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은 총선 주요 의제가 될 수 있을까
정치는 의제를 현실화하는 영역이다. 공약이든 정책이든, 혹은 여론에 따른 조치든 간에 정치권에서 논의를 거쳐야 실현 여부가 판가름 난다. 또한 정치는 그에 앞선 공론화 과정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기본소득이라는 제도 역시 정치권에서 어떻게 다뤄지는지에 따라 현실이 될 수도 있고, 허상에 그칠 수도 있다. 2020년엔 4.15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다. 기본소득은 이 선거의 주요 의제가 될 수 있을까. 정치권에선 기본소득의 실현 가능성을 어떻게 타진하고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토론회가 지난 2월 4일 오후 2시 국회 의원회관 제2세미나실에서 ‘기본소득의 정치적 실현가능성’이란 제목으로 열렸다. LAB2050이 유승희(더불어민주당), 김세연(자유한국당), 채이배(바른미래당) 국회의원과 공동 주최로 개최한 것이다.
이 토론회는 여러 정치 주체들이 두루 참여했다는 특징이 있었다. 집권 여당, 보수와 중도 야당의 국회의원이 공동 주최했고, 토론자로 김병권 정의정책연구소장, 서정희 군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용혜인 기본소득당 대표, 유영성 경기연구원 기본소득연구단장, 조준상 바른미래연구원 연구위원, 최승노 자유기업원 원장 등 여러 성향의 정당과 정책연구소, 연구자가 참여했다. 기본소득이 기존 좌우 구도를 넘어선 의제가 됐다는 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여야 국회의원이 말하는 ‘기본소득의 필요성’
이날 토론회에서는 기존 정치인들이 기본소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였다. 유승희 의원은 인사말에서 지난해 11월 지역구인 성북동에서 일어난 네 모녀의 사망 사건을 언급하면서 “우리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했지만, 여전히 최소한의 소득 보장이 화두”라고 했다.
이어서 “전세계에서 정책 대안으로 부상 중인 기본소득은 선별복지의 사각지대를 없애고 소득 재분배 효과가 높은, 포용사회를 이루는 가장 확실한 방안”이라고 말했다. 또 유 의원은 기본소득이 국민의 지지를 얻고 정치적으로 실현되기까지는 더 논의가 필요하다면서 “국회·정부·민간이 참여하는 국가기본소득위원회 설치”를 제안했다.
김세연 의원은 “인공지능의 노동력 대체, 소득 불평등과 복지 전달 체계의 비효율로 인해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정부가 지금처럼 국민의 삶을 옥죄는 규제를 남발하는 행태를 개선하지 않으면 기본소득이 현실에서 자리잡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채이배 의원은 “노동 없는 미래에 대한 우려가 점차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면서 “기업은 기존 노동자들을 해고하지 않는 대신 신규 채용을 최소화 하고 있으며 기계가 대체하지 않는 일자리는 질 낮은 일자리일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이 때문에 기본소득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면서 “지금까지 없었던 시도인만큼 도입의 필요성부터 구체적 지급 방식까지 사안 하나하나에 대해 폭넓은 의견 수렴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기본소득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
공동 주최자이자 이날 토론회 좌장을 맡은 이원재 LAB2050 대표는 “요즘 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란 책을 읽고 있다”고 전하면서 “성경의 포도원 이야기에서 포도원 주인이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에게도, 저녁쯤부터 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똑같은 임금을 준 것은 누구라도 생존할 권리, 안전할 권리가 있다는 의미”라면서 “그것이 기본소득의 정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첫 번째 발제자를 맡은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안효상 상임이사는 기본소득이란 아이디어가 부상한 배경으로 ‘복지국가의 위기’, ‘불평등 심화’, ‘기후변화’, ‘기술 발전으로 인해 불투명한 노동의 미래’ 등을 꼽았다. 무엇보다 (기본소득 이외의) 다른 대안이 부재한 것이 원인이라고도 지적했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 곧 실현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안 상임이사는 기본소득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로 ▲유의미한 지지층의 미형성 ▲(행정적) 정책 실현 능력의 부족 ▲기본소득 정치 연합의 미형성 등 세 가지를 꼽았다. 기본소득의 도입으로 다수가 수혜를 받겠지만, 기본소득을 요구하는 지지층은 흩어져 있고 이들이 대중을 설득하기엔 여전히 노동 윤리가 강고하다고 안 상임이사는 지적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배경으로 ‘포퓰리즘’이 제시됐다. 포퓰리즘은 보통 부정적 맥락에서 사용돼 왔지만, 최근 유럽과 미국에서 부흥하는 포퓰리즘 흐름은 ‘모두의 것을 모두에게 나눈다’는 기본소득의 정당성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구성하는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안 상임이사는 이와 같이 기본소득의 정당성과 합리성, 필요성의 기반 위에서 정치적 행위자들이 전략적으로 ‘기본소득 정치 연합’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기본소득 정치 연합의 형성이 곧바로 기본소득 실현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지만 문제의식들이 서로 만나고 대결하는 과정에서 현실화 가능성이 열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 차원 국가기본소득위원회 설립하자”
두 번째 발제를 맡은 윤형중 LAB2050 정책팀장은 2021년부터 전국민에게 월 30만 원을 지급할 수 있는 ‘국민기본소득제’를 제안한 배경과 기본소득의 재정적 실현 가능성을 높이는 접근법을 설명했다.(국민기본소득제: 2021년부터 재정적으로 실현 가능한 모델 제안)
“기본소득의 재원을 어디에서 가져오느냐에 따라 불평등 완화, 기후위기와 기술발전으로 인한 노동감소 대응 등 무엇을 위한 기본소득인지 그 정체성이 분명해진다”면서 “기본소득이 현실 정책이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재원 모형이 제안되고, 논박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재정적 실현가능성을 높이는 기본소득 접근법으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누진적인 세금 제도와 연계한 기본소득이다. 이는 선별복지에 비해 부작용이 없으면서도 재분배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둘째, 국민 대다수가 더 내야할 세금보다 받는 액수가 많은 기본소득이다. 셋째, OECD 평균보다 작은 한국의 사회복지 지출 규모를 늘리는 차원에서의 기본소득이다. 한국의 경우 사회복지 지출을 OECD 평균 정도만큼만 늘려도 2018년 기준 204조원(국내총생산 1893조원의 10.8%)의 예산을 확보할 수 있다. 전국민에게 월 33만 원을 지급할 수 있는 규모다.
윤 팀장은 세 가지 접근법을 고려해 기존의 재원 모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며 LAB2050의 국민기본소득제, 강남훈 한신대 경제학과 교수의 재원 모형,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에 나선 앤드류 양의 자유배당금제 등을 소개했다. 나아가 21대 국회에서 보다 구체적인 논의가 이뤄지기 위해서라도 정부와 국회, 민간이 두루 참여하는 ‘국가기본소득위원회’를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기후 위기, 불안정 노동, 데이터 자본주의 관점
이어서 이원재 대표의 진행으로 토론이 이어졌다. 김병권 정의정책연구소장은 “국회에서 기본소득의 정치적 실현 가능성을 두고 토론회가 열린 것을 보니 기본소득이 정치 안으로 들어와 있는 현실을 잘 보여주는 듯 하다”고 운을 떼며 기본소득의 도입이 불가피한 현실을 언급했다.
“무상급식이나 반값등록금, 서울시의 청년수당과 성남시의 청년배당 등이 도입된 경로를 보면, 기본소득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현실의 상황과 압력”이라면서 “특히 불평등과 기후 위기라는 상황적 요인이 국내 정치권으로 하여금 기본소득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사회적 합의를 위해서는 위기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가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노동의 불안정성과 미비한 사회안전망, 기후 위기 등의 상황 논리를 탑재한 기본소득 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기본소득당 용혜인 대표는 “정치는 시대의 보편을 형성하는 것인데 반해 파편화된 노동과 억압적인 가족·사회·공동체의 현실에서 보편을 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며 “한국 사회에서 청년, 여성, 장애인, 노동자, 기초생활수급자 모두를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엮어낼 수 있는 연결고리는 기본소득이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기본소득이 재정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는 시각에 대해 용 대표는 “민주주의는 선거 및 투표 과정에서 막대한 비용이 들지만 누구도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하지 않는다”라며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보편을 향한 열망을 만들 수 있고 그것이 마땅히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면 변화는 가능하다”고 말했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운영위원인 서정희 군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LAB2050의 ‘국민기본소득제’가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하여 기본소득의 현실성을 논하는 데 물꼬를 텄다”고 평가하는 한편 증세에 소극적인 재정 모형의 한계를 지적했다. 서 교수는 “기본소득에 대한 명시적 지지를 표명하는 행위자들이 늘어난다고 해서 지속적인 정치적 동맹 구축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며 “헌신 없이 표명하는 ‘값싼’ 지지는 도움이 안 되고, 기본소득의 원칙과 바람직성을 중심으로 정치 연대를 구성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조준상 바른미래연구원 연구위원은 유급노동으로서의 ‘일’이 자동화로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에 회의를 표하면서, 오늘날 데이터 자본주의가 다수 시민의 ‘그림자 무급노동’을 통해 막대한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 디지털·데이터 경제라는 토대에 부합하는 시민의 경제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기본소득을 ‘(데이터) 기본배당’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관점이다.
유영성 경기연구원 기본소득연구단장은 증세 저항을 우려하면서 먼저 적정한 기본소득 액수에 대해 합의하고 난 다음 재정적 실현 가능성을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세금을 더 걷더라도 세금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하고, 정당성이 있는 재원이라 하더라도 얽히고설킨 이해관계를 풀어서 끌어오는 것이 쉽지 않다”면서 “종합적인 재원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유 단장은 “경기도는 지역화폐로 청년기본소득을 지급해 청년과 지역 소상공인의 연합을 도모하고 있다”며 “지지층을 형성하고 정치 연합을 이루려면 농민 기본소득, 장애인 기본소득 등을 먼저 도입하고 이를 지역화폐와 결합하는 식의 전략이 필요할 수 있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최승노 자유기업원 원장은 기본소득을 위한 증세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시행될 수 있을지 의문을 던졌다. 그는 “기본소득을 받고 사람들이 원하는 일만 하게 된다면 사회에 필요한 노동력이 부족해 지면서 사회적 부가 크게 감소할 수밖에 없다”는 우려를 표하면서 “사회의 부가 감소하면 기본소득의 지속 가능성도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재분배를 통한 양극화 완화가 목표라면 현실적인 대안으로 조세체계의 누진성을 강화하거나 음의 소득세를 도입할 수 있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처럼 기본소득, 그리고 국민기본소득제의 재정 모형에 대해 여러 찬반 의견이 제기됐고 당장 하나의 결론이 도출되지는 못 했다. 그러나 본 토론회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상’에 가깝게 치부되던 기본소득이 어느새 우리 현실 가까이 와 있다는 점을 일깨웠다. 원내 3당 국회의원이 동의하고 기본소득당이 창당되는 등 현실 가능한 정책으로써 위상을 보여준 동시에 정치권과 시민사회에 주어진 과제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후 위기, 불안정노동, 소득 불평등, 데이터 자본주의 등 급변하는 사회와 닥쳐오는 위기 속에서 ‘미래의 대안’으로 기본소득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지는, 4.15 총선 그리고 2022년 대선을 통한 정치의 역할에 달려 있을 것이다.
참고 자료
언론 보도
기본소득, ‘왜’ 그리고 ‘어떻게’ (라이프인, 2020.02.10)
기본소득제 실현 가능한가… 재정확보, 세금 아닌 다른 대안 없나 (실버아이뉴스, 2020.02.07)
기본소득의 정치적 실현가능성을 논하다 (복지타임즈, 2020.02.06)
총선 이슈로 부상하는 ‘기본소득제’ (한국경제, 2020.02.04)
매달 65만원의 기본소득을 국민에게 준다면(중기이코노미, 2020.02.04)
“기본소득 필요”…현실적 추진 방안은? (국회방송, 2020.02.04)
기본소득 실현 국회 토론회…“정부 재정정보 공개·재원모형 논의 선행해야”(국회뉴스ON, 2020.02.04)
기본소득 실현 가능할까…”증세 등 재원 마련 국민적 합의 우선” (뉴스1, 2020.02.04)
관련 포스트
[솔루션2050_04] 국민기본소득제: 2021년부터 재정적으로 실현 가능한 모델 제안
[IDEA2050_016] 국민기본소득제, 악플 사이에서 찾아낸 새로운 질문들
[IDEA2050_001] 기본소득과 사랑의 관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