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문제: 99%가 위험하다
* LAB2050 ‘국민기본소득제: 2021년부터 재정적으로 실현 가능한 모델 제안’ 보고서의 온라인 버전입니다. 주석, 참고문헌 등은 별도 포스트(링크)와 PDF 버전(다운로드)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가. 주요 자본주의 국가 중 가장 높은 소득 편중
1990년대 후반 이후 약 20년 동안 한국 사회의 소득 불평등은 빠르게 커졌다. 특히 성인 중 상위 10%와 나머지 사이의 소득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2010년 이후 약 10년 동안은 상위 계층조차 점점 더 1%로 좁혀지면서, 소득 불평등의 양상은 상위 1%와 나머지 99%의 불평등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런 소득 불평등은 우리 사회 역동성을 떨어뜨리는 다양한 문제를 낳고 있다. 한국 사회는 민주화 이후 다양한 복지 제도를 들여오면서 이를 보완하려 하고 있으나 여전히 부족하다. 대담한 소득 재분배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 사회는 10명 중 1명이 전체 소득의 절반을 가져가고, 다른 9명이 나머지 절반을 나눠 갖는 사회가 됐다. 2017년 현재 20세 이상 성인 중 소득 상위 10% 집단의 소득 비중은 50.6%로, 주요 자본주의 발전국가 중 가장 높다. 1999년에는 32.8%였던 것이 이렇게 커졌다.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 사회는 개발주의적 분배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경제 성장을 최상의 국가 목표로 놓고 사회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는 경제 체제였다. 조립형 수출 기업들이 그 자원을 사용해 생산을 책임졌다. 결과적으로 국가를 정점으로 하고, “국가는 기업을 봐주고, 기업은 남성 노동자들을 봐주고, 남성 노동자들은 가족들을 봐주는 체계”를 구축했다. “역순으로 보면 가족들은 남성 가장에게 순종하고, 남성 노동자는 기업에 복종하며, 기업은 국가에 충성하는 구조”였다. 이런 구조 아래서 임금은 낮게, 세금도 낮게, 복지는 약하게 가져가면서 대기업을 중심으로 수출 주도 성장을 꾀했다.[2]
1970년대 이후 개발주의적 분배 전략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시 경제 구조와 부응했다. 국가 재정이 튼튼하지 못한 상황에서 국민 개인에 대한 분배를 가부장적 기업과 가족 시스템에 맡기는 전략이었다. 다만 여기에 전제 조건이 있다. 기업의 수익이 보장되어야 하며, 가장의 임금이 3~4인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수준이 돼야 한다. 그래야 사회 재생산이 가능해진다.
결국 전체 국민소득의 일정한 몫을 상당수 가장들이 골고루 가져갈 수 있어야 그 소득이 가족 시스템을 통해 국민 전체에게 분배된다. 소수에게만 소득이 지나치게 집중되면 분배 시스템에 문제가 생긴다. 1970년대 후반 이후 상위 10%집단의 소득이 적절한 수준에서 억제됐던 이유는 어쩌면 그래서였다.
그런데 가부장적 국가를 정점으로 짜인 분배 체계는 IMF 구제금융을 전후해 무너진다. 글로벌화한 수출 제조업 대기업과 일부 공기업에서 임직원 보수는 크게 올랐다. 그러나 민간소비 부진 속에 자영업자와 중소기업들의 처지는 상대적으로 악화 됐다. 상위 10% 집단에 대한 소득 집중은 빠르게 확대됐다.
그렇지 않아도 대기업-중소기업, 수출 산업-내수 산업, 취업자-미취업자로 나뉘었던 노동시장 구조는 이제 ‘수출-제조업-대기업-정규직’과 ‘내수-서비스업-중소기업-비정규직과 자영업 등 나머지’로 양분된 채 고착됐다.
고부가가치화에 성공한 수출 제조업 영역에서는 일자리가 늘지 않았다. 반면 도·소매 음식숙박업 등 주로 자영업자가 종사하는 서비스업 부문에서 일자리가 늘었다. 1999년 이후 2017년까지 새로 늘어난 일자리 중 79%가 서비스업이었고, 11%만 제조업이었다. 제조업 수출 대기업의 좁은 문에 진입할 수 있었던 이들의 소득은 크게 올랐지만, 새로 일자리를 얻은 대부분은 그렇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상위 10% 집단에게 소득이 극단적으로 편중되는 시대가 본격화했다.
나. 불평등의 결과
1) 지위 경쟁과 사회적 갈등
한국 사회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경제 성장 속에서도 극심한 갈등과 불안을 겪고 있는 원인에는 이런 소득 불평등이 자리잡고 있다. 불평등 정도가 높은 사회는 불평등 정도가 낮은 사회보다 불안감이 더 크다(윌킨슨 외, 2019). 그런 사회일수록 신뢰가 낮아지고 갈등은 깊어진다.
사회학자 리처드 레이트와 크로스토퍼 웰런은 31개 나라를 소득 불평등 정도에 따라 세 개 그룹으로 나누어 각 국가 국민의 지위 불안 정도를 조사했다.[3] 총 3만 5634명을 대상으로 ‘나의 고용 상황이나 소득 때문에 나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질문에 어느 정도로 동의하는지를 물었다.
조사 결과, 소득 불평등도가 높은 국가에서는 전 소득 계층에서 불안감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소득 불평등도가 낮은 국가에서는 전 소득 계층에서 불안감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소득의 절대적 수준보다는 소득 불평등도가 더 큰 영향을 끼쳤다.
불평등도가 큰 사회에서는, 고소득층이라도 자칫 실수하면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고 저소득층은 노력해서 위로 올라갈 엄두를 내기 어렵다. 고소득층은 불안하고 저소득층은 좌절한다. 그러나 불평등도가 작은 사회에서는, 고소득층은 떨어지더라도 타격이 상대적으로 작으며 저소득층은 조금만 노력해도 한두 계단 올라설 수 있다. 자연스레 고소득층은 안정감을, 저소득층은 희망을 갖는다.
이런 이유 탓에 불평등도가 높은 사회에서는 지위 불안이 커진다. 스스로 만족스러운 삶을 추구하기보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의식하고 불안해 하며 살아가게 된다. 지위 불안이 커지면 지위 경쟁과 갈등도 심해진다. 성과를 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더 심하게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경쟁 관계에 있는 사람들과 갈등을 빚기 쉽다. 인사나 평가에 대한 공정성 논란도 커진다. 평가에서 작은 차이만 나도 소득 수준의 차이가 과도하게 커진다.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사회 전체의 스트레스 정도는 커진다.
이런 사회에서 신뢰가 높기는 어렵다. 신뢰는 공동체를 지탱하는 사회적 자본이다. 이것이 낮은 사회에서 공동체 수준이 높아지기는 어렵다.
소득 격차는 이렇게, 경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차별과 불평등을 불러온다. 불안을 키우고 갈등의 씨앗을 뿌리며 분열을 가져온다. 우울증 환자가 늘어나는 등 건강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사회 관계의 질도 떨어지게 된다.
2) 소득 불안정성과 가계소비 부진
소득 불평등은 가계소비 부진으로 이어진다. 한국의 가계소득이 국민소득(GNI)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1.3%(2016년)인데, 이는 OECD 소속 27개 국가 중 22위였다. 정부소득과 기업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높았다. 그런 가계소득마저 상위 10%집단에 편중되어 있는 셈이다.
그나마 소득과 소비의 연결고리가 약해지면서, 가계소비 증가율은 가계소득 증가율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이홍직 등(2015)은 2000년 이후 가계소득과 가계소비 증가율을 비교하면서 2000년~2007년, 2008~2010년, 2011~2017년 세 시기로 나눈다. 2000년부터 2007년 사이에는 대체로 가계소득보다 가계소비가 빠르게 증가한 반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10년까지는 대체로 소득 증가율과 소비 증가율이 비슷했고, 2011년 이후에는 소득 증가율을 소비 증가율이 따라잡지 못 했다.
소비 부진은 내수 부진으로 이어지며, 지나치게 수출에 의존적인 경제 구조를 고착시킨다. 한국의 대외 의존도는 미국, 일본, 중국 등보다 월등하게 높아, 미-중 무역 전쟁 등 대외 환경 변화에 지나치게 민감하다. 이를 극복하려면 내수 소비가 늘어나야 하는데, 절대적 소득 수준의 상승으로도 내수 소비 수준을 높이기 어려운 한계를 보여주는 게 이런 가계소비 부진 현상이다.
소비 수준은 가계소득 자체가 편중되어 구매력이 높지 않은 계층이 대다수일 때 소득 수준에 비해 지체될 수 있으며, 많은 사람이 높은 경제적 불확실성에 처해 있을 때도 지체될 수 있다. 소비 증가에는 절대적 소득 수준의 상승이 필요하지만 미래 기대소득의 확실성도 높아져야 한다.
실제로 2010년대 이후 가계소득은 그 이전보다 변동성은 높아지고 지속성은 낮아졌다. 미래 소득 흐름이 불확실하다면 이를 임시 소득으로 여기고 가능한 한 소비하기보다는 저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실제 한국은행 분석 결과 우리나라 가계의 임시 소득이 늘어나도 가계소비는 늘지 않았다.[6] 가계 입장에서는 불확실성이 커지니 소비보다는 저축을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 사회에서 가계소비 증가율이 가계소득 증가율보다 낮아지는 현상을 바로잡으려면, 소득 수준과 안정성을 동시에 높여야 한다. 소비 진작을 위해서는 특히 소비성향(소득 대비 소비지출의 비율)이 높은 저소득층의 소득 수준과 안정성을 높여야 한다.
도매·소매, 음식·숙박업 등 내수 부문에 널리 퍼져 있는 자영업자 계층의 어려움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자영업 문제의 해법을 구조조정을 통한 생산성 향상에서 찾는 논의가 주를 이뤘지만, 가계소비가 늘지 않는다면 자영업 경쟁력이 높아져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 소득 불평등을 해소해 가계소비를 늘리고, 평생 소득 불확실성을 줄여 전체 가계 소비성향을 높이는 해법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3) 가족 내 분배 시스템의 위기
소득 불평등은 가족 구성의 어려움을 높여 저출생 현상을 불러올 수 있다.
가족은 과거 개발주의 국가에서 국민 소득의 주요한 전달 체계였다. 남성 생계부양자에게 고용을 통해 3~4인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소득을 제공하는 것이 당시 소득 분배 체제의 핵심 요소였다. 장기근속과 호봉제 임금 체계가 평생 소득을 예측가능하게 해주며 이를 뒷받침했다. 이를 기반으로 가족 내 분배는 단순히 개인의 자의적 소득 처분 방법을 뛰어넘어, 사회를 지탱하는 분배구조로 작동했다.
그러나 소득 불평등이 커지고 소득 안정성이 떨어지면서 부양 위험이 높아졌다. 부양자의 위험도 피부양자의 위험도 커졌다. 대체로 상위 10% 집단은 혼자 벌어 3인 가족, 4인 가족을 혼자 부양할 수 있는 정도의 소득을 벌어들이는 사람들로 여겨진다. 이들에게 소득이 집중되면서 나머지 계층의 경우 가족 형성에 따른 부담이 상대적으로 더 커졌다고 볼 수 있다. 즉 소득 격차 확대 탓에 가족 형성에 제약이 생기고 있다. 결과적으로 혼인 건수 및 출생아 감소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1인 가구가 급증하면서 가족 시스템을 통한 사적 이전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문제도 생긴다. 가족이 과거처럼 개인소득 불안의 완충장치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개인소득 격차 및 불안정성 확대는 더 큰 위험이 됐다. 가족 내 분배 시스템이 깨졌는데, 개인의 소득 불안도 커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수십 년간 노인, 여성, 청년 문제가 끊임없이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이 결과라 할 수 있다.
소득 분배 매개자로서의 가족 체계가 바뀌면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분배 체계를 짤 필요가 생겼다.
다. 역동성 저하가 핵심 문제
종합하면 소득 불평등은 사회적 신뢰를 낮추고, 가계소비 발목을 잡으며, 가족 중심의 분배 체계를 흔들고 있다. 세 가지 모두 사회 역동성을 떨어뜨리는 요소다.
신뢰가 낮은 사회에서는 혁신을 위한 경쟁보다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지위 경쟁이 심해진다. 해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대학 입시 경쟁도, 청년들 사이의 공기업 및 공무원 시험 열기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게다가 내수 소비가 늘지 않으면 자영업의 어려움은 더 커질 것이다. 실패에 따른 위험이 너무 커서 경제적 위험을 감수하는 창업에 뛰어들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점점 더 많은 20대 이후 청년들이 50대 이상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피터팬 증후군’의 원인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미덕으로 내세우는 ‘능력에 따른 공정한 시장 경쟁’과 ‘독립적인 개인들의 사회’는 상위 10%집단만이 독주하는 체제에서는 이뤄지기 어렵다. 부양자 및 잠재적 부양자들 사이에는 상위 10%에 들기 위한 극심한 경쟁이 벌어지게 되고, 피부양자들은 부양자 및 잠재적 부양자에 대한 의존성이 훨씬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소득 분배 불균형은 이렇게 경제 및 사회 역동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획기적인 분배 혁신을 통해 경제 사회 정책 패러다임을 전환하지 않으면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이 돼가고 있다.
그 핵심은 부양자의 부양 부담과 동시에 피부양자의 의존성을 줄이는 것이어야 한다. 소득상위 계층의 소득 비중을 줄이고, 나머지 대부분에게 골고루 분배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모두가 그렇게 분배된 소득을 임시 소득이라고 여기지 않고, 평생 보장된 안정적 소득이라고 여길 수 있는 분배 구조를 만들어가야 한다. 역동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경제의 전환, 사회의 전환을 가져오는 분배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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