, 둘째, 지역 브랜드의 최종 제품(완제품) 제작, 셋째, 자동차·로봇·항공 등 높은 품질의 부품을 요구하는 분야로의 진출을 지원한다. 이를 위해서 공무원들이 직접 매칭 코디네이터 또는 영업사원처럼 현장에 나가 뛰도록 하고 있다. 특히 오사카부의 관련 부서 과장과 3개 팀원 등 총 20여명이 아예 MOBIO로 사무실을 옮겨서 지역 기업들을 순회 방문화면서 각 사의 성장단계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와 같은 노력들의 결과로 히가시오사카는 산업 쇠퇴의 위기에서 비교적 빠르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기업 수 감소세는 1989년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제조품 출하액은 반등했다. 1989년 1억7975만 엔 수준이었던 것이 계속 줄어들다가 2010년 9832만 엔으로 바닥을 친 후 이듬해부터 상승세를 보였으며 2017년에는 11억 4321만 엔까지 회복됐다. 물론 이는 일본 전체 및 오사카 부의 공업 생산이 회복세인 것과 궤를 같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2016~2017년 히가시오사카의 제조품 출하액 성장률이 3.5%로 전국 평균(2.3%)보다 높았다는 점을 볼 때 회복세가 다른 도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히가시오사카에서는 이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새로운 현상들도 나타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중소·영세기업들이 힘을 합쳐서 첨단 산업에 도전하는 일이다. 2002년 12월 설립된 히가시오사카 우주개발협동조합(현 우주 개발 협동조합 SOHLA)이 소형 인공위성 개발에 나선 것이 대표적이다. 이 협동조합에서는 50㎏급 소형 인공위성 ‘마이도 1호’를 쏘아올려 세계 최초로 우주에서의 천둥 촬영에 성공하기도 했다.

앞서 설명한 업종 교류 네트워크인 ‘로댕 21’은 하나의 브랜드로 인식되고 있기도 하다. 이 브랜드가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면서 상품 개발 및 제작 의뢰가 들어오고 있으며, 네트워크 소속 총 80명여 명이 매주 개최되는 기획개발부 회의에 참가해 논의한 뒤 상품화를 한다. 네트워크에는 고무, 금속부품, 정밀판금, 가공, 잡화, 물류·운반, 기업서비스 등 여러 부문의 기업들이 있을 뿐더러 디자인 기업만 10개사가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의뢰를 실제 상품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히가시오사카 시의 노력 중 주목할 것은 산업 지구와 주거 지구 간의 갈등해소 및 융화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다. 일반적으로 공업 집적지와 주거지는 떨어져 있지만 간혹 인접해 있는 경우 소음과 진동, 악취, 야간작업, 폐기물 등과 관련한 갈등이 불거지기 쉽다. 히가시오사카도 산업 쇠퇴기 공장이 폐업한 자리에 주거지가 조성되면서 산업 지구와 주거 지구가 가까워졌고, 생활에 불편을 느낀 주민들의 민원이 다수 발생했다.

이에 대해 히가시오시카는 주민, 제조기업, 건축주 등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는 거버넌스 구조를 통한 문제 해결에 나섰는데 특히 주민 주도로 진행되도록 했다. 2015년 ‘주공공생住工共生) 마을만들기 조례’가 제정됐고 마을만들기 협의회가 만들어졌으며 행정에서 파견된 코디네이터가 조사와 행정 프로세스를 도왔다. 공장 집적도가 가장 높은 타카이타구(高井田區)의 경우는 주민 주도의 지역 조사, 면접 조사, 주민-행정 간담회, 마을만들기 협의회 조직, 지역 규칙 제정 등이 순서대로 이뤄진 결과, 산업육성 블록과 주거지 블록으로 지역을 나누는 해결책을 도출했다. 이에 따라 2006년부터는 지역 규칙에 따라 도시가 조성돼 왔다. 이 과정과 결과는 앞서 설명한 포틀랜드의 거버넌스와도 유사한 형태이며 지역 용도 조정 역시 포틀랜드의 조닝(zoning)과 유사한 형태다.

또한 고령화 되고 있는 다른 지역 제조업 현황과 달리 히가시오사카에서는 청소년 및 청년층이 제조업에 관심을 가지고 진입하는 현상도 보인다. 시립산업기술지원센터는 초등학교 5학년~중학교 2학년생을 대상으로‘모노쯔꾸리(제조업) 체험교실’을 개최하고 있으며 ‘히가시오사카시 소년소녀발명클럽’등을 운영 중이다. 이에 대한 주민 호응이 높은 것은 앞서 설명한 우주개발협동조합처럼 흥미로운 도전을 하는 기업이 주목을 받은 데 따른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위성이 발사됐던 시기에 오사카에서 기념 화폐가 발행되는 등 지역 내 관심이 상당했다.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히가시오사카 시가 남녀평등에 적극적인 정책을 펴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제조업 도시들이 남성중심적, 가부장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례적으로 보일 만한 일이다. 시는 경제 및 사회 활동에 대한 남녀의 평등한 참여를 권장하기 위해 2004년 ‘히가시오사카 시 남녀공동참여 추진 조례’를 만들었고, 2011~2020년의 10년간 추진할 ‘히가시 오사카 미래를 위한 날개짓’이라는 이름의 종합계획을 발표한 뒤 이를 실천해 오고 있다. 기본 시책을 보면 시의 각종 심의회, 시청, 기업에서의 여성 등용, 취업시장에서 남녀에 균등한 기회 및 대우 제공, 일과 육아 및 간호와의 양립을 위한 사회서비스 확충, 가사·육아·간호에 대한 남성 참여 촉진 등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에 더해서 시림남녀공동참여센터는 남녀평등뿐 아니라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 교육도 해오고 있다.

(3) 특징과 한계

일본에서 지역 공동화와 인구 감소(인구 소멸)는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중소 제조업체 중심의 히가시오사카 지역이 이렇게 독자적인 노력을 통해 지속가능성을 찾아가는 것은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다. 다른 공업 지역들에서 도시 축소 현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히가시오사카는 뿌리산업에 해당되는 공업기술들을 보유한 업체들이 다품종 소량생산을 해 오면서 수평적이고 독립적인 경쟁력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일본 내에서도 독특한 지역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다른 지역과 달리 국제 산업 경기나 대기업의 경영 현황에 크게 휘둘리지 않고 지속성을 유지해 올 수 있었다. 지역 정부의 몇몇 지원이 이뤄지자 독자 브랜드의 완제품 생산을 하는 기업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본래 가지고 있던 원천기술이 확실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주로 대기업 중심으로 형성된 기업도시들이나, 대기업의 하청 구조에 속해 있는 중소기업들이 대부분인 지역에서는 히가시오사카시, 또는 오사카부와 같은 노력을 하더라도 유사한 결과를 내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지역 사례가 의미 있는 것은 꼭 대기업만이 아니라 10~20인 규모의 작은 기업들도 경쟁력과 지속가능성을 가질 수 있고, 지역의 청소년과 청년이 다니고 싶어할만한 좋은 기업일 수 있으며, 새로 창업되는 신산업 기업들과 연계해서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3. 공통점과 시사점

가. 사례 도시들의 공통점

(1) 시민의 ‘삶의 질’ 중심 정책

지금까지 살펴 본 네 도시 사례, 특히 말뫼, 빌바오, 포틀랜드의 세 도시 사례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모두 지역의 경제 및 산업 발전의 관점보다는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높은 삶의 질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전환의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다.

말뫼시는 ‘젊은 세대가 와서 살고 싶은 도시, 일하고 공부하고 산책하고 문화 생활을 즐길 수 있는 모든 인프라가 모여 있는 도시’라는 목표 하에 여러 사업을 진행했다. 말뫼 대학과 ‘말뫼 라이브’라는 이름의 종합 문화 시설을 도심 한 가운데 지은 것, 녹지가 많고 대기가 깨끗한 환경을 조성한 것 등이 모두 이런 목표를 위한 사업이었다. 외레순 대교 개통에 따라 말뫼 인구가 코펜하겐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코펜하겐의 인구가 유입되고 양쪽이 하나의 경제 지역으로 묶여 균형 있게 발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목표이기도 했다.

빌바오와 포틀랜드는 시민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강과 토양의 오염, 대기 오염 등의 문제를 개선해야 하는 절박한 이유로 재생 사업을 시작했다. 빌바오의 네르비온 강 주변은 현재 구겐하임 미술관을 비롯한 아름다운 건축물과 자연 환경으로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는 지역이 됐지만 처음부터 관광 자원을 위해 개발된 것은 아니었다. 시민들이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강변과 공공 장소들을 재조성하고 가꾼 결과이다.

포틀랜드가 환경 개선 사업으로 시작해서 도시 전체의 구조를 바꾸는 방향으로 재생 사업을 진행한 목적 역시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었다. 미국의 다른 도시들이 자동차에 의존한 라이프 스타일을 택하면서 대형 쇼핑몰 안에서 집중적으로 소비하는 데 길들여졌고, 그러는 사이에 도심 골목 사이의 소매점들, 레스토랑과 카페 등은 명맥을 잇지 못 했다. 주거지와 상업지구가 분리되면서 야간과 주말에 공동화 되는 지역들이 늘어났다. 이렇게 팽창되고 헐거워진 도시는 경제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쉽게 활력을 잃었고 ‘쇠락도시화’의 악순환에도 쉽게 빠져들었다. 그에 비해서 포틀랜드는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도심 지역에 활기가 있을 때 지속가능성이 있다는 통찰 하에서 팽창보다는 압축 전략을 취했고, 그에 따라 세심하게 도시를 설계해 갔다. 그 결과, 걸어서 20분 거리에 생활과 여가, 문화생활을 위한 모든 장소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어 하루 대부분의 시간 동안 활기가 유지되는 도심을 만들었다. 시민들은 자전거와 대중교통, 로컬 푸드를 선호하고 소비보다는 경험을 중시하는 라이프스타일을 누리게 됐고, 이에 매료된 젊은층이 계속해서 이주해 오고 있다.

히가시오사카의 경우는 조금 달라 보이지만 이 지역에 이미 존재하는 산업, 기업들이 지속가능성과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춰 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외부의 유망 산업, 대기업을 유치하려고 하기보다는, 지역 산업이 본래 가진 특성을 장점으로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가능성을 찾으려 한 점이 보인다. 이는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는 산업이 무엇인가’라는 식의 사고가 아니라 ‘지역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시민들이 어떻게 하면 이 지역에서 계속해서 안정적으로 살아가게 할 수 있는가’라는 식의 사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주민 주도의 거버넌스를 통해 공업 지구와 주거 지구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해 온 것, 어린이·청소년 대상의 제조업 체험 교육, 남녀평등 및 성소수자 인권을 위한 노력을 해온 것 등은 얼핏 각기 다른 방향인 것 같다. 그러나 이는 모두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산업 쇠퇴기에 청년층이 지역을 떠나는 데에는 경직되고 고루한 문화 탓에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운 환경 영향이 크다. 따라서 개방적이고 평등한 문화, 소통과 교류를 통해 지속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는 것은 산업쇠퇴 위기를 맞은 지역에 꼭 필요한 일이다.

이처럼 한 도시가 ‘살고 싶은 도시’라는 위상을 갖게 되면 경쟁력을 갖춘 인재들이 모여들고, 이들이 이 도시에서 창업을 하고 일자리를 만들어 내므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선순환이 생겨나게 된다. 결과적으로 산업 측면에서의 경쟁력도 갖출 수 있다. 말뫼 시의 혁신 전환을 이끈 리팔루 전 시장은 조선업 도시였던 말뫼가 IT, 에너지, 생명공학 등의 첨단 산업 중심지로 성공적인 전환을 한 비결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산업을 유치하고 육성할지 토론하지 않았다. 대신 젊은이들이 살고 싶은 도시를 만들고자 했을 뿐이고, 여기 살기 위해 온 젊은이들이 스스로가 일하고자 하는 산업을 이리로 끌어 온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2) ‘친환경’ 키워드의 도시 비전

네 도시 모두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으로는 ‘친환경’이라는 키워드가 있다. 말뫼와 빌바오가 도시 전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 ‘친환경’이라는 비전을 정한 것은 1990년대 유럽연합(EU)의 방향과도 관련이 있다. EU는 1987년 제정된 단일 유럽법(SEA)에서 환경 정책을 공식적인 공동 정책으로 명시한 이래로 유럽 각국에 친환경 및 자원 재활용 정책을 권고해 왔고, 이를 따르는 지역에 대해 원조 자금 등을 적극 지원했다. 따라서 제조업 쇠락 이후 전환의 계기를 찾는 도시들로서는 친환경의 비전을 취하는 것은 상당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특히 빌바오는 EU로부터 유럽 지역 원조(European regional aid)를 받아 도시 재생 자금으로 사용한 만큼 친환경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자금 지원을 노린, 타의에 의한 선택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당시 국제 이슈에 민감한 유럽 시민, 특히 젊은층은 친환경적인 라이프 스타일에 끌리고 있었을 것이므로 이들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거버넌스 구조라면 이와 같은 방향을 도시 비전으로 선정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산업 측면에서 볼 때도 친환경 키워드는 경쟁력이 있었다. 유럽연합의 환경 규제와 친환경 제품 인증제도, 재활용 의무화 등의 방향이 시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친환경 관련 산업이 장기적으로 확대되고 성장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말뫼와 빌바오가 친환경 분야의 연구개발, 산업단지 조성 등에 적극적이었던 것에도 이와 같은 전망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포틀랜드는 미국 도시 중에서 드물게 환경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깨닫고 강조해 온 지역이다. 미국 전 지역에 고속도로가 깔리고 자동차 중심의 라이프 스타일이 확장될 때 거꾸로 고속도로를 철거하고 대중교통과 자전거, 도보자 중심의 도심 체계를 구축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여기에 대중 활동가 출신의 닐 골드슈미츠가 시장으로, 환경보전 활동과 관련법 제정에 적극적인 톰 맥콜이 오리건 주지사로 일하던 1970년대에 도시 재생의 방향이 정해졌고, 시민을 소외시키고 환경을 파괴하는 식의 개발을 제어할 수 있는 주민참여 체계를 구축해 놓았기 때문에 현재까지 그 기조를 유지해 올 수 있었다.

또한 산업적 측면에서도 포틀랜드는 친환경 분야를 지향한다. 포틀랜드의 도시 개발 기획은 물론 기업 유치까지 담당하는 프로스퍼 포틀랜드는 집중 유치·지원하기 위한 4개 분야 중 하나로 ‘클린에너지&클린테크놀로지’를 정해 놓았고, ‘포틀랜드를 세계 그린 비즈니스 산업의 중심지 중 하나로 만든다.’는 비전 하에 활동하고 있다. 친환경 산업이 장기적인 경쟁력과 지속가능성을 가진다는 판단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히가시오사카의 지역 중소기업 지원 정책 안에도 친환경 키워드가 들어 있다. 지역 기업들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지방 정부가 지원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제안하는 분야가 환경 비즈니스 산업이다. 지역 기업들이 ‘환경 비즈니스 연합회’를 구성해서 연구 및 기술개발, 협력을 할 수 있도록 시 정부가 지원하고 있다. 또한 마을만들기협의회를 통해서 지역 용도 조정을 해온 것도 주거지의 환경을 쾌적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3) 공동체 거버넌스와 장기적 실행 기관

지역의 여러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협력하면서 공동의 비전과 목표, 실행계획을 도출할 만한 거버넌스가 네 도시에서 공통적으로 보인다. 말뫼는 리팔루 시장 당선 직후 구성한 전문가 및 시민 대표 TF를 통해서 도시의 미래 비전과 전환 전략을 도출했고, 이는 연정을 통해서 19년간 유지된 사민당 정부를 통해서 안정적으로 실행에 옮겨졌다.

빌바오에서는 도시 재생 사업 초기에 30개 마을 공동체들이 서로 자원을 차지하려고 극렬한 다툼을 벌이기도 했지만 곧 공동체 정신을 되찾고 논의한 결과 도시 전체를 위한 발전 방향을 찾을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빌바오 메트로폴리-30이라는 민관 합동 기관을 구성했고 이를 통해서 정치적 변동에 흔들리지 않고 장기간의 도시 전환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다.

포틀랜드는 미국에서도 유별나다고 평가될 정도로 주민 참여도가 높은 도시이다. 도시 개발과 재생의 초기 단계부터 주민 참여를 보장하고, 거의 모든 주요 결정들을 이를 통해서 내려오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것이 ‘프로스퍼 포틀랜드’라는 기관이다. 이는 포틀랜드 시의 도시재생과 경제개발 사업을 전담하는 기관이기는 하지만 시 소속이거나 산하기관은 아니다. 1958년 시민 투표로 설립된 ‘준독립형’ 기관이다. 시장의 임명과 시의회의 승인을 받은 임원회가 있기는 하지만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예산을 사용할 때 시청이나 시의회의 허락을 받거나 그 의견에 좌우되지 않는다. 도시재생 프로젝트는 최장 20년 정도 걸릴 수 있는 반면 정치인들은 4년마다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더 장기적으로 생각하고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 독립성을 보장하는 이유다. 2016년 기준 약 90여 명이 일하는 이 기관은 공공성과 전문성을 인정 받고 있는 덕분에 부동산 개발자, 건물주, 세입자 등 조정하기가 쉽지 않은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도 ‘포틀랜드를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고 공평한 도시로 만든다.’는 목표 하에 여러 가지 개발 사업들을 성공적으로 해올 수 있었다.

히가시오사카에서는 기업들이 소통하고 협력하고 공동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네트워크와 연구회 등이 다수 기능하고 있다. 또한 마을만들기 협의회를 통한 주민 주도 거버넌스가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입장을 조율함으로써 갈등을 조정하고 환경을 쾌적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4) 작은 비즈니스와 창업 친화적 산업 구조

사례 도시들은 대체로 한 때 커다란 산업 및 기업에 의존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말뫼, 빌바오, 포틀랜드에는 조선업이 크게 자리해 있었고 그밖에도 규모가 큰 제조업체들이 지역 경제와 고용을 떠받쳤다. 히가시오사카의 경우는 전통적으로 작은 공장들이 집적된 도시였지만 경제 성장기에 대기업들의 비중이 커지기도 했고 대기업 납품에 대한 의존도가 커졌었다.

전환기 이후, 이 도시들은 하나같이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들의 비중이 높은 구조로 바뀌었다. 동시에 창업이 활발하게 일어난다. 특히 연구개발 결과가 적용되고 기술집약적인 창업이 많은 구조라는 것도 특징이다. 적극적으로 창업을 장려하고 인큐베이팅, 투자하는 정책과 프로그램 등도 존재한다.

이런 변화가 의미 있는 것은 대기업 못지않게 중소기업, 창업기업들의 일자리의 질이 높을 수 있고, 젊고 역량 있는 인재들을 끌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이 도시들은 세계적인 제조업 축소 및 인구 감소 추세와 달리 인구가 유지되거나 유입되고, 청년 세대의 비중이 높아지는 중이다. 그만큼 삶의 질이 높고 청년층을 유인할 만한 문화적, 환경적 조건이 뛰어나다. 그런 만큼 일자리의 질도 상대적으로 높고, 청년 세대의 선호에 부합할 것이다. 따라서 이 일자리들이 어떻게 대기업 못지않은, 혹은 그보다 나은 요건들을 갖출 수 있는지를 주목하고 연구해 볼 필요가 있겠다.

[그림 5] 사례 도시들의 공통점

나. 전환을 꾀하는 도시들에 주는 시사점

(1) ‘살고 싶은 도시’라는 목표 및 전략의 의미

네 개의 도시가 모두 그 지역에서 살고 있는 시민들이 계속해서 안정적으로, 적정한 삶의 질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하는 데 초첨을 맞춰서 전환의 전략을 짰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많은 경우 경제 발전 전략을 짜고 유망 산업을 유치하려 할 때 ‘그 안에서 종사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들은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한 지역에 산업단지를 조성한다고 할 때,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어디에서 살게 되며, 어떤 돌봄과 교육, 문화생활, 소비 인프라를 누릴 수 있는지, 이를 종합한 삶의 질은 어떤 수준인지까지 고려하지는 않는 것이다. 때문에 신규 산업단지가 출범해서 잘 돌아감에도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장시간의 출퇴근 시간, 황량하고 불편한 주변 환경 등으로 고통을 받기도 한다. 또는 천편일률적 형태의 사택단지와 상가를 지어놓기만 하면 노동자에 대한 편의제공은 다 된 것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

그에 비해서 말뫼와 포틀랜드의 전환 전략은 시민들이 누려야 할 ‘라이프 스타일’까지 고려하고 있다. 생활의 편의만이 아니라 문화생활과 자연 자원을 누릴 권리, 건강한 식생활과 예술을 누릴 권리까지도 고려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나서서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어떤 형태로 정했다는 것이 아니다. 이 도시들에 나타난 ‘라이프 스타일’은 결과다. 한 지역 안에서 사람들이 계속해서 살아가고, 특히 젊은 세대가 활기를 가지고 살아갈 때 나타나게 되는 결과다. 그렇게 삶이 지속될 수 있도록 바탕을 깔아놓는 일을 정부가, 도시의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했을 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핵심 요소가 있다. 하나는 깨끗한 환경이고 다른 하나는 안정성이다. 말뫼에는 복지국가 시스템으로부터 오는 기본적인 안정성이 있었기 때문에 100년 된 조선소가 문을 닫고 수만 개 일자리가 사라졌어도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빌바오와 포틀랜드에는 촘촘한 공동체가 있다. 일자리를 잃었어도 바로 다른 지역으로 떠나기보다는 어떻게든 남아 있고 싶고, 조금은 숨 돌릴 여유를 제공해 주는 공동체가 있기에 이 도시들도 여러 산업이 쇠락하고 다른 산업이 시작되는 시기들을 넘길 수 있었다.

따라서 산업 변화기에 도시의 전환 전략을 짜기 위해서는 깨끗한 환경, 적정한 삶의 질을 유지시켜주는 인프라 및 문화, 그리고 사람들이 이 지역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최소한의 ‘안정성’ 보장 방법이 존재하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어떤 산업을 유치할 것인가, 어떤 건축 및 시설물을 통해 관광객을 끌어올 것인가 등의 전략은 위의 요건들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며, 정주하는 시민들의 지속가능성 없이는 어떤 시도도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도 위의 사례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2) ‘좋은 일자리’에 대한 다른 시각

4개 도시 사례를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한국의 상황과 다른 점이 보인다. 바로 ‘좋은 일자리’에 대한 시각이다. 최근 한국에서 시도된 지역 단위의 전환 전략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은 사례라 할 수 있는 ‘광주형 일자리’만 보더라도 ‘좋은 일자리는 대기업, 대공장의 고용에 의한 일자리’라는 인식에 여전히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말뫼, 빌바오, 포틀랜드, 히가시오사카 어느 사례에도 그런 인식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도시들 대부분이 한 때는 제조업 대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스웨덴과 말뫼 시 정부가 코쿰스 조선소가 문을 닫은 뒤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주면서까지 자동차 공장을 유치하려 했던 것만 봐도 일자리에 대한 인식이 단번에 바뀐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말뫼의 상황 및 환경에서 어차피 이와 같은 대규모 일자리가 유지되기 어렵다는 판단이 선 뒤에는 굳이 이 형태를 고집하지 않았다. 말뫼는 한동안 IT, 에너지, 생명공학 등 분야의 창업이 활발한 도시로 알려졌으나 최근에는 미디어, 게임 등 분야 창업이 가장 활발하다고 한다. 청년 세대가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공부하고 창업하는 문화가 정착돼 있기 때문에 주력 산업이 시대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미디어, 게임 등 신산업에서는 프리랜서, 파트타임 노동이 많기 때문에 자칫 노동자들의 불안정성이 커지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청년들이 이런 분야에서 이런 형태로 일하고자 한다면 여기에 안정성을 보완할 방법은 다른 차원에서 찾아보자는 것이 스웨덴 사회의 시각이다. 물론 기본적인 안정성은 국가가 보장하는 복지국가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빌바오에서는 서비스업과 문화예술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특히 청년층에서 늘어나고 있다. 포틀랜드에는 꾸준히 청년층이 유입되고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일자리를 미리 정해놓지 않고 이주해 오며,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에 들어가서 창업을 시도하거나 작은 공방, 푸드 트럭에서 일하면서 다른 일자리를 찾고, 취직을 하더라도 겸업을 하는 등의 문화가 있다. 야마자키 미츠히로 전 프로스퍼 포틀랜드 직원은 “포틀랜드의 청년들은 굳이 고용되어 일하기보다는 독립사업자로 일하는 것을 더 선호하며 두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삶을 지향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히가시오사카에서는 10인 전후의 작은 사업장들이라고 해서 흔히 ‘영세업체’라고 부를 때 떠오르는, 기본적인 안전과 근로조건도 지키지 않는 질 낮은 사업장이 아니다. 오히려 독보적인 기술력을 가지고 있어서 배울 것이 많은, 수평적인 협력 관계를 통해서 우주개발과 같이 흥미롭고 수준 높은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도 있는 일자리다.

이와 같은 일자리들이 ‘좋은 일자리’일 수 있으려면, 한국에서와 같이 대기업, 대공장에서 일해야만 적정 수준 이상의 임금과 근로조건, 사업장에서의 안전, 인격적인 대우, 성장 가능성과 기회 등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이어서는 안 된다. 중소기업 및 서비스업의 작은 사업장에서 일하거나 파견 및 하청 노동을 하면 적은 임금, 불합리한 근로조건,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위험한 작업 환경, 차별적이고 비인격적인 대우 등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면, 지역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지역에서 계속 살고자 하는 청년들이 존재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물론 지역에 대기업, 대공장이 계속해서 유지되며 많은 수를 안정적으로 고용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이런 논의 자체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많은 도시들이 전환 전략을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좋은 일자리’의 기준을 돌아봐야 한다. 청년들이 삶의 질을 누리면서 지역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하려면 어떤 일자리의 조건을 만들고, 이에 부족한 안정성을 다른 사회보장을 통해서 채워줄 수 있을 것인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만 한다.

(3) 지속가능성, 포용적 거버넌스, 그리고 개방성

네 곳의 도시들이 모두 도시의 전환 전략에 ‘친환경’의 키워드를 포함하고 있다고 앞에서 설명했다. ‘친환경’은 단지 재생에너지 시설을 많이 만들고, 건물을 친환경 규격에 맞추어 짓는다는 정도의 의미는 아니다. 더 편해지고 싶고 더 누리고 싶은 욕망에 따라서 점점 더 많이 소비하고, 에너지를 사용하고, 도시를 팽창시키는 라이프 스타일, 경제 및 개발 전략 자체를 포기한다는 의미까지 포괄하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가족 구성원마다 한 대씩 자동차를 소유하고 이 자동차들을 넣을 만한 차고가 있는 큰 집에서 살고, 이런 집들이 늘어선 그림 같은 주거 단지를 도시 외곽에 지어서 살아가는 것을 이상적인 삶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라이프 스타일 때문에 오히려 도시의 경쟁력은 낮아졌으며, 산책하고 즐길 만한 자연 환경은 파괴되고 오염돼 왔다. 물론 이렇게 생활 반경이 확대되는 동안 부동산 개발업자, 주택 건설업자, 대형 쇼핑몰 소유주와 운영자 등은 돈을 벌었을 것이고 세수도 확보됐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속가능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한국의 여러 도시들도 미국 문화의 영향 등으로 계속해서 팽창해 가는 라이프 스타일, 발전 전략을 취해 왔다. 산업 변화, 인구 감소의 국면을 맞아서 각 지역들은 어떻게든 활로를 찾으려 발버둥치고 있지만 기존의 방식을 되돌아보고 포기하려는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지역 일자리를 창출하려는 노력, 인구를 유입시키고 출산율을 높이려는 노력 모두가 결국은 기존의 팽창 지향적인 방식을 유지하고 지탱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또한, 계속해서 성장하고 팽창되어야 하는 기조 하에서는 필연적으로 힘이 약한 사람들, 이해관계 조정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소수의 사람들이 부가가치가 큰 사업, 임금이 높은 일자리를 차지하고 다수가 여기에서 밀려남에 따라 불평등과 빈부격차가 생겨나게 되지만 여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지방 정부는 거의 없었다. 거시적으로 부가가치가 창출되었고 경제지표가 좋아진다면 미시적인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여긴다는 것을 지방 정부들이 발표하는 각종 지표 및 정책 기조, 발전 전략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런 가운데서 도시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시민들의 삶이 불안정하고 불행해지는 것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이런 기조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라면 아무리 좋은 사례를 놓고 배우려 한들 큰 변화가 나타날 수 없다. 어떤 제목을 붙여서 정책을 실행한들, 실제 사람들의 삶은 그대로인 채로 공무원들끼리만 성과를 평가하는, 말의 상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도시 중 대부분에 ‘시민 누구도 배제되지 않았다고 느낄 만한’ 수준의 거버넌스 및 이해관계 조정 구조가 존재한다는 점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엘리트 및 기득권층, 정치적으로 대표되기 쉬운 자산가들, 설문조사에 쉽게 응하는 연령층 등의 의견만을 청취하면서 도시의 혁신 전환을 위한 의사결정을 내리고, 어떤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는 추동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렇게 초기 계획부터 상세한 방향까지 시민들에 의해 의사결정이 일어날 수 있도록 충분히 보장한다면 기존의 정책 방향, 지자체 대표의 정치적 성향이나 공약을 모두 뒤흔들 만한 큰 변화가 초래될 수도 있다. 이를 두려워해서는 앞의 사례들과 같은 성공적인 전환, 지속가능하고 혁신적인 전환을 이룰 수 없다.

앞의 도시들은 단지 가치지향적이거나 이상적이어서 이와 같은 거버넌스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자칫하면 도시가 쇠락하거나 공동화 될 수 있는 위기를 맞아서, 다른 방법들도 모두 실패하는 절망을 경험한 뒤에 ‘이 방법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절박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이런 구조를 만든 것이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이런 시도에 나서지 못 한 도시들이 더 많다. 그런 도시들은 ‘쇠락도시’의 길을 걷게 된다. 따라서 전환의 전략을 고민 중인 도시라면 앞의 사례들을 벤치마킹하려 할 때 어느 수준까지 해야 하는지부터 정해야 한다. 그 점이 성패를 확실하게 가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포용적 거버넌스를 지향한다면 필연적으로 ‘개방성’을 중요한 가치로 삼아야 한다. 말뫼는 유럽에서도 손에 꼽히는 다문화 지역으로 높은 개방성을 가지고 있다. 빌바오와 포틀랜드 역시 청년층의 의견이 지역 의사결정에 쉽게 반영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히가시오사카는 여성과 성소수자의 경제활동 및 사회 참여를 높이기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해 오고 있다.

즉, 지속가능성, 포용적 거버넌스, 개방성은 서로 연결된 가치이며, 각각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일 때 다른 가치들도 실현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요소들이 조화를 이룰 때 그 지역은 비로소‘청년들이 살고 싶은 도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4) 예측 가능한 자원

해외 사례를 조사하다 보면 이와 유사한 국내의 제도 및 정책, 사업들이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앞의 사례들에서 볼 수 있는 창업 지원, 도시 재생 사업, 골목 상권 활성화 지원, 중소기업 경쟁력 제고 프로그램, 프리랜서 노동자를 위한 지원 등 모두 정부 및 기초자치단체 단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정책 및 제도들이다.

그러나 중대한 차이가 하나 있다. 국내에서 실행되는 제도 및 정책들은 장기간 같은 형태로 유지됨으로써 ‘예측 가능한 자원’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유지되다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은, 대체로 1~2년 단위의 사업이거나 이벤트성 지원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시민들에게 충분히 알려지기도 어렵고, 참여를 유도하기도 어렵다. 필요성이 있어서 만든 제도인데 이를 수혜할 대상을 찾기 어려운 모순적인 상황에 높이는 것이다. 운 좋게 이 제도의 수혜를 받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도움을 받고 전기를 마련할 수도 있겠지만 한 지역에서 살아가는 시민 전체에게 그와 같은 수혜가 돌아갈 수는 없다. 물론 재원에 한계가 있으므로 어떤 제도 및 지원이어도 수혜자의 수는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제도가 장기적으로 유지된다면, 사람들은 그와 같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되면 이를 이용할 수 있다는 ‘예측’을 할 수 있다. 당장 이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일종의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제도여도 몇 년 단위로 사라진다면 그런 예측 가능한 사회적 자원으로 기능할 수 없다.

앞의 사례들이 민관 협력 또는 협동의 형태로 장기적으로 작동되는 기관을 만들고 최대한 독립적으로 운영되게 한 것은 이런 이유다. 이 기관을 통한 사업 및 지원이 도시민 전체가 누릴 수 있는 자원이 되도록 하고 지속가능하게 하려 한 것이다. 운영이 투명하고 공정해야 함은 물론이다.

4. 결론: ‘전환’을 시도하는 데 꼭 필요한 한 가지

말뫼, 빌바오, 포틀랜드, 히가시오사카. 이 도시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군산 거제 통영 등 한국 제조업 도시들의 전환 모델로 삼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과는 다른 점들이 너무 많은 지역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이 연구 과정에서도 그와 같은 한계가 보인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다른 점은 지역 공동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과정, 그리고 이에 대한 주민들의 가치관과 태도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일마 리팔루 전 말뫼 시장은 도시민 전체에게 영향을 주는 중요한 전환을 시도하려면 시민 중 누구도 ‘이 의사결정에서 나는 배제됐다.’고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야만 수많은 법률과 조례를 바꾸고,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면서 가야 하는 ‘전환’의 여정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행정 사업들은 ‘주민 의견 청취’, ‘주민 의견 조사’ 등의 형식적인 단계를 거칠 뿐 ‘시민 누구나’ 동의할 때까지 거버넌스를 운영한다는 것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전환’이라 할 만한 큰 변화의 결정을 하지 못 하는 가장 큰 이유다. 이런 과정 없이는 아무리 많은 정책들을 만들고, 예산을 쓰고, 사업을 잘 수행하더라도 한 도시가 쇠락 또는 소멸로 가는 흐름을 반전시킬 정도의 효과는 나타날 수 없다.

물론 이는 행정기관들만의 잘못은 아니다. 지역민들이 ‘공동체’를 위한 토론 및 결정 과정에 참여한 경험이 거의 없다는 점이 근본적인 문제다. 정부 예산으로 어떤 사업이 벌어진다고 할 때, 이를 통해서 나와 내 가족, 조금 넓게는 지역 공동체가 어떤 이익(예를 들면 부동산 가격 상승)을 상대적으로 더 얻을 수 있는지에만 주목하는 것이 한국 사회를 사는 보통 사람들의 가장 흔한 반응이다. 그보다는 당장 나는 손해를 볼 수 있더라도 장기적으로 우리 지역이 지속가능성을 얻고, 후손들이 오래 그 수혜를 누릴 것이라는 생각으로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야만 ‘전환’의 시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은 ‘정치’를 통해야만 무엇 하나라도 시도해 볼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드물게 전국민이 정치적 메시지에 관심을 갖는 선거 때에만이라도 부동산 가격 상승보다는 지역의 지속가능성, 시민 누구나 누려야 할 ‘삶의 질’을 지키는 방법 대해 말하는 지역 정치인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참고 문헌 및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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