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뒤의 사람들이 꺼낸 자기 이야기

Sunghee Woo
12 min readNov 2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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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당사자들이 만들어서 비범했던 언서페 세션 후기(1) #사회혁신을 위한 통번역의 역할

나는 삶의 문제에 봉착하면 먼저 주위를 둘러본다. ‘나 혼자만 겪는 걸까, 아님 다른 사람들도 그럴까?’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왠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 이야기만 나누었을 뿐, 아직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거대한 구조 속에서 작은 개인일 뿐인 나는 한없이 무력하게 느껴지지만, 여럿이 모여 그 문제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면 작게라도 변화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사회 변화를 만드는 데에는 수 백, 수 천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그 시작은 문제에 공감하는 당사자들이 모여서 이야기 나누는 것이 아니었을까?

‘언서페’의 기록자인 나는 스물 일곱 개 세션 중에 어디에 참여할 지 무척 고민했다. 언유주얼서스펙트페스티벌(이하 ‘언서페’ Unusual suspects festival)는 서로 다른 영역과 분야의 사람들끼리 만나서 주제와 형식의 제약 없이 3일동안 서울 곳곳에서 열린 대화의 장인데, 주제나 모이는 사람들이 독특하고 흥미로웠다. 도대체 어디에 갈까 고민하던 나는 내가 열었던 세션을 제외하고 세 개 세션 —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회혁신을 위한 통번역의 역할>과 <내 전공은 지리구요>, 그리고 <WORKIDSHOP>에 참여했는데, 그 이유는 평소에 이런 사회혁신 관련 행사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평범한’ 사람들이 여는 ‘비범한(unusual)’ 모임일 듯 해서다.

참가자들의 한 문장으로 말하는 언서페 서울 ⓒ듣는연구소
  •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회혁신을 위한 통번역의 역할> 세션은 계기부터 언유주얼했다. 언서페 서울의 주관단체인 씨닷에서 이번 언서페를 비롯해서 사회혁신과 관련된 국제행사에서 자주 통역을 맡아주는 통역사에게 “늘 통역부스 뒤에서 연사들의 말을 옮겨주셨는데요, 혹시 통역사분들이 직접 하고 싶은 말은 없으세요?” 라며 세션을 제안해서 열리게 되었다고 한다. 한 번도 이런 대화 모임을 열어본 적 없는 통역사 분들인지라, 어떻게 진행할 지를 더듬더듬 배워가며 준비하고 계신다고 들었을 때 ‘이 세션에는 꼭 가리라’ 마음먹었다.
  • <내 전공은 지리구요>는 대학에서 지리학을 전공한 사람들을 소환하는 세션이다. ‘지리가 좋아서 진학했지만 사회에서 완전히 다른 일을 하고 있는 나, 그렇다고 일을 그만 둘 수는 없고, 작게나마 같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라는 생각으로 이야기 모임을 열었다고 한다. 지리학만큼이나, 우리사회에서 전공과 관련된 직업군을 찾기 힘든 사회학 전공자인 나에게도 무척 공감이 되는 얘기였다.
  • <WORKIDSHOP>에서는 일하는 엄마아빠와 아이들이 한 공간에서 하룻동안 자기 볼 일(?)을 보며 공존했다. 일터와 돌봄은 꼭 구분되어야 할까? 아이가 나의 일하는 시간과 장소에 들어오는 것은 어려운 일인지를 고민했던 엄마아빠들이 모였다. 주제에 대해 이야기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이날 하룻동안 아이들과 엄빠가 공존하는 ‘실험’을 했다. 과연 어른들은 업무를 잘 볼 수 있었으며, 아이들은 심심하지 않게 하루를 보냈을까?

앞으로 3회에 걸쳐 위의 세가지 세션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전하려 한다. 이 세션들은 자기 삶의 문제에 대한 대화가 요청되었을 “저요!”하고 반갑게 모인 ‘평범한’ 사람들의 모임이란 공통점이 있다. 당사자들이 모여서 처음으로 자기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고(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회혁신을 위한 통번역의 역할), 이후에 같이 해 볼 수 있는 작당에 대한 아이디어를 나누기도 했으며(내 전공은 지리구요), 혼자서는 하기 어려운 실험도 함께 해 보았다(WORKIDSHOP). 각 세션이 모두 평범한 당사자들이 모였기에 비범했던, 언유주얼서스펙트페스티벌이 아니면 만나기 힘든 언유주얼한 세션들이었다.

‘벽 뒤의 사람들’이 털어놓은 첫 자기 이야기

통역사는 그림자로서 있다 보니 내 이야기를 하고 싶기도 해요. 모든 통역사들이 자기 얘길 갖고 있지만 우선순위가 아니다보니 뒤로 미뤄두며 살고 있어요. (이세현)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회혁신을 위한 통번역의 역할>에는 사회혁신 분야에서 통역하는 통역사 세 명과 통역사를 ‘사용’하는 사람들, ‘청중’의 입장에 서 통역사를 자주 접하는 직장인, 프리랜서, 비영리기구 활동가 등 다양한 이들이 모였다.

흔히 통역사는 ‘벽 뒤의 사람들’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국제회의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리시버를 통해 동시통역사의 목소리는 듣지만, 회의장 한편에 마련된 통역부스 안에 있는 통역사의 얼굴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혁신에 관한 전문적인 강연의 내용을 모두 섭렵하고 소화해서 다룰 것만 같은 통역사들이 그 주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모인 듯했다.

통역사들은 어쩌다가 사회혁신이란 분야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을까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동안 제 능력을 돈 버는 데 사용했어요. 조금 다른 데 제 능력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0년 전이었죠, 여러 군데를 두드려서 문의를 했는데 지금은 씨닷의 대표 두 분이 희망제작소에 계실 때 알게 되어서 재능기부를 했어요. 그 때 놀랐어요. 직장인, 공무원 같은 사람들이 저녁에 외국분들의 강연을 들으러 와서 열심히 경청하는 거예요. ‘이런 세상이 있구나’, 다른 각도로 삶을 처음 보게 되었어요. 사회혁신 통역은 재미있고 소프트하지만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내용이었고, 간접적으로는 제 능력이 그 영향에 쓰일 수 있잖아요. 하다보니 계속 하게 되고 점점 재미있어졌어요. 배우는 것들도 많아요. 저를 이입해서 통역하면 내 삶에도 영향을 끼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나중에 내 커뮤니티에서 뭘 하면 좋겠다’고 생각이 발전되었어요. (변주경)

저는 변주경 선배님 후배예요. 선배님이 항상 저를 동시통역 파트너로 점지해 주셔서 사회혁신 분야의 통역을 하게 됐어요. 통번역사로 일한 지 10년 이상 되는데 주 분야가 보험이나 원전, 섬유 이렇게 전문적이고 딱딱한 분야예요. 그런데 항상 변 선배가 일하자고 하는 건 정말 달라요. 사회혁신이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제 일상에 와 닿는 내용에 감동하기도 해요. (이상은)

저는 2013년부터 프리랜서 통번역을 시작했는데 마침 그 시기가 서울에서 사회혁신이나 사회적경제 관련한 행사가 많아져서 통번역을 맡을 일들이 많아졌어요. 그 때 통역 협동조합도 생겨서 거기에 가입했어요. 협동조합에 가입하니까 사회적경제에서 번역 통역을 많이 맡기더라고요. 하면 할수록 늘고 익숙해지면서 다른 분야보다 훨씬 더 끌리고, 내가 여기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들게 되었어요. 사회적기업과 창업 통역을 한참 하다 보면 나도 창업하고 싶고, 사회적경제 쪽 연구소 분들을 만나면 두번째 커리어를 하면 저런 단체에서 하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고요. 그리고 요즘은 여러 통역을 하다 보니까, 통역사들도 이 사람이 얘기 진짜 잘 했다 못했다를 느끼거든요. 제 블로그에 ‘이 달의 최고 연사’에 대한 글을 써볼까라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이렇게 아이디어가 항상 떠올라요. (이세현)

이렇듯 통역사가 자신에게 좀 더 관심있는 분야의 통역을 하게 되면 스스로 즐거움과 만족감을 얻는다. 통역사가 관심있는 분야를 통역한다는 것이 ‘사용자’나 청중에게도 전해질까? 변주경 통역사와 오랫동안 일한 사회혁신 국제교류기관 씨닷의 한선경 대표는 “우리는 단순히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관계가 아니라 사회혁신 영역에서 동료가 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주경님과 오래 했던 이유는 물론 청중들 반응이 좋아서도 있지만, 소통할 때 주경님이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이 느껴져서예요. 통역하시면서 내용이 좋아서 울기도 하시거든요. 그 마음을 아니까 저희는 그냥 통역사라면 안 여쭤볼 걸 질문하기도 하고, 무언가 같이 해보려고 하기도 해요. (한선경)

세션과 관련된 키워드가 적힌 벽 ⓒ듣는연구소

통역사가 주제에 애정과 관심을 가질 때 통번역의 내용이나 질에도 영향을 미칠까? 통역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통역이 단순히 구글 번역기처럼 ‘언어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변주경 통역사는 통역을 “내가 철학과 학생인데 물리학과 4학년 수업을 듣고 나와서 친구에게 전해주는 것”에 비유했다. 통역사가 외국어를 듣고 자신이 이해한 만큼 내용을 머릿속에서 버무려서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이 통역 현장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주제에 대한 이해가 높을수록 통역의 질도 높아진다. (그러므로 통역의 질을 높이고 싶다면 통역사에게 사전 자료를 충분히 제공하라는 팁도 얻었다!)

통역사로서 어떨 땐 쉽게 다가오는 게 사회혁신이지만, 또 어떨 땐 잘 다가오지 않아요. 한 강연에서는 한국 기업이 취약계층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 알록달록 사탕을 만든다고 해서 재미있게 통역했는데, 신기하게도 제가 다음날 아이를 데리고 백화점에 갔더니 식품관에 그 사탕이 있는 거예요. 사회혁신이 제 삶에 굉장히 가깝게 느껴졌죠. 그런데 또 어떨 때에는 사례발표를 들었는데도 ‘그래서 추구하는 게 뭔지’ 잘 모르겠는 경우도 있었어요. 집에 돌아오면서도 계속 곱씹어보다가 일상으로 돌아가면 잊혀지죠. 사회혁신이 새로운 의제고, 젊은 사람들이 많이 해서 저 같은 중년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잘 안 와 닿는 메시지나 방식들이 많아요. 저에겐 작은 진입장벽 요소인 거예요. 스스로 설득하는 게 ‘사회혁신 주제니까’ 라고 이해하긴 하지만요. (이상은)

어떤 분야이든지 통역사를 통해서 전달되니까, 통역사가 대중에게 ‘프론트라인(최전선)’ 역할을 한다고 보면 돼요. 우리도 일반 사람들과 그렇게 다른 사람이 아니거든요. 통역사를 설득하면, 대중에게 전파될 수 있다고 보셔도 좋겠어요. 하지만 우리도 설득되지 않으면 어렵겠다 싶죠. (변주경)

이날 참여한 ‘청중’ 입장이나 ‘사용자’ 입장의 참여자들도 궁금한 것이 많았다. 이들이 가장 답답해하는 건 통역할 사람을 찾기가 너무 어렵다는 점이다. 잘 하는 사람을 어디서 구할 수 있을지, 단가는 얼마인지가 공개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알음알음 주선이 이뤄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보니 비전문가라도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 투입되는데, 그런 경우 일하는 사람은 착취당하고 통역의 질이 낮을 때 행사 담당자는 욕을 먹는다는 경험담도 쏟아져나왔다.

이세현 통역사는 통번역계의 구조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면서, 본인도 “몸을 갈아넣는 번역”을 하다가 통역협동조합에 초기 멤버로 가입했다고 했다.

통역협동조합에서는 수수료가 정률로 정해져있어요. 기존 나쁜 시장 관행에서 일한 분들께는 매우 유리한 조건일 거예요. 운영도 민주적이예요. 매년 총회를 하고 이사회도 선출해요. 그래서 매력 느끼고 많은 분들이 가입하고 있어요. 5년 넘게 유지가 되고 매년 매출 성장하고 있고요. (이세현)

더불어 통역의 가치를 모르는 한국사회의 문화에 대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통역사가 있는 회의장에서 “우리 영어 되잖아?”라면서 리시버를 뽑은 채 말하기 시작한 임원 때문에 직원들이 국제회의를 하면서 ‘대화가 공전하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왔다는 경험도 있었다! 또, 행사를 할 때 호화로운 다과 값은 치르면서도 통역 값은 아까워하는 현실도 얘기되었다.

우리나라는 영어를 못하면 부끄럽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어요. 그게 없으면 좋겠어요. 영어도 하나의 도구일 뿐인데. 사회혁신 영역에도 영어를 잘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하지만 영어가 안 되니까 통역사를 부른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원래 통역사가 전문적으로 하는 일이 있으므로 통역사에게 맡긴다고 생각하면 좋겠어요. 한국 사람들이 외국에 견학 많이 가잖아요. 돈을 많이 들여서 가는데 가는 이유는 소통하려는 거거든요. 근데 가서도 통역에는 돈을 아끼는 경우가 많아요.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통역 예산을 안 쓰는 대가가 얼마나 클까 생각하면 상당히 안타깝죠. (이세현)

너도알고 나도아는 사회혁신을 위한 통번역의 역할 ⓒ듣는연구소

대화는 이렇게 사회혁신와 통역사들의 만남부터 통번역계에 필요한 혁신까지 넘나들었다. 그렇다면 사회혁신 영역의 일원으로서 통역사가 내고 싶은 목소리는 무엇이었을까?

앞서 말했듯이, “통역사를 설득하면 대중에게 전파되기 쉽”지만(변주경), “사회혁신이 우리에게도 어렵게 느껴져서 안타깝다”(이상은)는 것. 이들은 사회혁신에서 사용되는 생소한 언어가 장벽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회혁신은 너무 빠르고 새로워서 언어 순화가 안 된 채 들어와서 그냥 그대로 쓰거든요. 이 영역 사람들은 맨날 쓰는 말이니까 알아듣지만, 외부에 계신 분들은 못 알아들어요. 좋은 아이디어가 휘발되어서 아깝다는 얘기도 나오는데 여러분은 그 부분을 어떻게 느끼는지 궁금해요. 예를 들어 앙트프러너, 소셜임팩트, 커머닝… 이런 것들이 한국말로 언어가 없대요. 이런 용어들이 장벽으로 느껴지죠. (변주경)

세션 참여자들은 이런 용어들이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번역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관행대로 권위있는 학자가 제시하는 개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 영역에서 개념과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 적절한 용어를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그럴 때 통역사들도 ‘벽 뒤에서 말을 옮겨주는 사람’이 아니라 이 영역의 한 주체로서 들어와 함께 이야기하면 좋겠다고. 이 이야기를 할 때 통역사들은 ‘우리가 그래도 괜찮은가요, 정말?’이라는 조심스러움을 유지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도 ‘벽 뒤’가 익숙한 사람으로서 몸에 밴 겸손함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궁금하지 않은가? ‘언서페’라는 이름은 무슨 뜻인지? 이것은 세션을 시작할 때 진행자가 꺼낸 첫 질문이었다.

사전을 찾아보면 ‘유력한 용의자’(usual suspect)란 뜻은 있는데, 그 반대니까 ‘그럴 것 같지 않은 용의자’란 뜻이겠지요. 한국 말로는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영어로는 잘 지었어요. 취지에 맞다고 생각하는데요. 주최측이 한국말로 옮기려면 힘들었겠어요. (변주경)

예상하지 않은 사람들의 만남으로 사회변화의 불씨를 만들어보겠다는 취지의 언유주얼 서스펙트 페스티벌에 걸맞은 의미라고 하겠다. 역시 사회혁신 분야의 용어는 새롭지만, 아직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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