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의 한국적 적용을 위한 대안: 생애선택 기본소득

[IDEA2050_030] 김태일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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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min readJul 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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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프리픽

왜 기본소득인가

전 세계가 미증유의 상황을 겪게 만든 코로나 19 사태. 그 이후의 사회는 이전과 같을 수 없다고 한다. 코로나 이후 어떤 사회가 우리 앞에 놓일까. 각종 모임과 레저활동 등 우리의 일상이 달라질 것이고 종교활동과 직장근무 형태도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육, 의료, 복지 등 공적 제도가 바뀔 것이다(혹은 바뀌어야 할 것이다).

사회를 떠받치는 다양한 공적 제도 중에 부실이 드러난 것은 튼튼히 보강하고 새롭게 필요해진 것은 충실히 만들어야 한다. 특히 가장 공들여 보강하고 추가해야 할 것은 사회안전망이다.

사회안전망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대표적인 것이 노후에 소득을 보장하는 연금, 일자리 잃었을 때 소득을 지원하는 고용보험, 그리고 빈곤계층을 지원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이다. 그런데 우리의 사회안전망은 이번 사태 때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이번 사태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자, 프리랜서, 일용직, 파트타이머에게는 커다란 구멍을 노출했다. 일하는 사람을 위한 사회안전망은 고용보험이다. 그런데 고용보험은 일하는 사람의 절반 정도만, 주로 정규직 임금 근로자를 커버하고 있다. 그래서 정작 경제 위기 때 가장 힘든 사람들은 대부분 배제되어 있다.

사회안전망 사각지대가 크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평상시에는 문제가 있으니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의 환기 수준에서 유야무야 지내왔으나 이번 위기를 겪으면서 심각성이 확연히 드러났고 이번에는 반드시 해결하자는 공감대도 형성되고 있다.

사회안전망의 구멍 메꾸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방법이 여러 가지라고 해서 실행이 쉽다는 것은 아니다). 그중 하나로 요즘 부상하는 것이 기본소득이다. 국민 모두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매달 일정 금액을 지급하자는 것이다.

기본소득론의 역사

기본소득론의 역사는 길다. 연원을 따지면 1600년대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나 1700년대 토마스 페인의 토지공유자산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세기 이후까지 기본소득 주장은 이어졌으나 소수파 비주류에 머물렀다. 변방에 있던 기본소득론이 본격적인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지식정보사회가 심화 되고 4차산업 혁명 시대에 접어든 최근에 와서다.

2016년 4차산업혁명과 일자리 소멸을 논의한 세계경제포럼은 이듬해인 2017년에 대안의 하나로 기본소득을 다뤘다. 이로 인해 4차산업 혁명과 대안으로의 기본소득은 세계적으로, 특히 한국 사회에서 큰 관심을 받게 되었다. 2016년 스위스에서는 모든 국민에게 월 300만 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자는 법안을 국민투표에 부쳤다가 부결되었다. 핀란드, 미국, 캐나다 등 세계 각지에서 기본소득과 기존 복지제도의 장단점을 비교하는 실험이 진행되었다.

우리 사회의 기본소득 논의

우리 사회의 기본소득 논의도 2016년부터 활발했다.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성남시장이 공약으로 기본소득을 내세웠다. 그리고 성남시와 서울시는 비록 대상이 일부 청년으로 한정되고 적은 액수의 단기간이었지만 기본소득에 근사한 형태의 수당을 지급했다.

잠시 주춤했던 우리 사회 기본소득 논의가 이번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다시 부상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은 전술했듯 사회안전망의 구멍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현행 사회안전망에서는 급여를 받으려면 일정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법령으로 정하는 조건은 모든 상황을 고려할 수 없다. 그래서 도움이 절실하지만 배제되는 경우, 안전망의 구멍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구멍이 작아서 배제되는 사람이 극소수라면 그래도 큰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안전망에 뚫린 구멍은 너무나 크다. 기존 체계를 보완해 가는 식으로는 메꾸기가 요원하다. 그래서 기존과는 전혀 다른 접근, ‘조건 없는’ 기본소득이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번 사태로 ‘긴급재난지원금’을 전 국민이 받게 되었다. 비록 단발성이지만 기본소득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과 이미 경험해 본 것은 설득력에 큰 차이를 가져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사태로 인해 힘든 시기를 함께했다는 점이 사람들 간 연대 의식을 높였고, 그래서 이전과는 다른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데 폭넓은 지지가 생겼다.

기본소득의 트릴레마(trilemma)

기본소득이 오래전부터 논의되었지만, 아직까지 실험을 넘어서 정책으로 실행한 국가는 없다. 반대가 만만찮기 때문이다. 반대 이유는 다양하다. 이념적인 것을 제외하고 기능적인 것만 따지면 돈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것과 정작 필요한 사람을 돕는 데는 기존 복지제도보다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반대 사유는 기본소득의 트릴레마 때문에 발생한다. 트릴레마는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없는 경우, 잘해야 둘만 달성할 수 있는 경우를 말한다. 바람직한 사회안전망은 다음의 세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① 사각지대의 해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혜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② 욕구 수준에 부응하는 급여: 필요에 상응해서 혜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③ 재정의 지속가능성: 재원조달은 지속 가능해야 한다.

이 셋 중 기존의 복지제도, 특히 우리의 경우는 ②와 ③을 충족한다고 할 수 있다. 욕구에 따라 급여를 지급하고 재정적으로 지속가능하지만 사각지대가 너무 많다. 기본소득의 주장에는 소위 우파 버전과 좌파 버전이 있다. 우파 버전은 기본소득으로 기존의 복지제도의 상당 부분을 대체하자는 것이다(따라서 추가적인 재정은 별로 필요치 않다). 이 경우 ①과 ③은 충족한다. 하지만 ‘욕구에 따른 급여’ 원칙에 의해 구축된 기존 복지제도가 사라지므로 ②는 충족하지 못한다. 좌파 버전은 기존 복지제도를 유지하면서(혹은 아주 일부만 대체하면서) 기본소득을 실시하자고 한다. 이 경우 ①과 ②는 충족한다. 하지만 매우 많은 재원이 소요되므로 ③은 충족하기 어렵다.

기본소득의 한국적 적용 대안: 생애선택 기본소득

①, ②, ③을 동시에 달성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 하나를 포기하고 둘만 선택하는 것은 좋은 대안이 아니다. 그보다는 비록 셋 모두를 완벽히 충족하지는 못하더라도 가급적 셋 모두를 상당 부분 충족하는, 최적 조합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내가 제안하는 것은 기본소득을 생애의 일정 기간만 지급하되 수급 시기는 각자에게 맡기는 것이다. 가령 19세-64세 시기 중 필요할 때 신청해서 매월 50만 원씩 받되 통산 수급 기간은 5년으로 제한하는 식이다. 이름을 붙이자면 ‘생애선택 기본소득’이라고 할 수 있겠다(석재은, 2020).

이렇게 하면 ①, ②, ③을 완벽히는 아니라도 상당 부분 충족할 수 있다. 이 대안에서는 기존 복지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더라도 추가적인 재원 소요는 연평균 20조 원 정도이다. 이는 대략 GDP의 1%, 현행 복지재정 규모의 10%에 해당한다. 이 정도의 재원 소요라면 지속가능하다. 그러니 ②와 ③은 충족한다.

연평균 20조원이라는 것은 중장기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며, 매년의 급여신청 인원은 다를 것이므로 필요액도 매년 변동할 것이다. 특히 제도 시행 초기에 몰릴 수 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국채 발행이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중기적으로는 수지균형이 맞을 것이므로 지속적인 채무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그리고 처음에는 연령대를 제한해서 시작한 후, 제도가 정착되면서 차츰 연령대를 넓혀갈 수도 있다).

사회적 지원이 필요한 다양한 경우를 대비

이러한 생애선택 기본소득은 기존 복지제도가 제공 못하는, 그러나 사회적 지원이 필요한 다양한 경우를 대비할 수 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취업 준비생 및 고용보험에서 배제된 실직자를 위한 실업급여, 폐업 등으로 소득 상실한 영세 자영자에 대한 안전망, 가족 돌봄 위해 휴직 또는 단축 근무 시 소득지원, 교육훈련이나 재충전 시 소득지원 등(주은선, 2013).
이런 욕구들은 근로연령기 때 일정 기간만 발생한다. 또 그 밖의 다양한 이유로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발생해도 대부분 일시적이다. 어떤 이유든 근로연령기 때 일시적으로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발생했을 때 ‘생애선택 기본소득’은 유용한 대안이 된다.

청년수당(배당) 같은 것도 기간을 한정해서 지급하는 것은 동일하다. 하지만 청년수당은 특정 연령대에 획일적으로 지급하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치 않은 사람도 받으며, 해당 연령대가 아니면 도움이 필요하더라도 받지 못한다. 생애 어느 시기에 도움이 필요한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따라서 수급 시기를 획일적으로 정하는 것보다는 필요할 때 수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한편, 일시적이 아니라 장기간 소득지원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같은 기존 복지제도로 커버하면 된다. 따라서 ①도 대부분 충족할 수 있다.

19–64세 기간에 모두 수급하지 않고 남은 것은 65세 때 일시금으로 수급하거나 혹은 연금에 얹어서 수급하면 된다. 우리의 국민연금은 노후 대비에 충분한 수준이 아니므로, 남은 기본소득은 이를 보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기본소득 금액은 경제성장률에 연동하여 매년 높아지도록 설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면 늦게 사용하려는 유인이 발생하여 낭비 가능성을 줄이고 노후소득 지원에 좀 더 기여할 수 있다.

다양한 변주 가능성

‘생애선택 기본소득’을 실제 적용할 때는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 예를 들면 일부 사람들은 경제적 위험에 처하지 않았더라도 수급권이 생기자마자 5년 간 내리받을 수 있다. 이것도 개인의 선택이지만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렇다면 35세 이하 때는 2년 이하로 수급 기간을 제한하고, 그 이후에 3년 이상 수급하도록 정할 수도 있다. 혹은 소득 상실이나 현저한 소득 감소와 같은 수급조건을 추가할 수도 있다(이런 사유가 발생하지 않으면 65세 이후 수령하면 된다. 수급조건을 다는 것은 기본소득의 취지에 부합하지는 않지만 수용성 측면에서 필요할 수도 있다).
이러한 수급조건을 추가하더라도 이를 심사하는 행정비용은 크지 않다. 이 경우의 부정 수급(소득상실/감소가 아닌데도 받는 것)은 단지 나중에 받을 것을 당겨 받는 것에 해당하므로 다른 복지급여의 부정 수급만큼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고, 따라서 다소 느슨하게 심사해도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급 기간도 5년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2–3년 정도로 시작했다가 경과를 보면서 연장 여부를 결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월 60만 원의 급여 수준의 경우, 그 정도는 되어야 사각지대를 메꾸는 대안이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인데, 구체적인 금액은 어느 정도 가감할 수 있을 것이다.

재원조달 방법: 부담과 혜택의 연계

기본소득에 대한 이념적인 반대 중 하나는 도움이 필요 없는 고소득층까지 지원하는 것은 재정 낭비라는 것이다. 기본소득의 혜택만을 따지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재원부담을 함께 고려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내가 기본소득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물론 사회안전망의 구멍을 메꾸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소득재분배의 유용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양극화가 심해지는 경제구조에서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소득재분배 기능이 좀 더 강화될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는 서구국가보다 소득재분배 기능이 매우 취약하므로 더욱 그렇다.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생각하면 기본소득을 도입하면서 재원조달 방안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 빚지는 것은 재원조달 방안이라 할 수 없으니 결국 현행보다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 세금은 고소득층이 저소득층보다 더 많이 부담한다. 반면에 기본소득 지급액은 계층에 상관없이 동일하다.
따라서 기본소득의 도입은 소득재분배를 가져온다. 물론 동일한 재원을 지출한다면 기본소득 보다는 저소득층에 집중된 지출의 재분배 효과가더 크다. 하지만 기본소득을 조건으로 하는 증세가 저소득층 대상 복지제도 신설을 위한 증세보다는 수용성이 높을 것이다.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각종 조세감면제도를 폐지해서 재원을 마련하자고 한다. 감면제도를 폐지하든 세율을 높이든 이전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우리의 조세감면제도는 불합리한 부분이 많으므로 기왕이면 불합리한 것을 타당하게 고치는 가운데 재원을 마련하자는 것은 명분이 있기는 하다.

이번에는 목표를 분명히 하고 대안을 선택하자

내가 제안한 ‘생애선택 기본소득’은 기존에 주장되었던 기본소득과는 다르다. 소요 재정 규모가 훨씬 작고 기존 복지제도와의 충돌도 없다(오히려 보완적이다). 그렇지만 수급 기간을 제한한다는 것 때문에 기존의 기본소득론자들은 싫어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기본소득을 도입하려면 내가 제안한 ‘기간 제한 및 부담-혜택 연계 방식’이어야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다. 일단 이런 방식으로 도입한 뒤에 경과를 보면서 국민의 수용도에 따라 확대 여부를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논의를 마무리하며 한 가지만 덧 붙이자. 비록 여기서 제안한 기본소득이 기존 기본소득보다는 완화된 형태지만 선례가 없는 새로운 정책인 탓에 정부로서는 채택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또한, 우리의 사회안전망 구멍을 메꾸는 대안으로는 다른 것도 가능하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여기서 제안한 기본소득이 가장 타당하므로 실행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대안을 놓고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단, 과거처럼 기존 체계를 조금씩 보완하는 방식은 택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 방식이 효과적이지 못함은 이미 드러났다. 그러니 이번에는 사회안전망 구멍을 확실하게 없앤다는 목표를 분명히 하고,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대안 중에서 택하자는 것이다. 그래야만 이번 코로나 사태가 우리 사회에 던진 숙제를 후회 없이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석재은(2020). 생애선택기본소득제의 제안. 한국사회정책학회 춘계학술대회 발표문.
  • 주은선(2013). 한국의 대안적 소득보장제도 모색: 현행의 복지국가 프로그램과 한시적 시민수당의 결합에 대한 시론. 비판사회정책. 38:83–126.
  • Offe, Claus(2009). “Basic Income and the Labor Contract”. Analyse and Kritik 01–2009:49–79.
  • White, Stuart(2004). “The Citizen′s Stake and Paternalism.” POLITICS & SOCIETY, 32(1):6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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