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EA2050_025]
김수연 LAB2050 연구원
토마 피케티는 2013년 『21세기 자본』을 출간하며 성장 대신 분배를 경제학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그의 주장은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을 때 불평등이 벌어지는데 역사적으로 이런 현상이 이어진 결과로 불평등이 심화됐다는 것이다.
6년 만에 발표한 후속작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피케티는 불평등을 해소할 대안으로 25세가 되는 모든 사람에게 12만 유로(약 1억5700만 원)의 ‘기초자산’을 지급하자고 제안했다. 대신 최상위 계층의 부자에게는 재산세·상속세에 90% 세율을 적용하는 식으로 누진세를 대폭 강화하고 글로벌 자본세를 도입하자고 했다. 직접적으로 자본수익률을 겨냥한 해법이다.
정의당이 4·15 총선 공약 1호로 내놓은 ‘청년기초자산제’도 그와 같은 기초자산 제안의 연장선상에 있다. 청년기초자산제는 만 20세 청년 모두에게 3,000만 원, 아동 양육시설을 퇴소한 청년에게는 5,000만 원을 일회적으로 지급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정의당은 “부모의 도움이 없더라도 사회에서 자립하기 위한 최소한의 종자돈 규모를 고려했다.”고 공약을 만든 이유를 밝히면서 이를 ‘부모 찬스’ 없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 찬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지급된 자산은 청년 창업, 대학 교육, 전월세 자금으로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라고도 전망했다.
기초자산과 유사하게 이해되는 정책 대안으로는 ‘기본소득’이 있다. 이는 모두에게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현금을 지급하자는 제도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가 한창 가열되고 있었다.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취약계층은 물론 노동가능인구로 여겨져 복지 제도에서 소외됐던 청년층에게도 현실적인 지원책이 될 수 있다는 측면 때문에 보수와 진보 진영 양쪽에서 모두 관심을 보였다. (국회 토론회 “기본소득의 정치적 실현 가능성” 참조)
총선을 앞두고 기본소득 공약을 전면에 내세우는 정당들도 나오고 있다. 기본소득 주장을 아예 당의 정체성으로 내세운 기본소득당은 ‘공유부(共有富, Commonwealth)’를 재원으로 모두에게 매달 60만 원을 지급한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시대전환은 LAB2050의 국민기본소득제 연구를 바탕으로 세제 개혁을 통해 마련한 재원으로 모든 국민에게 매달 30만 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자고 제안했다.
2010년 무상급식 논쟁이 한창이던 시절 보편복지와 현금복지를 ‘포퓰리즘’ 또는 ‘공산주의’로 매도하던 여론을 떠올리면 10년 만에 사회가 크게 바뀌었다는 것을 절감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사람들이 궁금해할 만한 것은, 기초자산과 기본소득이 얼마나 비슷하고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상황에서 볼 때 두 제도의 장단점은 무엇인지, 단기적 ·장기적인 효과는 어떻게 달라질지 등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두 제도의 공통된 배경은 불평등
기초자산과 기본소득이 대두된 배경에는 공통적으로 한국의 높은 자산·소득 불평등 문제가 있다. 주상영(건국대 경제학과)의 2015년 연구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자본소득 분배율은 급격하게 올라갔으며, 이 비율은 주요 선진국을 웃도는 수준이다. 자본소득은 노동소득에 비해 훨씬 더 불평등하게 분포돼 있다. 따라서 생산과 분배 과정에서 자본 비중의 증가는 결국 개인별 소득 분배의 악화로 나타났다.
한국 가계의 순저축률은 한때 20%에 달했지만 이제는 고작 3%에 불과하다. 한국의 기업은 가계와 정부를 합한 것보다도 더 많은 저축을 하고 있는 반면 한국의 가계는 소비할 여력이 없다. 주 교수는 “투자는 경제 전체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중요한 항목이지만 소비가 제약되는 현실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고 지적한다. 이렇게 위축된 내수 시장 및 소비 활성화에 대한 필요성이 기본소득을 지급해야 한다는 논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림> 가계·기업·정부의 순저축률(순본원소득에서 순저축이 차지하는 비율)
점점 심화되는 소득 불평등에 대처해야 할 한국의 사회보장 제도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크게 볼 때 한국의 사회보장 제도는 기여 원칙에 근거한 사회보험, 그리고 자산심사를 통한 선별적 공공부조로 이뤄져 있다. 사회 안전망의 보호를 받으려면 고용 계약을 맺음으로써 사회보험에 기여하거나, 기초생활수급자가 되기 위해 가난을 증명하고 자활 사업에 동원돼야 한다. 가난할수록 생존 자체를 위해서만 살아야 하며, 좋은 일과 직장,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시민권에 기초한 보편 복지
기초자산과 기본소득이 대안으로 떠오르는 배경에는 또한 실업 문제와 광범위한 복지 사각지대가 있다. 오랜 시간 한국은 일차적인 소득 및 생계에 대한 책임을 가족과 기업에게 지우고, 그 기능이 여의치 않을 때에만 개입하는 ‘잔여주의 복지제도’를 운영해 왔다. 가족은 해체되고 불안정한 고용과 실업의 공포가 만연한 오늘날 사각지대가 커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기존 복지제도의 한계를 넘어설 대안으로 기초자산과 기본소득이 대두된 것이다. 이 두 제도는 무엇보다도 자산심사와 노동에 대한 의무 없이, 시민이라면 누구나 받을 권리가 있다는 철학 자체로 기존 제도와 다르며, 그 점 때문에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기본소득 주창자로 잘 알려진 벨기에 철학자 필리프 판 파레이스는 “기본소득 수급 자격은 오직 시민권 여부로만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초자산을 가장 잘 이론화했다고 평가받는 액커만과 알스톳 역시 “사회적 지분 급여(기초자산)는 빈곤 프로그램이 아니라 시민권 프로그램”이라며 기초자산이 시민권에 기반하고 있음을 명확히 한다.
무엇보다 기초자산과 기본소득의 궁극적인 이상은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는 것이다. 시민 모두에게 스스로 원하는 삶을 선택할 자유를 우선적으로 부여하고, 그에 부합하도록 국가와 복지의 역할 전환까지 요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기회의 평등 VS 결과의 평등
기초자산과 기본소득은 모든 시민에게 무조건적 급여를 지급하고, 개인의 실질적 자유를 추구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지급 방식과 핵심 정책 목표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기초자산의 목표는 기회의 평등과 자산 재분배다. 성인으로 전환되는 초기에 목돈을 일회적으로 지급하려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액커만과 알스톳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출발선을 제공하여 개인의 성인기를 다르게 만들 수 있는 자유를 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인기를 시작하는 시기에 사회적 지분, 기초자산을 획득함으로써 교육 기회, 주택 마련, 창업 활동 등을 펼칠 수 있도록 기회의 평등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제안은 기초자산으로 받은 돈을 양도하거나 이를 담보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는데, 여기에는 “모든 시민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보는 시각이 깔려있다.
하지만 기초자산을 통해 기회의 평등을 부여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자산 관리 능력에 따라 더 큰 불평등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대개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이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보다 자산 운영 경험이 많고 능숙하기 때문이다.
반면 기본소득의 목적은 결과의 평등이다. 아울러, 소득 보장을 통해서 생애 전반에 걸쳐 소득 안정성과 기회의 자유를 제공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서정희・조광자의 2008년 연구에 따르면 “기초자산이 한 번의 값진 출발을 제공하는 단발적 권리라면 기본소득은 기본적인 안정을 보장하는 권리”이다.
기본소득은 정기적으로 평생 지급되기 때문에, 인생의 어느 시점에 자산 모두를 탕진하더라도 기본적인 수준의 삶은 계속 영위할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질 나쁜 일자리를 선택해야 하거나, 가족 내 생계 부양자의 수입에 의존해서 부자유스럽게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소득이 충분하지 않은 일, 예를 들면 돌봄, 예술, 정치 부문의 일이나 지역 공동체 활동을 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이렇게 두 제도는 세부적으로는 다르지만 궁극적으로는 소득 재분배를 목적으로 한다. 다만, 두 제도 중 어느 것을 시행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복지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보수 싱크탱크인 ‘맨하탄 인스티튜트’가 최근 발간한 보고서는 경제가 호황임에도 실제 사람들이 체감하는 경기가 나아지지 않은 이유를 임금 수준이 4가지 주요 지출 항목들(주거, 의료, 교통, 교육)을 감당하지 못할 만큼 낮아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고려한다면 기초자산, 기본소득 도입을 추진하더라도 주거와, 보건의료, 식품, 교통, 통신 등 기본적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국가가 기본 서비스로 제공하는 안을 함께 검토할 필요도 있겠다.
비슷하지만 다른 총선 공약들
정의당의 청년기초자산제와 시대전환, 기본소득당의 기본소득 공약은 위에서 살펴본 기초자산이나 기본소득의 개념과 어떻게 같고 또 다를까?
정의당의 청년기초자산제는 기초자산의 목표인 ‘기회의 평등’과 ‘자산 재분배’와 부합하는 제도라 할 수 있다. 다만 용도를 학자금, 취업 준비금, 주거비용, 창업비용 네 가지로 제한하고, 지급금에 대한 담보나 압류는 허용하지 않는다 원칙을 보완책으로 넣었다. 이는 앞에서 설명한 기초자산이 “모든 시민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것과는 다른 점이다. 청년들이 경험 부족, 의지 박약 등으로 기초자산을 탕진할 수 있다는 비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정의당은 청년기초자산제를 위한 재원으로 상속·증여세 및 종합부동산세 강화, 부유세 신설 등을 제시했다. 일정액 이상의 상속·증여를 받은 청년에게는 환수(클로백, claw-back) 제도를 통해 기초자산을 조세로 환수한다는 방안도 같이 밝혔다. 이는 무상복지와 관련해서 늘 제기되는, “부자에게 돈을 줄 필요가 있느냐?”는 비판에 사전 대응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처음부터 일부 계층을 제외하는 방식을 취한다면, 즉 기초자산을 ‘무조건적’으로 지급하지 못 한다면, 기초자산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기 어려워 지급 액수와 수급 대상을 확대하기 힘들 수 있다.
이 제도의 지급 금액은 최근 발표된 기본소득 제안들과 비교해 보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이건민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상임연구원의 최근 분석에 따르면, 실질 이자율이 연평균 2.5% 수준이라고 가정할 때 정의당에서 제시한 3,000만 원의 청년 기초자산은 20~64세에 걸쳐 매달 지급하는 기본소득으로 환산할 경우 약 9만 원에 불과하다. 상속세와 부유세라는 재원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금액을 더 크게 책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기본소득당의 공유부 기본소득은 60만 원, 시대전환이 공약으로 택한 LAB2050의 국민기본소득제는 30만 원을 갓난 아이부터 노인까지 전국민에게 매달 지급한다는 안이다. 생애 전반에 걸쳐 안정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기본소득의 무조건성과 보편성, 개별성을 충족한다.
재원 마련을 위해 기본소득당은 시민소득세와 더불어 토지보유세와 환경세를 신설할 것을 주장한다. 토지와 환경에 대한 ‘공유부’를 시민 모두에게 분배해야 한다는 철학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분배 제도 개혁이라는 기본소득의 취지에 더 부합한다. 다만, 세목 신설에 따른 저항 및 절차 등의 문제로 현실화에 어려움이 있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반면 국민기본소득제는 소득세제 개편과 재정 구조조정 방안을 중심으로 할 뿐 세목 신설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다르다. 그 때문에 당장 제시하는 월 지급액이 크지 않은 수준이기는 하지만 추가적 재정 투입 없이 기본소득 지급을 시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피케티는 “불평등은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문제로, 역사적으로는 소유권·교육·조세 등을 조직하는 대안적 방안이 늘 존재해왔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인간은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바꾸려는 노력을 통해 불평등과 현실적으로 싸울 수 있다는 주장이다.
기초자산과 기본소득 두 제도 역시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이라는 다른 목적에 방점을 찍고 있기는 하지만 모두 불평등과 싸우기 위한 수단이다. 각기 다른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기대 효과를 제시하고는 있지만 이를 놓고 토론을 벌이면 벌일수록 우리는 오랜 불평등을 수정할 수 있는 가능성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총선은 바로 이런 측면에서 유권자를 혁신의 장으로 초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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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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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전환 페이스북(2020.03.03). “국민기본소득제, 1분만에 깔끔하게 설명해 드립니다.”. (2020년 3월 4일 최종 접속)
정의당 블로그(2020. 1. 14). “[정의당] 정의당 청년기초자산제 ‘부모찬스’ 대신, ‘사회찬스’ 시대가 열립니다!”. (2020년 3월 3일 최종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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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래 (2019. 9. 15), 「’21세기 자본’ 피케티, 6년만에 프랑스서 후속작 출간」. 『연합뉴스』 (2020년 3월 3일 최종 접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