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도시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방법

LAB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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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min readJan 8, 2020

[IDEA2050_021]

황세원 LAB2050 연구실장

출처 : 프리픽

수도권과 지방의 불균형은 어쩌면 우리 사회에 계급, 신분처럼 넘을 수 없는 구분이 아직도 있다는 증거인지 모른다. 우리가 그런 차이를 아직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으며 이를 없애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뜻일 수도 있다.

지난해 한 경남 지역에서 사는 20대 청년들과 집단심층면접(FGI)을 했다. 그때 한 남성은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는 말을 누가 만들었는지, 그 말이 제일 싫다”고 했다. 지방 도시에서 성장하는 동안, 조금이라도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수도권으로 가야 한다는 압박을 계속해서 받는다. 지역에 남고 싶다고 하면 “네가 남들보다 뭐가 부족해서?”라는 말을 듣고, 심지어 부모님으로부터 “네가 여기 남아 있으니 꼭 실패한 사람인 것 같아서 민망하다.”는 말을 듣는다고도 했다. 이런 현상의 바탕에는 수도권과 지방의 삶에는 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주요 기업들과 대학, 종합병원, 편의시설 등이 다 수도권에 몰려 있기는 하지만 수도권 살이에도 단점은 있다. FGI에서 한 남성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단기 일자리 때문에 서울에 몇 달 산 적이 있었는데 출퇴근 지옥철이 너무 힘들었어요. 그 뒤로는 서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확 줄었어요.”

대학 서열에 대한 인식 때문에 수도권이 지방보다 더 살기좋다는 인식이 강화되고 있다. 출처 : 셔터스톡

같은 주거비로도 서울에서는 창문 없는 고시원에서 살아야 한다면 지방에서는 방이 여럿인 널찍한 집에서 살 수 있다. 생활비도 덜 든다. 더 쾌적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장점은 서울이라는 지역이 가지는 압도적인 위상에 비하면 너무 작게 여겨진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이 모여서 마치 신분 차이처럼 서울 사는 사람에 비해 지방 사는 사람의 삶의 질은 낮을 수밖에 없다는 고정관념이 만들어진다.

이런 인식을 합리적 근거도 없이 강화하고 있는 것이 서울과 수도권, 지방 대학들 순서로 정렬돼 있는 대학 서열이다. 청년기에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서울로, 수도권으로 몰리고 이것이 계속 이어지는 현상이 문제라고 생각된다면 이미 어느 시점에는 이를 전환시킬 정도의 시도가 있었어야 했다. 지방 대학 교수의 처우를 서울보다 훨씬 높이거나, 세계 유수의 대학 교수들을 파격적 조건으로 초빙하고, 등록금을 확 낮추는 등의 시도가 있었어도 이런 서열이 공고하게 유지됐을까?

지방 도시 일자리 질이 낮은 것은 당연?

지방에 있는 일자리가 수도권보다 못 한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도 한번 살펴보자. 한때 울산 거제도 등 중공업 일자리는 서울의 어느 일자리에 견줘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높은 임금과 안정성을 자랑했다. 개발연대 시기 정부가 낙점한 대로 해안 지역에 위치했을 뿐 본래의 지역 경쟁력이 있어서 생겨난 것은 아니지만 그 제조업 기업들 덕분에 한동안 이 도시들은 지역 경제나 일자리, 인구 걱정을 하지 않았다.

<전국 대비 경상남도 청년 실업률 변화>

자료 : 통계청 경제활동 인구 조사. ‘경상남도 청년친화도시모델 연구’(2019)에서 재인용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제조업 고용이 위태로워지면서 이 도시들이 급격히 흔들리고 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위기는 이미 예정돼 있었다. 오직 대기업에 직접 고용된 일자리 외에 지리적·산업적으로 인접한 일자리들의 질은 높지 않았다. 다른 지방 도시들의 일자리와 큰 차이가 없었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양승훈)에 따르면, 거제 지역에서는 남성 위주의 대기업 제조업 일자리만 독보적인 위상을 유지해 왔다. 따라서 여성들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해왔고, 경기가 하강하자 이주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왜 지방 도시의 일자리 질은 낮을 수밖에 없을까? 서울보다 경제 규모가 작고, 서울보다 고용된 인력들의 스펙, 숙련도 등이 낮으므로 처우가 좋을 수 없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이 역시 현재 나타난 차이를 아예 고착된 것으로 보는 인식일 뿐이다. 임금을 높일 수 없다면 다른 조건들을 개선할 수도 있다. 하루 6시간 정도로 근무시간을 짧게 하거나, 노동자 개개인에게 자기통제권을 더 주고, 기여하는 만큼 기업 이윤을 배당하고, 자기계발을 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식이다. 오히려 이런 시도는 수도권에서 더 많이 일어나고 있다. 인재가 수도권으로 몰리는 것은 단지 그곳이 수도권이어서만은 아니다. 이런 조건들이 수도권에만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좋은 일자리는 서울에만 있다는 인식은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출처 : 프리픽

만일 어느 지방도시의 정부에서, 우리 지역에서만큼은 어떤 일을 하든 부당한 처우를 당하거나, 임금이 체납되거나, 야근수당을 못 받거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일을 강제로 해야 하는 일이 없도록 철저하게 관리한다고 나서면 어떨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검증된 바는 없지만 그런 시도조차 한 적이 없다는 점이 문제다.

혁신도시, 기업도시 등의 이름으로 서울에 있던 공공기관과 기업 본사들을 지방으로 내려보낸 정책이 이 차이를 바꿔보려는 시도였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좋은 일자리는 서울에 있는 일자리이고, 지방에서 자생적으로는 그보다 나은 일자리가 생길 수 없다.’는 인식을 더 강화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방법은 지방을 활성화하고 ‘서울보다’ 혹은 ‘서울 못지않게’ 살기 좋은 곳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정부가 수도권에 계속해서 택지를 개발하고,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수단에 계속 투자하고 있는 것도 실패의 한 원인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방에 있는 직장에 다닐 뿐, 지방에서 살아가게 되지는 않았다.

청년에게 힙한 해외 지방도시들

이러는 동안 ‘어떻게 해도 서울과 지방의 차이는 분명하다.’는 생각만 더 강해지고 있다. 도시재생 등 지방의 쇠락과 소멸을 막아보려는 정부 사업이 시행되고 있지만, 이와 같은 생각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면 의미 있고 지속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지방에서 오래 살아온 주민들부터 큰 기대가 없다. 정부 돈이 들어와서 잠깐이라도 부동산 가격이 들썩이면 얼른 가진 집이나 땅을 팔려는 생각만 강하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현금 중 적지 않은 금액은 아마도 수도권에 사는 자식들에게로 갈 것이다.

이렇게 고정된 생각들은 현상을 고착시킬 뿐이다. 변화를 원한다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왜 지방에서 사는 삶이 수도권에서보다 더 나을 수 없을까? 지방 일자리의 질이 왜 수도권보다 더 높을 수 없을까? 왜 지방 대학들의 경쟁력이 수도권보다 더 높을 수 없을까? 왜 수도권보다도 더 청년들이 살고 싶어하는 지역이 대한민국에 하나도 없을까?

2019년에 경남연구원과 LAB2050이 공동으로 했던 ‘경상남도 청년친화도시모델 연구’는 이런 질문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하강하는 속도를 조금 늦추는 정도가 아니라, 경남을 수도권보다도 더 청년들이 살고 싶어하는 지역으로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연구했다.

해외 다른 나라들도 수도를 중심으로 산업과 인재가 몰려 있는 현상은 비슷하다. 그러나 수도 못지않은 경쟁력을 가지고 있으며 청년 세대에게 더 ‘힙하게’ 여겨지는 지방 도시들도 있다. 스웨덴의 말뫼, 스페인의 빌바오, 미국 포틀랜드가 그런 도시다. 세 곳 모두 한때 제조업 성장에 따라 경제와 인구가 크게 팽창했다가 다시 산업 경쟁력 하락으로 위기를 겪었다. 그렇지만 쇠락도시(rust-belt city)의 악순환에 빠지지 않고 과감하게 기존 산업과 결별한 뒤 혁신적인 전환을 시도해서 다시 활력을 찾았다.

일본 오사카 지역에 있는 히가시오사카(東大阪)는 일본 제조업 도시들의 쇠퇴 속에서 드물게 산업의 활력을 되찾고, 청년 인구의 비율이 다시 늘어나고 있는 곳이다.

말뫼 ‘터닝 토르소’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옛 코쿰스 조선소 자리. 사진 : 황세원

이 네 도시들이 시도한 전환 전략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첫째, 지역의 경제 및 산업 발전의 관점보다는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높은 삶의 질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전환의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다.

두 번째 공통점은 ‘친환경’이라는 키워드다. 친환경 산업 기업들을 유치하거나 창업을 지원하고, 관련 연구에 투자하는 등 정부 차원의 프로젝트 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친환경적으로 바꿔가는 노력도 있었다. 이는 그 분야가 유망하다는 판단 때문이 아니었다. 젊은 세대들이 일하고 싶어하고 공부하고 싶어하는 분야를 지원하고,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의견대로 도시를 바꿔갔다. 그 덕분에 전환에 성공했다는 것이 그 과정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설명이다.

좋은 일자리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

세 번째는 공동체의 거버넌스와 장기적인 실행기관이다. 모든 시민의 삶에 관계돼 있고, 많은 일자리와 사업장에도 영향을 주게 될 큰 변화가 일어난다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반발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수많은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시민들의 의견을 조율할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네 도시에서는 긴 시간과 자원, 노력을 투입해서라도 이 거버넌스를 운영하고, 시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동력으로 삼아 전환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리고 정치적인 변화에 따라 흔들리지 않도록 이를 장기적으로 실행할 기관들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도시들은 한 때 제조업의 대규모 일자리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작은 비즈니스와 창업 친화적인 구조로 바뀌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기에는 ‘좋은 일자리’에 대한 다른 시각이 바탕이 됐다. 특히 말뫼와 포틀랜드에서는 “청년들이 지금 일하고 싶은 분야에서, 일하고 싶은 형태로 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시각이 보인다. 게임, 미디어, 예술 등 분야에서 일하고 싶어하고, 전일제보다는 프리랜서, 원격근무 등으로 일하는 것을 선호하면 그런 일자리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사회 제도를 그에 맞추면 된다는 것이다.

<말뫼, 빌바오, 포틀랜드, 히가시오사카의 공통점>

물론 해외 사례들도 자세히 뜯어보면 한계는 있다. 유럽 도시들은 밀려들어 오는 이민자들의 일자리나 삶의 질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지 못 하고 있고, 미국은 사회보장제도가 약하다는 한계를 넘기 어렵다. 히가시오사카는 지금 의미있는 시도를 하고 있지만 일본 전체의 제조업 쇠퇴와 고령화로 인한 인구 감소의 흐름에 다시 휩쓸릴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 해도 배울 점이 최소한 한 가지는 있다. 수도권이 아닌 지방 도시라 해도 ‘청년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도시’라는 비전을 가질 수 있고, 혁신적인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시점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수준 높은 대학과 일자리가 있는 도시가 서울이 아닌 다른 곳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경쟁력 있는 기업과 인재들이 스스로 이주를 할 것이고, 그 때문에 좋은 일자리들이 더 많이 생겨나는 선순환이 일어날 것이다. 불가능하다고, 어차피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그 곳은 영영 그런 도시가 되지 못 할 것이지만 말이다.

LAB2050은 ‘경남 사회혁신 국제포럼’을 경상남도 등과 공동주최합니다. 1월 9일 오후 열리는 기조세션에서 일마 리팔루 말뫼 전 시장, 고초네 사가르뒤 빌바오 부시장, 샘 아담스 포틀랜드 전 시장,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발제를 하며 이원재 LAB2050 대표가 진행하는 토크 콘서트가 이어집니다. 이 주요 내용을 비롯해서 국제포럼의 소식을 추후 블로그 콘텐츠를 통해 전달해 드릴 예정입니다.

황세원 LAB2050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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